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장 요약 및 밑줄. 공유하고 싶어서, 가져옴.

인터넷 (당시 아르파넷ARPAnet)이 미국 국방부용으로 개발되었을 때, 과학자들은 공식업무보다 사교적 용도로 사용했다. 정부는 이를 팔려고 내놓았으나 AT&T 마저 인수 제안을 거절했고, 인터넷은 결국 공짜로 풀렸다.

인터넷이 더 발전하리라 생각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사교 공간으로서 비상업적 인터넷은 끊임없이 성장했다. 모뎀을 소유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껐고, 마케팅 담당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인터넷을 상업적 용도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인터넷 이용자들은 상점 사이트 보다 채팅방과 토론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웹에 비즈니스가 남아있었지만, 인터넷 연결과 그를 통한 대화는 압도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p.132) *디지털 네트워크의 - 연결/접속 편향성
알고보니 콘텐츠가 왕이 아니라 ‘접속(contact)’이 왕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소셜미디어’가 태어났다. ... 기업들이 계속해서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은 인터넷이 소셜 미디어로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본래부터 그랬다. 인터넷의 역사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되풀이해서 뿌리치는 소셜 미디어의 이야기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주도적인 기업들은 그 순간에는 영원할 처럼보이지만 빠르게 사라진다. 한국의 경우 다모임, 싸이월드, 프리챌, 그리고 블로그, 페이스북의 흥망성쇠를 생각해보라. 때때로 인터넷의 사교적 속성은 특정한 서비스의 비즈니스적 편향도 내쳐버린다. 즉, 우리가 연결(접속)되고자 하는 욕구는 상업적 욕망을 압도한다.

게다가 이 새로운 미디어는 기존의 활자, 라디오, 방송국처럼 ‘일방’과 ‘독점’이라는 형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한명의 개인이 전 세계적 규모로 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업과 정부가 전과 같은 마케팅과 소통을 하기는 어렵다. 신화와 담론은 해체되고 거짓은 바로잡힌다.

“(p.152) 한 자동차 회사가 소비자들에게 그 회사의 신차 텔레비전 광고를 만들게 했을 때, 공교롭게도 기름잡아먹는 SUV를 비판하는 반광고가 가장 인기 있는 비디오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 통렬한 풍자들은 인터넷에 공유되고 전파되며 심지어 텔레비전을 통해 재방송되기까지 한다. 뉴스이기 때문이다. 그 자동차 회사는 대화를 이끌어냈다. 다만 그 회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을 뿐이다.”

모두가 연결된 소셜 네트워크 공간이란, 일방의 대화도 양방의 대화도 아닌 다대다 대화이다. 저자는 이제 기업과 정부가 대중을 움직일 무슨 정교한 장치들을 더 짜낼 것이 아니라, 간단한 원론(품질과 진실 이라는)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다.

디지털 기술은 ‘급여를 벌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자이며, 대중매체의 반복적인 신화에 편안해 하는 소비자’라는 ‘산업혁명시대의 인류’를 변화시켰다. 아무리 광고 대행사들이 이용자들을 ‘소비자’로 타겟팅 한다 해도 넷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자신을 ‘소비자’로만 가두지 않는다. 우리는 “소비자, 생산자, 투자자, 비평가, 그리고 다른 어떤 역할이든 맡으면서” 또 다시 하나 이상의 기반에서 서로 ‘연결contact’된다.
_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있다. 초창기 ‘공유와 무료(혹은 참여 민주주의)’가 매력 포인트였던 인터넷 기술이 언제부턴가 천편 일률적으로 상업화되어간다고 걱정했었는 데, 또 그렇게 보기만은 어렵구나. 생각해보면 걱정 이전에 염증부터 느꼈던 우리들 이었으니까. 나 또한 노잼 콘텐츠 보다는 광고 일변도의 계정부터 언팔하기도 하고, 블로그에서 페북이나 인스타 등등으로 플랫폼을 옮겨온 주된 이유는 심해지는 광고와 선동이 지겨워서였다.

그렇다. 난 문화적 소통을 원했다! 그런 소통이 된다는 가정하에, 그것이 진실이고, 윤리적이며, 취향저격이라면 영업 당할 의향 마저 있었다!!

