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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터키는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접점지대이다.
오르한 파묵은 터키를 배경 삼아,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번영과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세밀화이다. 이슬람의 세밀화는 인간의 눈이 아닌 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인간이 우상화되는 것을 염려했고, 대상을 실재로 재현해내려고 하기보다는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중요시하였다. 그들은 눈과 손의 기억에 의지하여 대상을 그렸다. 이 같은 이슬람 세밀화풍은 바다건너 들어온 베네치아 화풍에 의하여 변화의 위기를 맞는다. 술탄의 화원에 소속된 세밀화가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의 물결을 당혹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매료된다.
베네치아 화풍은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베네치아 화풍에 쓰여진 원근법과 그림자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멀리 있는 작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그리는 것은 인간에 눈에 비친 대상을 좀더 사실적으로 그리려는 시도이다. 알라신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며 신봉해온 화원의 세밀화가들에게 베네치아 화풍의 초상화는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려고 하는,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위대한 장인들의 그림을 모방하며 그림을 그렸던 자신들을 돌아보며, 개성과 스타일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어떤 이에게는 개성과 스타일이 결점으로 여겨지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더욱더 그림에 매혹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바다 건너 유입된 새로운 화풍은 세밀화가들 사이에 갈등을 유발시키고, 급기야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소설은 살인범을 찾는 추리 소설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범인이 누구인가는 중요치않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다른 가치관과 신념을 지니고 있는 세밀화가들의 충돌, 그리고 거기에서 느껴지는 예술가들의 번민과 고뇌이다. 그들의 가치관이나 번뇌는 이슬람의 설화 등을 통해 우의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나는 전통을 지키려고 애쓰는 자들과 자신을 발전시킬 수도, 파멸시킬 수도 있는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들의 충돌을 보면서 16세기 터키의 모습이 19세기 우리나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근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19세기 우리나라의 가장 큰 과제는 전통을 고수할 것이냐,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냐 였다. 그 유명한 김옥균이나 박영효 역시 세밀화가들가 비슷한 고뇌를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가 택했던 것은 어설픈 변화였다. 충분한 자기 반성 없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성급한 근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의 강점은 세밀화가들의 고뇌를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국제적 정세를 간략하게 암시하고, 그 속에서 변화를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밀화가들의 고뇌가 개, 죽음, 말, 등등 그림 속의 여러가지 사물을 통해 때로는 빨강 등의 색채를 통해 섬세하게 전달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또한 치열하게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다. 서양의 인물화나 초상화가 그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세밀화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왜 그림이 그림으로서만 존재해서는 안되는 지에 대해 반문해보았다. 그는 그림은 반드시 이야기의 일부일 때만 그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이야기 속의 그림이 아니고 그림 그 자체 뿐이라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동양화에서는 시, 즉 문자가 그림의 부차적인 텍스트가 된다. 즉 그림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림의 가치를 정의하는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작가의 말에서 보니, 오르한 파묵은 서양의 독자들 보다는 동양의 독자들이 소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비흐자드의 바늘로 스스로의 눈을 찌른 오스만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청준의 <서편제>가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우리 민족의 '한'과 비슷한 정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을 몸으로 육화시키는 것에 대한 예는 내가 식견이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서양 예술사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비흐자드의 바늘 이야기에선 이슬람의 세밀화가들이 혼을 다바쳐 예술을 받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완벽함을 드러내는 것일까? 결점을 드러내는 것일까? 진정한 예술작품은 천의무봉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