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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불평등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명백히 '불평등'하다. 그냥 막연히 주관적인 불만족의 차원에서 불평등한 게 아니라, 현재 상황을 실제로 포착하고 수량화하고 측정한 수치들의 결과 자체가 '객관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다. 이미 전세계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축적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새로운 증거들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다양한 국제기구들이 전세계의 전문가를 동원해서 해마다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각종 통계 자료의 수치로도 객관적 불평등은 증명되고, 이러한 증거들은 단 10분 만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무수히 찾아낼 수 있다.

 

이제 이 세상의 불평등은 단순히 하나의 견해나 이론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하는 일종의 '사실'인 셈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나쁜 소식들이 날마다 줄을 잇고 있으며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불평등은 5년 여 전의 전세계적인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고 빈자들은 더 가난해졌다.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전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 나가고 있는데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이것이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학자적 양심을 걸고 모두에게 던지는 처절한 질문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은이) | 안규남 (옮긴이) | 동녘 | 2013-08-30
원제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 (2013년)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소수의 부유함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가?)>은 2010년에 '지금 유럽의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시대의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의 2013년작이다. 한국어판 제목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인데 불과 몇 달 만에 곧바로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걸 보면, 물론 책 자체가 얇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출판사가 보기에도 2013년의 한국 사회에 이것이 무척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을까 싶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사회는 '양극화'가 극심하고, 또 올해에는 흔히 말하는 '갑을 문제'에도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주목을 했으니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불평등의 심화는 사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전세계 인구 중 겨우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을 정도로, 이것은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매우 심각한 화두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질문이 한국인들에게 유독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최근 연이은 두 번의 정치적 선택 이후 한국에서 현재 급격한 소득 불균형과 중산층 붕괴가 발생하고 있으며 향후에도 최소한 4년 이상은 이런 흐름이 지속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다.

 

[2012년 1월 10일 경향신문(상), 2012년 7월 23일 문화일보(중), 2013년 8월 20일 한겨레(하)]

우리는 오늘날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
 
아무튼 불평등은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적 현상인데,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새 책에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과연 우리는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먼저 정리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몇 가지 수치만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 헬싱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세계 인구 중에서 최상위 1%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된다.

- 2011년에 미국의 억만장자들의 수는 1210명으로 당시까지 역사상 최고를 기록했으며, 2007년에 3조 5000억 달러였던 그들의 전체 부는 2010년에는 4조 5000억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 약 30년 동안 하위 50% 미국인들의 평균 소득은 6퍼센트 증가한 반면, 상위 1%의 소득은 229퍼센트 증가했다.

- 1990년에는 영국 내 200대 부자의 목록에 들어가려면 재산이 5000만 파운드(한화 약 865억 원)정도 되어야 했는데, 2008년에는 이보다 무려 9배나 늘어난 4억 3000만 파운드(한화 약 7443억 원)로 급증했다.

- 전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되고, 전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은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인구 가운데 가장 빈곤한 10퍼센트의 사람들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다. 가장 부유한 1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굶주림을 겪어본 일이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자녀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최상위 10퍼센트는 자녀들이 이른바 '엇비슷한 친구들'이나 '더 나은 친구들'과만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최하위 10퍼센트는 거의 언제나 사회보장도 없고 실업수당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반면, 최상위 10퍼센트는 그런 수당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최하위 10퍼센트는 도시에서 날품팔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농촌에 사는 농부들이다. 그러나 상위 10퍼센트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거부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이 아니라 봉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인류지리학자 Daniel Dorling <Injustice(한국판: 불의란 무엇인가, 2012)>,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재인용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으며 아직도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동 노동·성 착취·강제 결혼 등 현대판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데, 전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지구상의 전체 인구 70억 명 중에 고작 20명의 재산이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전 이십 년 동안, 대부분의 OECD 국가들에서는 상위 10%의 실질 가구소득이 최하위 10%의 실질 가구소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정의롭지 못하며, 또 얼마나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짓인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런 불평등을 감수하는 것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의 선택, 우리의 생활방식, 우리의 삶의 궤적을 합작하는 자율적인 요소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운명'이고 나머지 하나는 '인격'이다. 운명은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를 결정하고, 인격은 그 범위 내에서 우리의 선택을 결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구조화된' 사회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구조화는 바로 확률의 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어떤 선택들의 확률은 훨씬 높이고, 어떤 선택들의 확률은 훨씬 낮추는 식으로 '보상'과 '처벌'의 배치를 재조정한다). 사회적 비용들은 개인의 저항을 매우 힘들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는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다."