누구의 의도대로도 움직여지지 않는 살아있는 유기체 같은 공간. 저자가 그리는 소셜시대의 미래는 디스토피아도 유토피아도 아닌 듯. 하긴... 미래에 대한 숱한 장밋빛, 흑빛 전망들이란, 결국 여러 겹의 혼재된 색깔들로 현재에서 구현되어 왔을 뿐. 그럼에도 더 나은 미래란 현재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린 것이라.. 사색하게 되는 지점들이 많아진다.

이제는 아무도 넷상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선명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역으로 모두의 공격에 노출되었단 뜻이다. 이 사실 자체는 되돌릴 수도, 어떤 방향으로 제지시킬 수도 없다.

하여, 오늘에 맞는 새로운 윤리 의식을 정립하는 시도들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이미 있는 데, 나만 모르는 건가요?) 물론 누군가 (그것이 주커버크라 하더라도 ㅋㅋㅋ) 어떠한 강령을 만든대봤자 것도 그냥 선언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부지기수지만. 뭐 3.1운동에도 기미독립선언서는 있었던 법이니.. 다소 무망하게 들릴지라도, 그런 시도를 통한 개인의 다짐들이 생겨난다면 적어도 이 혼돈의 카오스 sns가 누군가를 죽이는 일 만큼은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좋아요 개수가 나의 인격적 성숙은 아니다’ ‘그 사람의 넷상의 인성과 실물 인성은 보정된 셀카만큼 다르다.’라던지.. (응??? 써놓고 후회중)

여하튼 ‘접속/연결’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저자의 통찰에 새삼 감탄 중이다. 계속 읽어나가 보기로 한다.

“(p. 138 )
콘텐츠가 왕이었던 적은 결코 없다. 접속이 왕이다. 그럼에도 네트워킹 기술이 약속하는 새로운 수준의 인간적 유대감과 공동작업의 가능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고파는 자원인 콘텐츠의 형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속해있지만 거의 모르고 있는 더 거대한 유기 조직체 속의 동질세포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접속, 곧 사회적 유기 조직체를 함께 건설하려는 이 욕구야 말로 지금까지 디지털 기술을 이끌어 온 힘이다. 더 많은 접속과 만남을 향한 본능은 지금의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진화적 명령이다. 원자들이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가 모여 세포가, 세포가 모여 유기체가 되듯이, 우리 유기체들은 더 높은 수준의 조직으로 발전하기 위해 서로 네트워킹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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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다.
음악을 정말 많이 듣게 되는 시기. 그리고 그 때 좋아하는 인생 가수와 그의 정서들.
나에겐 그 시절이 아마 고3이지 싶고, 저녁 야자 급식값 뽀려서 굶어가며 시디 샀었더랬다. mp3로 엄청 갈아타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난 시디피가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애 가장 여러가지 음악을 많이 듣던 시기...
비틀즈, 라디오헤드, 딥퍼플, 메탈리카 그리고 퀸을 좋아했었다. 제일 좋아하는 밴드는 역시 퀸이었다. 솔직히 비틀즈도 좋아했지만 퀸을 좋아하는 게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120분간의 영화를 보며 아직까진 여전히 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_
그런 시기가 있다.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팽개치고라도 새로운 관계와 조건을 좇을 때가 있다. 필연적으로 가족 혹은 뿌리를 떠나고 싶을 때. 더 발전하고 싶다는 이유로 합리화 하면서, 돌아오라는 이들을 뿌리치면서.
단절은 보지 못한 세계를 열어주기도 하지만, 그 시기의 내면을 잘 다독이지 않으면 나는 취약한 상태가 된다. 외로움과 공허의 상태를 잘 파고드는 유해한 관계, 요구들이 있다. 가능성을 시험해보기로 단절을 결단 한 나는 그들에게 삶의 핸들을 통째로 내주기도 한다.
_
우리는 그 시기를 겪어낸다.
그리고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못하거나,
나아가거나 나아가지 못하거나.
옳고/그름과 좋고/나쁨 이라는 도식화로 정리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삶이 내보이는 어떤 진실을 저마다가 알아 갈 뿐 임을.
_
누구에게나 영화 속 ‘프레디’ 같은 시기가 있지 않을까.
약하고 여리기도 하며, 혼란스러워서 치명적인.
또 반짝반짝 빛나지만 유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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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1-07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시기가 있어서 엄청 공감해요.^^

