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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도무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작가들이 있다. 밀란 쿤데라는 내게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쿤데라의 책을 애독하는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간 소식에 놀라움 이상의 감정을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고전 반열에 오를 만큼 뛰어난 작품을 일찍이 집필해 그 명성이 긴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나이는 무려 만 85세! 어찌됐건 이 책으로 쿤데라가 건재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도 선물이다.
스물한 살 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었다. 헌책방에서 구한 90년에 나온 송동준 교수의 번역본이었다. 누런 종이를 매만지면서 한 장 한 장 읽어나갈 때마다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도가 나갈수록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4개월이 지난 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지만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굵은 뼈대, 대강의 줄거리뿐 그 안에 내포된 철학적인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일 년을 주기로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작업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쿤데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신작 『무의미의 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쿤데라가 이전에 어떤 소설을 써왔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작품 중에서 그의 세계관을 총집약한 작품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토마스, 테레사, 프란츠, 사비나와 그들에게 놓인 사건과 역사적 배경을 중점적으로 염두하며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뿐만 아니라 쿤데라의 작품 대다수가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을 염두해볼 때, 작품 안에 존재하는 작가를 완벽하게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쿤데라의 서술은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마치 인물들 위에 군림해 상황을 설명하고 판단하는 신과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던질 수 있는 또다른 질문은 '이 작가는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쿤데라의 시선에 열광하는 것일까?
쿤데라의 오랜 질병은 허무주의다.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네 인물의 삶을 통해서 그는 독자들에게 '무거움을 선택할 것인가? 가벼움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커다란 화두를 던졌다. 인간은 네 가지(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유형이 있고, 두 가지의 갈림길(가벼움, 무거움)이 있다. 필연적으로 무거운 인생은(프란츠, 테레사) 숨막힐 듯한 부자유와 맞닿뜨리게 되고, 가벼운 인생은 (대표적으로 사비나(토마스는 테레사로 인해 가벼움에 세계에서 무거움의 세계로 이동한다) 공허와 허무를 맞땋드리게 된다. 삶을 말할 때, 무작위성과 아이러니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살아왔든) 상관없이 토마스와 테레사처럼 어느 평범한 날에 교통사고로, 프란츠처럼 낯선 땅에서 지뢰를 밟아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독자들이 말하는 '뒷맛이 씁쓸한 쿤데라식 유머'가 아닐까. 그의 책 『농담』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젊은 시절, 유머를 빙자한 치기어린 농담이 자신의 인생 전반을 망가뜨리지 않는가. 이를 갈면서 오랫동안 꿈꿔온 복수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 우스꽝스럽게 종결된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하찮고 의미 없는 것 (무의미의 축제에서 거론되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사람들의 희망과 낙관이라는 환상을 깨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그러한 삶의 근본적인 '무의미'를 독자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했던 그가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의 나이를 염두해볼 때 이 책이 쿤데라의 마지막 소설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 나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여태껏 그가 써왔던 묵직한 작품들의(분량을 보든, 내용을 보든) 대를 잇는 작품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독자가 받은 책은 두 시간만에 다 읽을 것 같은 적은 분량의, 가벼운 에피소드를 모아놓는 듯한 작품이다. 전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인물들의 깊이가 덜하고, 명확한 사건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책의 특성을 제목의 핵심인 '무의미를 염두한 듯한 소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소설 속 뤽상부르 공원의 평온한 고요, 어떤 무심함이다.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 나도 한 번 가보는 샤갈전, 달리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 울타리 너머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이유도 모르는 채 꺄르르 웃는 아이들, 전혀 쓸모 없는 공연……. 작가는 라몽의 입을 빌려 말한다.
"저 사람들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뭐든 다 할 준비가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구 하라는 대로 다 해. 기막히게 조종하기 쉽다고…… 물론 획일성은 어디에나 퍼져있지만. 그래도 이 공원에서는 획일성이 좀 다양하게 있잖아. 그러니까 너는 네 개체성의 환상을 지킬 수 있다는 거지."
개체성은 환상의 핵심, 우리는 이제 개별성의 상징인 가슴과 엉덩이가 아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배꼽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쿤데라는 말한다. 이제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 유일한 것, 어떤 반복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의 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쿤데라가 이 시대의 사랑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 드러난다.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사랑은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채성의 실종 문제는 시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개채성은 인간의 환상, 즉 존재의 본질, 무의미였으며,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너머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고 쿤데라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쿤데라가 작품을 통해 집요하게 말해온 삶에 대한 문제의 답이 '사랑하라'라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것이 긴 세월을 살아온 작가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생각하면 짠해지지만, 문제는 주장 뒤에는 '왜?'라는 물음이 항시 뒤따른 것이다. 독자가 '왜' 이 무의미한 삶을 사랑해야 하는지 작가는 사건을 통해 말해주었어야 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주제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드러났다는 게 섭섭할 따름이다.
물론 '이건 쿤데라의 작품이구나!' 외칠수밖에 없는 부분은 분명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과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 그 가운데 살풋이 드러나는 냉소의 흔적들. 무엇보다 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리의 젊은 네 명의 남자를 세련된 방식으로 그려냈다. 85세라는 나이에 어떻게 이런 젊은 시선을 유지하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작가의 정보 없이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나는 작가의 나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몇 번 다시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피어오르는 물음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훗날 나에게 인간의 본질인 무의미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언젠가 섬광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인 무의미를 목도하는 날이올까? 하는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