 

다들 알다시피, 원래 운명은 우리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종류의 상황으로서 태어난 곳이나 부모의 사회적 위치, 태어난 시기처럼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뜻한다. 방금 운명이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를 결정한다고 말했는데, 예를 들어 핀란드에서 태어난 아기와 짐바브웨에서 태어난 아기는 운명이 다르고 그래서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 또한 다르다. 그냥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이 다르다.
[핀란드는 세계 최고의 교육 선진국이고, 짐바브웨는 세계 최빈국이다. 핀란드 아기는 전혀 생존의 위협 없이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짐바브웨 아기는 교육은 고사하고 아예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조차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우리가 흔히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선택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그 선택 행위 자체의 확률마저 가진자들이 만든 사회가 조작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비용이 큰 선택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낮은 건 당연하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현실적으로'라는 표현 역시 사회의 구조화가 반영된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반해 행동하기가 극히 어렵다. 결국, 현실적인 선택지들의 범위뿐만 아니라 선택지들이 선택될 확률들의 분포 또한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영역에 속하는 셈이다.

[어떤 아이가 핀란드에서 태어나거나 또는 짐바브웨에서 태어나는 것은 본인의 노력 여하와 전혀 관계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구조화된 사회의 확률 조작으로 인해, 절대 다수의 핀란드 아이는 교육을 선택하게 되고 짐바브웨 아이는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며, 자연스러운 '운명'이다]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이자 동료 학자 사이에서 즉각적인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the Guardian)"이라는 Zygmunt Bauman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들여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불평등의 기반이 되는 '거짓' 전제들에 대한 반박이다. 다만, 불평등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역시 사회학자다. 단순히 경제학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닌, 사회학적으로 쟁점을 정리하고 종합 분석하여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가운데 이 책에서 면밀히 검토"한 네 가지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1. 경제성장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3.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4. 경쟁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실'이 되어버린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어떤 식으로건 회피하지 않으며, 숙고나 의심·확인 없이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진 네 개의 쟁점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아울러 가진자들이 경제적·사회적 조작을 통해 정치적으로 일반 대중의 믿음으로 만들고자 하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와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사회의 상층에 축적된 부는 다른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기 아이들의 미래가 더 안전하고 낙관적이라고 느끼게 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하는 '낙수효과'를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낙수효과 역시 새빨간 거짓말인 셈이다. 그런데도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지고,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경악스러운 일은, 불평등의 직접적 피해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건 소위 말하는 교육과 훈련을 통한 '수용'이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세뇌'일 수 있는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는 우리들 각자의 철저한 '사유'를 바라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읽으며 가슴 깊이 반성한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불평등에 관한 "이상과 현실,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을 논하며 끝을 맺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과연 이 사이의 간극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신작을 마무리짓는다. 이 책은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에 한 명인 저자의 '정신적 모델'과 '현실에 대한 말의 영향력'을 논하고 있으며, 결국 맹목적인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바람에 따라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현실적'이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옮긴이가 말하듯이, 저자는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도 않고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그리고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자유로울 운명을 타고 난 인간이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하나 이상의 길이 놓여 있을 것이며, 위에서 말했듯이 '선택'하는 동물의 자율적인 요소는 '운명'과 '인격'이다. 비록 이 세계에서 운명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고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격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바라기로는 철저하게 사유하는) 바로 그 인격을 통해 선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는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격을 함양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격만으로 이 세상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기부'로는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기존 사회의 '구조화'와 '세뇌'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불평등한 사회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보며 온갖 이야기를 하고 온갖 것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 불평등을 보며 음울하고 참혹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람들,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들, 포기하지 않고 거듭해서 더욱 더 열심히 다른 삶의 방식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정말 중요하다. 이들이 세뇌와 구조화를 거부하고, 철저한 사유를 하며 운명보다는 인격으로 선택을 하고,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각자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 이를 테면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 1917~2013)이나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람(온갖 이야기를 하는 사람), 또 끊임없이 <분노하라(Indignez Vous!, 2010)>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와 같은 책을 읽는 사람(온갖 것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 바로 당신과 나.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감탄을 표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은 경명하거나 무시하는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우리의 도덕 감정을 타락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이자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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