공장쟝 2018-11-07 22:52   좋아요 1 | URL
그런 시기를 선명하게 보여쥬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음악두 좋고~ 내리기 전에 보셔요~~ 영화 추천드려요.. ㅠㅡㅠ

잠자냥 2018-11-08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늦은 밤 이 영화를 봤는데 울다 웃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는 퀸의 팬이라면 무조건 별 다섯 개짜리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으아. 그 라이브 에이드 현장이란!

공장쟝 2018-11-08 17:59   좋아요 0 | URL
영화 시작하자 마자 소오름이...

카알벨루치 2018-11-08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드 머큐리, 갑이죠!

공장쟝 2018-11-08 17:59   좋아요 0 | URL
목소리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더군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 인생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정문정 지음 / 가나출판사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오늘은 심리적으로 좀 타격이 있다.
소화 안되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었더니, 무기력하다.
나름의 제지를 해도, 계속해서 “자기 생각만”을 강요하는 사람, 심지어 그게 “선의고 호의”라고 착각하는 상사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류가 다 밉다.

“(p.173) 좋은 의도로 조언을 하느라 그러는 것이기에 정색하기도 뭐하다. 그렇다고 참고만 있기에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서로 상처받지 않고 대화를 종결하는 데 필요한 자기만의 언어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주로 두 개의 문장을 사용한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와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다.”

평소엔 나름의 대처법으로 잘 넘어갔는 데, 오늘은 역습당했다. 그분의 가스라이팅에 지쳐 같이 일하던 동료가 그만두었기 때문ㅠㅅㅠ 같은 공간에 나 밖에 없어서 계속 당했다.. 못참고 “알아서 할게요” 했다가 더 혼났다...

“오늘 저땜에 기분 안좋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퇴근이라도 좀 가뿐하게 하려고, 전향적인 태도(굿바이 인사 섞인 분위기 푸는 말)를 취하자 마자 집가려고 가방 든 상태에서 “내 기분보다는, 니가 일에 대한 관점이 잘못된 것 같은데 그걸 고치지 않으면 blah~~blah~~~~” 십오분 서있었네??

어쨌든 그렇게 한 껏 내 관점 교정해주시고 내 인생설계를 해주시다가 자신의 말이 자기도 멋졌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에게 정말로 도움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듯 해서... 무기력하고 슬펐다.

너무너무 피곤해서 오자마자 잠들었다가 열두시 넘어서 깼네.. 망했다.. 잠 안온다..

업무 지시는 안하고, 자꾸 인생 조언을 하려고 하시는 관리자 급 여러분, ‘업무’ 솔선수범으로 자신의 ‘멋진 인생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주세요.
또 “내가 진짜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는 우리 가족도 내 친구도 나한테 해봤자 안듣는 말 이므로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하는 말일 뿐입니다. 주어를 바꾸세요. “내가 진짜 너 땜에 빡쳐서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하는 말이다”로.

그러고 보니 이 책 #무례한사람에게웃으며대처하는법 그만둔 그 동료가 넘 안쓰러워 읽어보라고 빌려줬었는 데.... 새로운 직장에서는 더 좋은 상사 만나시길.. 아니면 웃으며 잘 대처하시거나 ㅠㅡㅠ

그리고 앞으로 나님은 나이 어린 사람 포함 모든 사람에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랍시고 5분 이상은 떠들지 않기로 하자. 5분이 넘어가면 결국 자기 위로일 뿐.


