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화 낼 수 있어
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 물론 다른 아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미르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미르 몸속 뜨거운 열이 모두 위쪽으로 몰려온 듯 얼굴도 화끈거린다. 아이들은 미르가 그러든 말든 이제 쳐다보지도 않는다. 미르는 이제 거기 계속 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발길을 돌려 교실로 돌아가는 미르의 눈이 뜨거워지더니 금세 축축해진다. 눈물이다. 미르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진다.
‘그래, 아이들 말이 맞아. 요즘 이런 머리 스타일 하고 다니는 아이는 나도 못 본 것 같아.’
머리핀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미르는 앞가르마를 타서 양쪽에 핀을 쌍으로 꼽고 다닌다. 모아놓은 핀 상자를 열고 그날 입은 옷과 그날 기분에 따라 어울리는 핀을 골라 꼽는 것은 미르가 매일 아침 즐기는 일 중의 하나이다. 조금 전 채리가 이제 그 촌스러운 스타일 좀 바꿔보라고 했을 때 까지도 미르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수지까지 거들고 나설 때는 돌이 날아와 마음 한가운데를 맞은 기분이었다.
“쟤 아마 학교 졸업할 때까지 저 스타일 그대로 하고 다닐 거야. 한번 정하면 바꿀 줄을 몰라.”
더 이상 말하기가 싫어진 미르는 이후의 오후 수업 시간 내내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채리랑 수지가 나에게 못마땅한 게 있나? 나를 안 좋게 보고 있는 것 같아.’
채리와 수지는 미르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애들이기 때문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르는 자기가 뭘 잘 못 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채리와 수지 아니면 난 친구도 별로 없는데, 그 아이들마저 나를 멀리하면 어떡하지? 점심시간에 밥도 나 혼자 먹어야 할지 몰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르의 걱정은 눈덩이 굴릴 때처럼 머릿속에서 자꾸 커져 간다. 커져버린 눈덩이에 깔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 미술 시간. 찰흙으로 만들기를 할 테니 찰흙과 찰흙칼을 준비해오라고 어제 선생님께 말씀하셨다. 가지고 온 것을 꺼내어 만들기를 시작하려는데 미르 뒤에서 쪽지가 넘어온다.
‘나 오늘 준비물을 깜빡 했어. 좀 빌려주라. -채리-’
미르는 자기가 가져온 찰흙 덩어리의 반을 뚝 떼어내서 찰흙칼과 함께 채리에게 빌려준다. 다른 아이가 아닌 미르 자기에게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은 채리가 미르를 제일 친한 친구로 여긴다는 뜻 같아서 미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런데 미술 시간이 끝날 때까지 미르는 찰흙칼을 만져보지도 못한다. 채리가 내내 가지고 썼기 때문이다.
‘찰흙칼이 꼭 있어야하는 건 아니니까. 없어도 이렇게 만들 만하네 뭐.’
미르는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한다.
미술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 채리가 찰흙칼을 들고 미르 자리로 온다.
“여기 있다 찰흙칼. 이게 이번 시간에 네가 만든 거야?”
미르가 만든 찰흙집을 보고 채리가 묻는다.
“응.”
“야, 이 정도는 유치원 애들도 만들겠다. 이제 좀 벗어나야지. 집이 꼭 이렇게 생긴 집만 있니? 이 세상에 집 모양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채리는 미르가 만든 집을 보고 웃으며 떠들어댄다. 주위의 아이들도 무엇을 보고 그러나 해서 모여든다.
“난 집이라고 하면 이렇게 생긴 집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
미르는 겸연쩍어하며 모기소리 만하게 대답한다.
“미르 네가 그렇다니까. 하나 밖에 몰라요 하나 밖에. 둘도 있고 셋도 있다 미르야, 알았냐?”
옆에 있는 아이들이 웃으며 수군거린다.
미르는 어제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가슴도 쿵쾅거린다.
채리에게 빌려주고서 찰흙 도구 없이 손으로 자르고 뭉치며 간신히 만든 작품이다. 미르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리로부터 그것 때문에 비웃음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르는 자리로 돌아가는 채리를 따라 간다.
“채리야, 이게 네 작품이니?”
채리 책상 위의 작품을 보며 미르가 묻는다.
“그래. 어때, 멋있지? 도구가 좀 더 있어야겠더라. 네 것만 가지고는 내 생각대로 만들기가 어렵더라고.”
“그래? 나는 찰흙이 부족했는데. 이것 도로 가져가서 도구도 함께 써서 다시 만들어보려고 해.”
미르는 채리가 만든 작품을 들어서 두 손으로 뭉치기 시작한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지금?”
채리의 눈이 동그래진다.
다 뭉쳐서 이제는 둥그런 찰흙덩이로 변해버린 채리의 작품을 가지고 미르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도 화를 냈다 드디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마루 테이블 위에 엄마가 읽는 것인지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온다.
<화내지 않는 법>
무심코 그 책을 몇 장 넘겨보다 미르는 생각한다.
‘난 화를 내고 싶다고. 화가 날 땐 화를 내고 싶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