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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 분단의 나라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김성경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평점 :


역사 소설 같기도, 문화 기술지 같기도, 사회학 논문 같기도 한 이 책은 작가가 만난 수많은 북조선 여성들의 목소리과 그들은 만나며 변화한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생생히 담고 있다. 북조선 여성들이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살아남은 경험담을 기반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전쟁과 분단을 마주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 책에 관심이 생긴 것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잇는 가장 한국적인 다큐 에세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말 그대로 충격적인 책이었기에 그 한국 버전이라니, 궁금증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단순히 ‘그 책의 한국 버전’일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얼마나 납작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이 책은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그를 둘러싼 국제 관계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을 그려냄으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온전한 길을 개척해 낸다. 말 그대로 살아남은 여자들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과 정말 잘 어울리면서 캐치하기까지 한 멋진 제목이다.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1부 ‘북조선의 살아남은 여자들’에서는 북한의 선전 및 각종 매체에 등장한 실제 북한 여성들의 삶과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북한 여성의 삶을 픽션으로 그려낸다. 프랑스와 영국 같은 세계사보다 오히려 북한의 근현대사에 더 무관심한 남한의 일반 대중을 고려했을 때 이와 같은 서술 방식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전후 북한의 상황과 천리마 운동, 시장화, 고난의 행군 등과 굵직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시대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2부 ‘경계에서 만난 여자들’은 작가가 연구를 진행하며 만난 각 지역의 여성들의 모습을 담았다. 연길 접경 지역의 조선족과 북조선 사람들의 관계, 가족을 위해 중국 각지로 넘어와 일을 하며 북조선으로 송금하는 어머니들, 그리고 중간자적 위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일본의 조선적 자이니찌들까지. 이 장에서는 작가가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담아내며, 그들을 만나며 작가가 느낀 바도 생생히 전해진다.
마지막 3부 ‘분단, 북조선 여자들, 그리고 나’에서는 해당 연구를 진행하며 작가가 느낀 바를 솔직히 풀어낸다. 이 부분을 읽으며 앞에 나열된 각 여성들의 서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또 그들을 만나는 모든 순간의 경험이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를 생각해보고 정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2부의 접경 지역 여성들 이야기가 깊이 와닿는다. 나는 10살부터 19살까지 중국 북경에서 살았는데, 종종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지인과 평양 음식을 파는 식당에 다녀왔는데 식당 종업원이 모두 북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도 했었고, 한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북한 사람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는 택시 기사도 있었다. 어머니는 건너건너 알게 된 북한 사람과 인사를 한 적도 있었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다녔던 한국학교를 치외법권 지역으로 오해하여 담을 넘어 들어온 탈북민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북한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한국이었다면 이조차도 상상하기 힘든 경험들이기에 그렇게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기억 속 파편으로 남아 있는 중국의 북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글을 읽을 기회는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에 마주치게 되어 마음이 복잡했다. 중국까지 나와서 돈을 벌 수 있다면 북한에서도 잘 사는 상류층이겠거니, 생각하고 부모님과 이야기한 적도 있는 나로서는 그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 또 어떤 아픔들이 있었는지 직접 듣는 것이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어떤 삶의 굴곡을 거쳐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또 중국에서 북조선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읽으며 어린 시절의 편견과 무관심을 한편으로는 반성하게 되었다.