“(p.20)터벅터벅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어도 밖에서 묻혀온 부정적인 말들은 털리지 않고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p.188)직장 상사는 당신의 멘토가 ‘원래’ 아니다. 사람은 나이가 더 많다고 해서, 경험이 더 많다고 해서 저절로 현명해지지 않는다. 드라마 〈미생〉에서 사원 장그래의 멘토였던 오상식 과장처럼 뒤에서 자신을 돌보고 신뢰해주길 바라겠지만, 그런 사람은 드라마에서나 존재한다.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하게 어필하면 직장 상사가 그 속내를 헤아려줄 것 같은가? 그런 일은 절대 없다”

“(p.222)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자꾸 참으면 내가 무기력해진다.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면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만의 대처법을 갖춰야 한다. “다들 괜찮다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떨어?” 하는 사람에게 그 평안은 다른 사람들이 참거나 피하면서 생겨난 가짜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인류는 약자가 강자에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함으로써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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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ahofish 2018-11-09 0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저 사람 뭐야, 그냥 이것만 읽어도 딥빡치네요... 공장쟝님, 빨리 저런 더러운 기억 지워버려요. 으아, 진짜 저 욕 별로 안하는데 저절로 욕이 나와요... 이런 쌍쌍바....
저 책은 제목과 표지는 매우 익숙하나 별로관심없던 책인데, 인용문이 참 와닿네요.
여튼 뒤늦은 댓글이지만, 오늘은 좋은 말 좋은 일만 가득하셨기를...!

공장쟝 2018-11-09 16:47   좋아요 0 | URL
여기에 쓰고나니 분이 좀 풀렸어요! 고마워요~!! 피쉬님 >.<
 


#백래시의 첫인상

11월에 뽀갤(?) 벽돌책. 각주 포함 800페이지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무려 양장본 임에도 이책 되게 가볍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한국 책은 돌가루를 섞어서 종이에 손 베고 살인무기로 쓸 수 있다고 비판한 기억이 있는 데, 프로그램 이후로 어쩐지 요즘 나오는 책들은 점점 가벼워지는 모양새다. 덕분에 내 손가락은 안전할 예정. 그래도 부피가 있으므로, 들고 다니다가 발등을 찍을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집 식탁위에서만 읽기로 한다. 요즘 식탁을 책들에게 내주고 정작 식사는 동생한테 얻은 티테이블(밥상)에서 하고 있다 ㅋㅋㅋ

“ (p.10)팔루디는 미디어와 대중문화에서 진행되는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는” 반동에 ‘백래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분석의 대상으로 객관화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둘러싼 오해와 거짓말을 분쇄할 수 있는 관점과 언어를 제공했다. “사회 진보와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뜻하는 ‘백래시’야 말로 페미니즘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표현이었던 셈이다.“

모든 혁명에는 반혁명이 따른다. 모든 항쟁 뒤에는 거센 탄압이 따라온다. 가까운 우리 현대사에서 “광우병 반대 촛불”이 “촛불좀비”로 “518 항쟁”이 “광주폭동”으로 프레임 씌워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항쟁은 변화에 대한 열망이므로, 기득권을 잃게 되는 이들은 이를 저지시켜야 한다. 새로운 것을 얻으려는 이들의 간절함보다 잃지 않기 위한 자들의 발악이 더 거센 법이다. 때문에 역사는 종종 역진한다.

그것은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 반페미니즘적 공격이 “여성의 불행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면서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의심하게(p.10)”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운동과 항쟁은 이기는 것이 변수고 지는 것이 태반이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안다.
때때로 ‘정신 승리’라고 손가락질 받더라도,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때는 힘과 실력이 부족했다’고 이야기는 할지언정 ‘싸움 자체를 자책(부정)’하는 현상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따라오는 반동은 후자의 정서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이는 때리는 남편을 증오하기보다는 ‘자책’을 더 많이하는 가부장제하의 여성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묘하게 겹치는 것 같다. 그게 가슴 아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말로 믿게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싸움이 필요하고, 또 그 역사가 축적되어야 하는 것일까.

“(p.15)하지만 여성 노동자의 고통과 과로는 페미니즘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기획의 산물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하다. 팔루디의 말처럼, 여성들의 비참과 불행은 페미니즘 탓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충분하지 않은 탓일 뿐이다.”

2006년 백래시 15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팔루디는 우익(공화당)계열의 네오페미니스트들의 페미니즘 탈취보다 “시장이 페미니즘으로 구사한 유인 상술(p.27)”을 더 걱정한다.

음. 나 역시 그렇다. 엄마부대(그러고 보니 요즘 안보이네요. 주옥순 대표님)는 안무서운데, 확실히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류의 언설이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어정쩡하게 불안한 것이다.

