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림자가 있어야 진짜라는 이야기 했잖아. 그림자가 인간의 부정적인 면이라면 그것도 역시 삶의 한 부분이지. 서양의 이야기에서는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동양에는 그림자를 싫어하는 사람 이야기가 있어. 莊子(현암사, 2016) 「잡편(篇)-어부(漁夫)에 보면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떨어지려고 달리는 사람이 있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가 붙어 있고 발자국은 더 많이 생기는 거야. 더 빨리 달리면 될까? 그래서 더 더 빨리 달리다 힘이 빠져 죽고 말았대.

 

이 이야기는 공자와 어부의 대화인데, 공자가 자기는 별 잘못도 없이 네 번이나 다른 사람의 원한을 샀다고 한탄하자 어부가 이 이야기를 들려줘. 술을 마실 때 술잔을 가릴 필요가 없고, 초상을 당했을 때 슬픈 마음이면 되는 거지, 왜 예법을 따지고 있냐고. 인의와 시비를 따지고 허례를 중시하며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는 공자가 그림자를 싫어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거야.

 

본성대로 산다는 건 뭘까? 내편(內篇)-덕충부(德充符)에 못 생긴 사람 이야기가 나와. 애태타(哀駘它)라는 사람인데 너무 흉해서 처음 보면 모두 깜짝 놀라는데 함께 지내면 그를 다 따르고 좋아한다는 거야. 여자들은 그의 첩이 되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사람) 역시 내면의 덕이 갖춰진 사람이었는지 제나라 환공은 그를 보다가 성한 사람을 보고 성한 사람이 모습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외형을 온전히 잊고 내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걸까?

 

그들이 어째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없어. 다만 애태타가 남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없고 딱히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도 않고 늘 남에게 동조해 주었다고 해. 마음이 잘 조화되어 있다는 표현이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신의 모습이 흉해서 외형에 집착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 오히려 자신의 외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누가 내 성별과 학벌과 나이와 외모와 부의 유무에 상관없이 내 마음을 투영해 나와 대화한다면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욕심 없이, 목적 없이, 존재로 만나는 것. 꿈같은 일일까?

 

마음은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어. 한번 쓱 훑어보고 판단해 버리면 편해. 집을 설명할 때 제라늄이 피어 있다거나 하는 설명보다 몇 억짜리 집인지 말하는 걸 더 편하게 여기는 어린 왕자의 어른처럼. 예법은 그런 편안함을 주는 것 같아. 옷을 보면 한 눈에 지위를 알 수 있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지. 공자의 예법은 힘을 잃었지만 다른 허례와 시비가 여전히 있어. ‘옳다, 그르다하는 게 많아질수록, ‘해야만 해라는 말이 늘어날수록 그림자를 떼어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바쁘고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싶어.

 

그림자 이야기 하다 오랜만에 장자도 꺼내 보네. 친구가 그러더라고. 장자를 남편으로 두면 얼마나 힘들까? 장자는 아내가 생고생하다 죽었는데 아내 장례 때 노래나 부르는 몹쓸 놈이라고. 그러니까 궁금하네. 장자는 자기 이야기 속 추남(醜男)들처럼 외형을 잊고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내를 대했을까?

 

 

무엇을 얻으려는 욕심이 없으면 신령(神靈)도 탄복한다.-p.309(莊子』「天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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