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주둥이 부분이 조금 깨어졌어. 엄마는 깨진 그릇은 재수가 없다고 하셔. 오래 전에 남경에서 지냈는데 거긴 흠 있는 그릇이 많았어. 심지어 살짝 깨진 그릇이 재수 있다는 말도 들었어. 똑같이 깨져도 여기서는 재수 없는 일이 중국에 가면 재수가 있는 걸까. 같은 손이지만 인도에서는 왼손으로 악수도, 식사도 안 하잖아. 왼손은 뒤를 씻는 손이니까 위생 때문이었겠지만 나중엔 오른쪽은 신성해지고 왼쪽은 무례해졌지. 어떤 필요 때문에 생겨난 행동이 관습이나 관념이 되기까지 얼마만한 시간이 필요할까?

 

난 결혼하고 일곱 번쯤 이사했어. 한 번은 어머님이 그해 우리 집 이사가 불길하다는 도사의 말 때문에 전전긍긍하다 부적을 주셨어. 부적을 싱크대 아래 붙여 두고 이사를 했어. 별 일 없었어.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다시 이사하는 날, 달력을 봤어. 어머님은 손 없는 날을 고집하셨을 테지만 난 그날을 피했어. 손 없는 날은 이삿짐센터 예약도 어렵고, 가격도 비싸거든. 그렇게 이사를 해도 역시 별 일 없었어.

 

어쩌다 손 없는 날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인도의 왼손처럼 어떤 이유로 생겨났다 관습처럼 돼 버린 게 아닐까? 행운과 불길을 세기 시작하면 마음은 불안해져. 징크스가 그런 것 같아. 번거로운 동작을 수십 번 반복하는 야구선수를 보면 불안이 그의 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여.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부모님이 죽는다는 속설 알지? 나는 그 말을 믿고 어렸을 때 빨간색으로 이름을 안 썼어. 어쩌다 빨간색으로 쓰면 놀라서 검정으로 덮어버렸지. 근데 이 이야기의 시작은 진시황 때 황제만이 붉은색으로 이름을 적을 수 있고, 평민이 사용하면 큰 벌을 준 거라네. 2천 년도 더 지나서 이국에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 된다고 조심했던 거지.

 

빨간색 하니 빨간 머리 앤이 생각나. 앤이 숲의 도깨비를 상상하고서 자신의 상상 때문에 무서워서 밤에 그 숲을 지나지 못한 거 기억나? 우리가 지어낸 허상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건 아닐까?  

 

빨간색으로 이름을 써도 괜찮다는 걸 아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속설과 편견에 휘둘려. 마음속에선 불안과 두려움이 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고. 나보다 늘 담담해보였던 너도 그럴 때가 있겠지. 나보다 덜 자주, 옅게 지나가겠지만. 근데 깨진 그릇은 불운일까 행운일까? 깨진 그릇일 뿐이지! 그 외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매순간 알아차리고 싶어.

 

 

 

지나친 상상을 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상상이 낳은 요사스러운 괴물들이 여기저기 어두운 그늘에 숨어 싸늘한 뼈뿐인 손을 뻗어 자기들을 만들어낸 여자 아이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루시 모드 몽고메리,ANNE1 만남(동서문화사, 2004),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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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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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6: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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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6: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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