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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이 시대의 석학,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이자 동료 학자 사이에서 즉각적인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the Guardian)"이라는'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이 올해 자신의 새로운 저작에서 말했듯이, 세계는 지금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다.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불과 10여 년 남짓, 흔히 말하는 '양극화'는 확실히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번 세기에 과연 양극화가 인류에게 어떤 역사를 가져올지 아직 불투명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한 듯싶다. 소위 말하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양극화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이는 그 어떤 사회 문제도 앞으로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학자들을 비롯해서 전세계 수많은 언론들이 양극화에 주목하고 있으며, 다양한 국제기구들도 이와 관련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그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얼마나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잠깐 얘기를 들어보고 넘어가자.
"세계 인구 가운데 가장 빈곤한 10퍼센트의 사람들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다. 가장 부유한 1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을 겪어본 일이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자녀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상위 10퍼센트는 자녀들이 이른바 '엇비슷한 친구들'이나 '더 나은 친구들'과만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최하위 10퍼센트는 거의 언제나 사회보장도 없고 실업수당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반면, 최상위 10퍼센트는 그런 수당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도시에서 날품팔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농촌에 사는 농부들이다. 그러나 상위 10퍼센트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거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이 아니라 봉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인류지리학자 Daniel Dorling <Injustice(한국판: 불의란 무엇인가, 2012)>
양극화, 우리 시대의 화두
이제 이 세상의 불평등은 단순히 하나의 견해나 이론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하는 일종의 '사실'인 셈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절대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고, 부자들을 비판하기 쉬운 좌파와 부자들을 옹호하기 쉬운 우파 외에 다양한 관점에서 양극화를 바라보는 여러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이자 2013년 국제 문제를 심도 깊게 다뤄 대중의 이해에 기여한 세계 최고의 논픽션에 수여하는 [라이오넬 겔버]상 수상작인 <플루토크라트(Plutocrats, 2012)>다.
이 책은 [워싱턴 포스트], [이코노미스트], [뉴요커], [애틀란틱] 등의 유력 언론에 기사를 기고해 왔으며, [파이낸셜 타임스]의 부편집장을 지냈고, [톰슨 로이터스]의 편집장을 맡았던 캐나다 언론인 '크리스티아 프릴랜드(Chrystia Freeland, 1968~ )'가 쓴 것이다(최근 행보를 살펴보니, 2013년 11월에 캐나다 '자유당' 멤버로 의회에 진출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Plutocrats>라는 책의 주된 입장(특징)을 일단 좀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플루토크라트'는 그리스어로 부를 의미하는 'pluto'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최고 부유층'을 뜻한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이고, 정치적으로도 중도적인 'Liberal'이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유명 언론인으로서 '글로벌 슈퍼 리치'들을 오랫동안 취재해온 사람이고 다양한 언론에 기사를 기고하면서 고위 임원을 거쳤다는 걸 볼 때, 특별히 어느 한쪽으로 확고한 이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정치부 기자가 정치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중시하는 것처럼, 이 저자도 슈퍼 엘리트들과의 관계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분명한 비판이나 옹호보다는 플루토크라트 전문가로서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그들의 정체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으며, 아마도 언론인으로서의 '중립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플루토크라트,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고 <플루토크라트>가 무미건조한 사실의 나열이나 일반적인 내용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어쨌든 유능한 저널리스트이고, 최대한 직접적인 가치 판단은 피하면서도 역사와 문화 · 산업 혁신과 사회 개혁의 측면에서 거시적으로 무척 충실하게 사태를 총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굳이 예단할 이유 없이 이 책을 정독하면서 플루토크라트라는 존재 자체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이들에 관해서 전혀 몰랐던 사람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흥미롭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게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선 '글로벌 슈퍼 리치'라는 인간들이 도대체 어떤 이들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난 다음에, 자신의 철학에 따라 좌파든 우파든 마음이 가는 비평가의 글을 읽고 판단해도 별로 늦지 않다. 어차피 현재 모습의 Plutocrats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이와 관련된 사회 변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테고, 우리의 문제의식은 21세기 내내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사이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다.
