내 사랑,

네가 이 글을 읽을 때면 난 이미 이 세상을 떠났겠지.

난 여기에다가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걸 모두 다시 말하지는 않을래.

전에 네게 보낸 편지들에서나 너의 포근힘에 싸여 지낸 그 세월 내내, 

네게 표현했을 그 모든 걸.

넌 무척 헌신적이었어. 정말 고마워.

병원에서 보낸 요 며칠, 네가 옆에 없었더라면 악몽이었을거야.

네 덕분에 난 평온하게 떠나가.

널 만났던 건 하늘에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거야.

엄마에게 부탁해뒀어. 널 위해 내 책상 위에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놓아 달라고. 내 일기장 말야. 

네가 그걸 간직해 줬으면 해. 파란색으로 물든 내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거기 전부 담겨 있어.

잉크의 파란색 

하늘의 파란색

바다의 파란색

이브 클렘의 파란색

청록의 파란색

군청의 파란색.

파란색은 따뜻한 색이 되었어.

널 사랑해, 엠마.

넌 내 삶 그 자체야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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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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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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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행위를 개인의 거룩함을 위한 도구 정도로 보는 이런 이론은, 무엇보다 도덕적 행위가 공동체 사람들 간의 상호 관계와 연관된다는 점을 무시한다. 사실상 현실에서 도덕적 행위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내 필요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비도덕적 행위란 자기 자신을 위해 이웃을 망각하는 행위다. 반면에 도덕적 행위란 이웃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웃의 복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내적 미덕이다.
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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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를 본 후 핑거스미스를 다시 꺼내 읽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아닌데... 뭐가 빠졌는데.... 고개를 갸웃하면서 봤었고 무엇 때문이었는지 찾고 싶었다.  이 부분에 와서야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았다. 영화에서는 자신을 찾아가는 독립된 "존재"가 사라지고 덧입혀진 색들만이 난무했던 것이다. 

이 소설이 영화화 된다고 했을때부터 큰 기대를 했었는데 영화와 소설은 다른 영역, 독립된 객체라고는 해도 말하고자 하는 뿌리는 같았으면 하는 건 내 개인적 욕심으로 그쳐야 하나보다.  그 옛날, 그녀들이 온 몸을 다 내던져 쟁취(!)했던 그 이름은 내 마음에 묻어야겠다. 






호트리씨가 고개를 젓는다. "리버스 부인..." 호트리씨가 말한다. 나는 몸을 떤다.
"절 그러게 부르지 마세요." 내가 말한다. "제발 부탁이예요."
"또, 그렇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럼 제가 당신을 뭐라 불러야 한단 말입니까?"
"모드라고 부르세요. 제게 방금 수중에 제 것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셨지요. 제 이름이 있어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p.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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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리학을 '하는' 다른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코베시에게 윤리학에서는 기술(記述, description)이 전부라고 배웠다. 그러나 참된 기술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 때문에 찾아올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거짓을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덕이 몸에 밴 행위자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 기술들은 그냥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이야기'를 만든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시험하고,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윤리학'에 접근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결정과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이 윤리 이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선택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하는 것"이라는 아이리스 머독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보다,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기술하는지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 참으로, 우리가 한 일을 제대로 기술하기 전에는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비로소 나는 덕의 중요성을 회복하려는 나의 시도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보다 분명히 보게 된 것 같다.

 기독교 윤리학을 신학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된 것도 한몫했다. 기독교 윤리학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은 여기서 '분리'가 너무 강한 단어라고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윤리학이 신학과 분리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사랑이나 정의나 그 외 다른 근본적 원리를 도덕적 삶의 근본 원리나 원리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믿음 정도로 여길 뿐, 우리의 도덕적 삶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로는 잘 여기지 않는다.

신학을 좋아하지 않아서 '윤리학자'가 되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을까 염려된다. 나는 늘 기독교 윤리학회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지만, 그런 학회의 존재 자체가 윤리학에서 신학을 분리하고 싶은 유혹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윤리학계의 일부 동료들이 나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내세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도 그냥 아무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니 말이다.  p. 217,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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