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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도 유명한, 지금 우리게 필요한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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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야?"
"대학로"
"이 시간에 왜?"
"연극보러"
"시험이라며?!"
"응. 시험은 시험이고 연극은 연극이지."

그렇다.
며칠 전까지 스트레스때문에 신경이 날카롭다던 엄마의 딸은
코 앞에 시험들을 놔두고 지금 대학로에서 유유자적 연극을 보고 나왔다.
시험은 시험이고, 연극은 연극이지.
생각해보니 환경에 지배당하고 있는 내가 못내 시시해서, 주도권을 다시 찾아왔다.
그까이꺼.
아팠던 건 아팠던 거고 시험은 시험이지.
excause따윈 없는 거야.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모두
그 화려한 유산들 때문이다.
특히 바로크.
일그러진 진주라 불리는 바로크 시대의 웅장함과 그로테스크함
그 속의 미학. 난 그게 그저 좋았더랬다.
오죽하면 대학 교양으로 르네상스 바로크 문화를 들었겠는가.
그 때 접했던 '세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연극'.
깔데론만 주워 들었을 뿐 대본을 구하지 못해 결국 보지 못했더랬다.

그런데,
내가 자주 애용하는 알라딘에서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 공연 이벤트를 하는게 아닌가.
가끔 내 운빨은 무척이나 좋다.
운칠기삼이라고 했던가. 역시 운 좋은 사람은 당할 수 없는 법.
이렇게 당첨됐으니 이건 시험이 코앞이라도 가야하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그러니까 마치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세상의 이치야.라고나 할까.

늘 그렇듯,
우리의 취미는 서로의 연인과 할 수 없는
데이트 코스 같은 것이어서,
보고싶은 전시가 생기거나, 연극표가 생기면
으레 연락하는 내친구 박양.
다행히 오늘은 비번이라 멀리 계룡에서 연극을 보러 서울에 상경해주셨다.

오랜 친구가 좋은 건,
아니 박양이 좋은 건,
어지간한 막말, 무관심에도 시큰둥 할 수 있는 관록과
과격함, 독특함을 동반한 각종 경험들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이다.
뭐 어쨌거나 우리는 현재
끝이난 연애의 시들함을 탓하면서도,
외로움에 치를 떨고, 밤잠을 설치며, 혼자 술을 마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고프만은 아마도 깔데론을 차용한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타자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내고 있다는
고프만의 드라마투르기라는 이론은 깔데론의 희곡과 딱 맞아 떨어진다.

요는 이렇다.
조물주는 세상이라는 무대에 인간이라는 진흙인형을 만들어 놓는다.
왕과, 미인과, 농부, 부자와 거지, 지혜와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생아를.
세상이란 무대에서 저마다 주어진 연기를 잘 하면 사후에 신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시식권을 준단다.
스포일러같지만 결국 지혜와 거지는 한방에 천국에,
미인과 농부는 연옥을 거쳐 천국에,
왕은 연옥행이었으나 지혜가 구해주어 바로 천국행을,
부자는 지옥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 고통과 기쁨도 누리지 않은 사생아는 요람 속에 살게 된다.
뜨악한 건, 이것이 '영원'한 것이라는 거다.

박양은 시작 전 극이 어렵다고 서울까지 올라와 졸까봐 걱정했는데
꽤나 복잡한 표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나는, 음.
나는 유신론자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논하며 결국 신에게 종속될 수 밖에 없는 결정론적 사고가 맘에 들지 않는다.
(뭐 당시 깔데론이라고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만큼 치열하고, 재미있게, 후회없이 살고 있지 않는가.
뭐 좀 걱정되는 건, 죽어서도 시험에 들어야 하고, 영원한 삶이 있다는 건데,
힌두교의 윤회에 의하면 인간은 최고의 경지이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미 쌓을만큼 덕을 쌓아 인간이 된거니까.
내세도 없고, 윤회도 없는 딱 한번의 생이면 난 참 족한데.

길거리에서 파는 봉지 칵테일에 빨대를 꽂아 쪽쪽대며
대학로 거리를 흐느적 거리던 우리는
연극이 끝났음에도 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폰을 저주하며
우리의 외로움의 근원이 모두 부덕한 인간관계라고 결론지었다.

외로움.
외로움을 생각하자 문득 몹시 외로워졌다.
어쩌면 나는 이 생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연기하는 배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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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영화를 보게 되는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시험의 공포는 삶이 나를 컨트롤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요일 밤에 무작정 예매를 하고 토요일 아침, 조조를 본다.
이렇게 눈물빼는 신파는 역시 혼자가 좋다.
콧물이 나와도 안 창피하니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도무지 감정은 수습되지 않는다.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봤더라면
아마 엉엉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모자도 뒤집어쓰지 않고 간 게 아쉬울만큼
퉁퉁 부은 얼굴로 토요일 아침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노라니
이질적인 감정이 몰려와
차라리 이대로 소리내어 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나리오 때문인지
배우들의 감정실린 연기 때문인지
아님 그 때의 내 기분이 그랬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치미는 감정을 수습하는데 반나절이나 쏟아야 했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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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영화를 보게 되는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시험의 공포는 삶이 나를 컨트롤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요일 밤에 무작정 예매를 하고 토요일 아침, 조조를 본다.
이렇게 눈물빼는 신파는 역시 혼자가 좋다.
콧물이 나와도 안 창피하니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도무지 감정은 수습되지 않는다.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봤더라면
아마 엉엉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모자도 뒤집어쓰지 않고 간 게 아쉬울만큼
퉁퉁 부은 얼굴로 토요일 아침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노라니
이질적인 감정이 몰려와
차라리 이대로 소리내어 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나리오 때문인지
배우들의 감정실린 연기 때문인지
아님 그 때의 내 기분이 그랬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치미는 감정을 수습하는데 반나절이나 쏟아야 했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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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틀을 깨지 못했다.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평범해서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
분명 내 안에도 있을진대
나는 찾지 못하는 그 무엇.
언젠가 이와 유사한 글을 쓴 적이 있을게다. 

미묘하게
바이러스와 드라큘라,
살인과 자살을 잇는 스토리.
게다가 금기를 깬 노출까지. 

죄책감 같은 건 사람이나 느끼는 것이다.
여우가 닭 잡아먹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또는 신의 섭리대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흡혈귀가 사람 피를 마시는 건
그리고 그 피를 갈구하는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도 소고기 미듐으로 시켜먹지 않는가.
또다시 푸코가 떠올랐다.

섹스를 하면서 쾌락보단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건
아마 구석기 시대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좋은 것이고, 종족보존까지 되니
그 만큼 이로운 것도 없었을게다. 

그런데 웃긴 건,
쾌락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번역에 있어 일제 흔적이라는 쾌락이란 단어는
영어로 pleasure. 그저 무한한 즐거움인 것이다. 

매일밤, 지긋지긋한 일상이 싫어
굳은살이 돋도록 맨발로 미친듯 뛰어다니는 태주도,
신분이 신부라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을
가혹한 매로 다스리는 상현도,
그 안에 연민을 내포한 하나의 인간으로
햇빛 속에서 사라진다.
 
어쩌면 그것만이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결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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