“(p.27)경제적 독립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구매력이라는 황금사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 구매력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카드빚과, 터져 나갈 것 같은 옷장, 그리고 절대 끝나지 않는 허기를 안겨줄 뿐이다. 허기가 절대 채워지지 않는 건 물질적인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결정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자기 계발’이라는 황금 사과로 변신했다. 이 자기 계발은 주로 외모와 자부심, 그리고 젊음을 되찾으려는 헛수고에 바쳐진다. 그리고 공적 주체라는 페미니즘의 윤리는 언론의 관심이라는 황금 사과로 탈바꿈 했다.”

얼마 전 페미계의 머모님 정희진 왈 “신자유주의 시대 페미니즘의 나아갈 길 같은 것은 없다”고 하셔서 대절망(?)했던 기억이 생생하기에 많은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닦아놓은 길을 되짚는 것이 새로운 길을 찾아헤메는 불안감을 조금은 덜어주지 않을까 하며 읽어갈 생각이다.

멋진 해제글을 써주신 손희정님 말대로 “페미니즘에 모두를 거는 열정보다는 나가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기술(p.17)”을 되새기며...첫날이므로 서문까지만. (응?)
책도 나가 떨어지지 않고 읽어보겠습니다. 내일/월요일은 좀 바쁘고 화요일엔 1장 읽어야지. (라고 쓰면 읽겠지?)

“환멸은 출발점이다. 실망과 패배는 다르다(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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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11-04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작이 좋습니다! 저도 오늘 내에 가능하면 작성할 예정이에요. 자, 쭉쭉 나아갑시다!!

공장쟝 2018-11-04 12:13   좋아요 0 | URL
락방님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영차영차~
 
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_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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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주는 것은 악한 의도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상처를 받으면,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편했다.
선악의 틀로 짜여진 나의 세계관 속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젠 안다. 의도치 않게도 상처 줄 수 있다는 것. 나의 위치가, 태도가, 때로는 먹어버린 나이가, 생각과 신념이,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누군가를 해치기도 한다는 것을.

“(p.181 모래로 지은 집)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나의 독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시점 부터는 도무지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 멀리서 맴돌기만 했다.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읽으면서 아파서 많이 울었다. 내가 준 상처들을 떠올리면서 미안해하는, 그러나 미안한 마음이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여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너무 안이한 반성은 아닐까하고.

“(p.235 손길)
언니,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그러게. 왜 어두운 위치에서서야, 겨우 볼 수 있는 건지.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밝다는 것은 빛이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이 더 짙어져 있다는 것임을. 누군가의 어둠을 질료삼아서 빛나는 것이라면, 모두가 덜 밝은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지금의 내가 너무 밝은 곳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 285 아치디에서)
뒤에서 보니 하민이 자꾸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왜 우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다만 조금씩 속도를 늦춰서 걸었다. 그녀가 울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어서. “


결국 우리의 상처가 의도가 아니라면, 때문에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상처주거나 상처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단편집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슬픔에 너무 쉽게 이입하지 않을 것, 그의 눈물을 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을 것, 다만 조금씩 느리게 걸을 것. 해설에서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이를 “(p.319) 단시간에 빠르게 솟구쳐 상대에게 범람하고 금세 소진되는 열정과 달리, 상대를 손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으려는 배려가 스며있는 거리감”라고 말했다.
아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_


‘쇼코의 미소’ 때만 해도 동세대의 소설가들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게무해한사람’으로 최은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관계에 대해서, 또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그녀는 어디까지 헤집어서 생각했던 걸까.

더는 누구도 나 자신도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왜와 어떻게를 따져물으며 뒤집고 또 뒤집어 끝없이 적어내리던 29,30살 일기장 속에 두루뭉수루하게 적힌 나의 이야기가- 작가의 세심한 문장과 소설로 적확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아주 깊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위로 받았다고 느꼈다. 두번 읽고 세번 읽어도 좋았다.

결코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없겠지만,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만큼 스스로에게는 당연한 것들을 휘두르지 않도록. 나는 몇번이고 이 소설을 더 읽을 것이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덜 유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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