물론 플루토크라트라는 사람들이 갑자기 지구상에 출현한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고 할 만한 집단들이 몇 차례에 걸쳐 특정 시대에 존재했었고, 사회문화적으로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현재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인물들 예를 들면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와 에릭 슈미트(구글) 같은 실리콘밸리의 거부들, 또는 예전 소련 지역의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이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과 인도 등의 갑부들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비슷한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과거의 유사 집단들이 가졌던 재산과는 아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요즘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엄청나게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며(이전 세대의 1% 또는 0.1%가 그외 나머지에 비해 작게는 몇 배에서 크게는 몇 십 배에 이르는 자산을 보유했다면, 지금의 1% 또는 0.1%는 작게는 몇 백 배에서 크게는 몇 천 배에 이르는 부를 독점하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같은 '기술 혁신'으로 말미암아 과거 세대의 권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21세기의 글로벌 슈퍼 리치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게 크게 다른 점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Plutocrats에게 국경이나 개별법도 초월할 수 있는 거의 무제한의 가능성을 부여했고, 이제 이들은 전세계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을 계속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됐다]
승자독식사회의 돈과 권력, 지대추구와 인지 포획
이제 세계는 80:20의 사회를 넘어 99:1의 세상이 되었다. 극소수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99%의 자손들과 1%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삶을 시작한다. 양극화로 완전히 나눠진 이들은 애초에 교육의 수준부터 판이하며, 직업 선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학 졸업장도 아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존에 집안이 가지고 있던 인맥과 대학을 통해 보유하게 되는 개인적 인맥이 합쳐지면서 플루토크라트의 인맥은 그외 나머지들의 그것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는 전체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분리된 특정한 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많은 돈을 가진 소수,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돈과 권력까지 가진 극소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독점적 지위를 가진 인간 집단들이 대부분 그렇듯, 플루토크라트도 그 지위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빈번하게 '지대추구(rent seeking, 경제주체들이 기득권을 활용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현상)' 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지대추구의 전형적인 예로 큰 돈을 가진 집단이 권력을 가진 집단에 접근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시장의 법칙을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결과가 바로 독재자 일가와 세습 권력이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신흥 공업국의 권력층 다수는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독점 사업권과 민영화를 통해 갑부가 된 이들 중 일부는 제한된 인재풀을 빌미로 곧장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가 되기도 한다]
지대추구 문제를 지적하면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따로 설명하고 있듯이, 특히 공적인 규제와 감시가 필연적인 금융 분야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인지 포획(cognitive state capture)'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인지 포획이란 '주요 규제 기관에 뇌물을 갖다 바치는 대신, 공공 이익의 편에서 규제하고 감독해야 할 대상인 기득권 집단의 목표와 이해관계·인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정부기관 종사자들을 통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금융 감독부서의 인적 구성 자체를 교육(대학) 또는 출신(기업)이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로 채움으로써 이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공익보다는 사익에 더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다(프랑스에 원전 비율이 높은 원인도 인지 포획으로 설명할 수 있단다).
한국에서도 금융관료와 금융회사 고위직들은 상당수가 대학이나 기업의 인맥으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고, 금융사를 관리·감독하던 관료가 퇴직 후에 금융사로 영입되어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흔히 무슨 '감사'나 '이사' 등으로 옮겨가서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이런 현상은 법조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그놈이 그놈'인 셈인데, 어차피 맨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주변 무리가 다 비슷하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유사하고 원하는 것도 동일하다. 엄연히 공공의 이익과 개별 금융회사의 이익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독부서 공무원의 인지 포획으로 인해 마치 '금융회사에 좋은 건 공익에도 부합'하는 일인냥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품게 되는 것이다.
[2011년 8월 17일 한겨레 보도]
그리고, 한국에서 특별히 더 심각한 문제들
<플루토크라트>에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주로 다루고 있는 글로벌 슈퍼 리치들은 '일하는 부자들'이고, 자수성가한 이들도 많으며, 진짜 의도야 어찌됐건 그래도 각종 기부나 공익재단을 통해 자신들의 부를 어느 정도 품위 있게 활용하려는 생각이 있는 인간들이다. 물론 부자들의 공익재단이나 기부로는 절대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돈과 권력을 다 가진 최고 부유층으로서 최소한의 미덕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세금을 더 올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는 양극화로 불안정해진 사회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비록 플루토크라트 외의 나머지 부류와 자신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고 보지만, 그나마 마지막 인간성을 잃지는 않은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이다(물론 모든 플루토크라트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의 부자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일단 일을 하기 보다는 건물주 등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많으며, 자수성가한 이들보다는 세습 부자가 상대적으로 더 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고, 일부 대기업 외에 기부나 공익재단 활동도 그다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현황 외에 더 이상한 건, 한국에서는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해 전세계에서 다수 출현하고 있는 각 산업의 혁신적 플루토크라트 자체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한 번 우리 사회를 둘러보라. 재벌이나 모피아와 관련이 없고, 기술 혁신을 통해 새로이 글로벌 슈퍼 엘리트로 떠오른 인물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
이건 플루토크라트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상관없이, 유독 한국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전개되는 측면으로서 분명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국가마다 좀 차이가 있겠지만) 진정한 글로벌 슈퍼 리치라면 자신의 전문 직종과 관련된 분야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보통 100억 원 이상을 기준으로 볼 수 있을 테고, 활동 무대가 전세계에 걸쳐 있으며, 사회적으로 큰 인정을 받는 사람인데(가장 쉬운 예로,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들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서 모피아나 재벌을 빼고 나면 도대체 누가 남나? 아마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다른 나라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심각한 양극화를 겪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갑을 문제' 때문이기도 할 테고, 최악의 '재벌 동물원'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정치인이나 행정부 관리들과 산업계 수뇌부의 유착관계 때문이기도 하고, 죄질 나쁜 '세습'에 대한 일반의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한국의 가진자들이 플루토크라트와 같은 최소한의 미덕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다. 한국의 가진자들에 비해 어쩌면 혁신적 플루토크라트는 양반이며, 이념을 차치하고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중립적인 시각을 그대로 믿는다면 기존의 한국 재벌들보다는 차라리 플루토크라트가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단, 한국 재벌들과 비슷한 수준의 나쁜 플루토크라트들도 있다).
물론 플루토크라트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지만, 이들이 사회적 유동성과 접근성에 대한 최후의 약속을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혁신적 플루토크라트가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자수성가한 플루토크라트와 세습 재벌 간에 혈투가 벌어진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념적 논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 아닐까? 아울러, 자기 자신을 좀 돌아보면서 말이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의 비참함에 무관심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에 유감과 분노를 느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보다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더욱 극심하고, 죽음의 슬픔이 더욱 클 것이라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