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어떤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아. 아주 중요한 일도 아니고, 생활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 데도 말이야.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벽에 걸린 풍경화처럼, 꿈속처럼.

 

노을이 지고 있었어. 19세기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소년이 통을 매단 막대를 들고 서 있었어. 그곳은 중국 남경이었고, 나는 상해에서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어. 누군가를 마중하러 나가 있었어. 보도엔 아무도 없고 소년과 나만 있었어. 귀뚜라미를 파는 소년이라고 생각했어. 20년 가까이. 근데 오늘 생각해보니 그때는 가을이 아니었는데 그 소년이 팔고 있던 게 귀뚜라미가 맞나 모르겠어. 어쨌든 난 그때 귀뚜라미를 팔고 있다고 생각했어.

 

소년은 귀뚜라미를 다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까? 그저 행인처럼 길에 서 있었어. 노을을 보며. 그 소년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느껴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어. 그 소년도 나를 쳐다봤지. 우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사라고도 하지 않았고, 사려고도 하지 않았어. 서로 빤히 쳐다보다 노을을 봤어.

 

그것뿐이었어. 이 장면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다음 장면이 생각이 나지 않아. 그 소년이 어느 방향으로 걸어갔는지, 상해에서 온 버스에서 누가 내렸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아무 일도 아니었어. 소년을 다시 만난 적도 없고,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일도 없었지. 그런데도 간혹 이 장면이 떠올라. 내가 선 자리에서 바로 아득해지는 느낌. 아무 까닭 없이 그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어. 그러면 나는 잠시 꿈속에 들어가 있다 나오는 기분이야.

 

이제 나는 20대가 아니고, 그 소년은 소년이 아니겠지. 내 인생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 중요하지 않는 장면... 기억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 이런 것이 내 기억의 방 어디에 걸려 있어. 쓸모없고 아름다운.

 

 

 

 

소년

_김춘수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은 졸고 있었다.)

 

열린 책장 위를

구름이 지나고 자꾸 지나가고 하였다.

 

바람이 일다 사라지고

다시 일곤 하였다.

 

희맑은

희맑은 하늘이었다.

 

소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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