또한 3장에서 연구자로서 자신이 갖고 있던 한계와 개인적인 콤플렉스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연구 과정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작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사실 작가가 이야기한 선입견과 고정관념, 무관심 등은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읽으면서 더욱 공감이 갔고, 작가가 들려주는 목소리와 새로운 시각을 더욱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당사자성, 위치성에 대한 고민을 맞닥뜨리게 된다. 여자가 아니라면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없는가? 성소수자가 아닌 이가 성소수자의 편에 서서 함께 싸울 수 없는가? 이 책의 작가가 제시한 해결책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인정하며 경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소수자에 대한 담론에 뛰어들기 전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출판사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받아보았을 때, 이번 서평은 더 꼼꼼히 쓸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인덱스를 붙여 가며 읽었더니 책이 아주 알록달록해졌다. 마음에 와닿은 문장을 모으다 보니 밑줄 긋기가 너무 많아진 느낌이지만,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해 본다. 좋은 책으로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김성경 작가님과 창비 출판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북조선에 대한 적대감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과 미래를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북조선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남한사회의 역사적 중층성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거울상이라는 것, 그들의 고단한 삶의 경험과 의식에 남한 사람들도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 P9
남한사회는 북조선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다. ‘북조선’이라는 국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들의 행위주체성의 다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단을 가로질러 이주하면서 탈분단적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코즈모폴리턴적 주체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 P10
아무쪼록 분단 같은 것은 이제 별 의미 없다고, 북조선은 우리와 별 상관 없는 타자라고 외치는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이 그녀들의 이야기에 좀더 귀기울였으면 한다. 단순히 그들의 삶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들의 전쟁과 같은 일상을 통해서 여전히 분단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한사회를 한번쯤 되짚어보는 기회로 삼도록 하기 위함이다. - P15
사실 난 ‘인간개조의 선구자’라는 칭송이 어색했어. 길건실이라는 이름이 어느날 갑자기 길확실로 바뀐 것도 어리둥절했단다. … 내가 열심히 일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혁신을 이뤄낸 것도 아니었거든. 작업반을 잘 이끌어야겠다는 다짐이나 의무감은 분명히 있었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투철한 사명감으로 나를 희생하면서 작업반장 노릇을 한 것은 아니었어. - P47
아무리 천리마의 정신으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멈춘 공장은 무슨 수로 돌리겠니. 그나마 우리 공장이야 워낙 중요한 곳이니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만 지방 공장들을 유지하려고 천리마 정신을 운운하는 것이 안타깝기까지 해. 결국 국가의 실패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니 말이다. - P51
천리마시대를 대표하는 노동영웅인 길확실은 지금까지도 북조선에서 ‘영웅’으로 해석된다. … 그만큼 길확실이라는 ‘대중영웅’은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은 시대까지 미디어와 문학예술을 통해 지속적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이며, 북조선에서는 그녀의 삶을 통해서 젊은 여성 노동자의 희생과 노동자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개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 P54
만자가 부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유는 자아실현과 관련이 있었다. 직장생활을 꾸준히 하지 못했던 만자는 마음속 깊은 곳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이다. - P63
고난의 행군 이후에 본격화된 시장화 과정에서 주요 행위자는 여성이었다. 특히 결혼한 여성들은 당장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에 내몰리게 되었다. 북조선 여성들이 시장에서 분투한 이야기는 그들과의 심층면접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 P85
수련이 배치된 곳은 중국 톈진의 북조선 식당이었다.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으로 이곳에 ‘실습’ 나온 학급 동무들도 12명이 넘었다. … 일은 고됐지만 재미도 있었다. 손님으로 식당을 찾은 중국인과 남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수련은 무엇보다 좋았다. - P102
중국에서의 삶이 만족스럽다. 겉으로는 외화벌이를 해서 북조선 당국에 기여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속내를 조금만 깊숙이 살펴보면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방식이었다. 수련은 중국과 북조선을 드나들면서 살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일상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 P108
연선 지역의 조선족에게는 중국, 북조선과 같은 국가보다 강 건너 이웃마을이 훨씬 더 가까웠던 것이다. - P124
무엇보다 조선족 청년들의 마음속 깊은 곳의 혼란이 걱정스러웠다. 중국의 국가 정체성과 조선족이라는 민족 정체성 사이에서의 혼란도 그러하고, 이주자의 가족으로서 연길과 서울을 동시에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P128
또한 나는 중국에서 결코 주눅들지 않았던 순영 할머니를 보면서 잠시 안도했던 것 같다. 삶의 고단함을 힘없이 증언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아 뭐든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희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아무리 고단한 상황이나 혹독한 운명 앞에서도 나름의 행위주체성을 발휘하려는 여성들의 힘을 직접 목격하였다. - P153
원래 폭력은 가장 약한 이들에게 더 가혹한 법이겠지만, 자식을 부양하러 중국으로 넘어온 북조선 여성이 마주한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국경을 넘은 수많은 북조선의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이러한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P166
이렇듯 조선적 자이니찌 커뮤니티라는 것이 정치적 집단 정체성이나 국적을 뜻하는 것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이상을 공유하는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날 밤 선술집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지친 일상을 공유하며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는 모습에서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 P190
나에게 분단 문제는 어쩌면 현지조사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내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분단 문제를 ‘직업’으로 접근했지만 그것이 나와 관련되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 P210
나 또한 북조선에 대한 기성세대의 적대감에 이유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게 되었다. … 몸에 새겨진 부정적 감각이 시간의 풍파를 겪어 완고해진 것을 두고 노년층의 고집으로 단순히 매도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 P217
내가 ‘위치성’(position)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시점이 이때쯤이었다. 나의 인식의 위치는 어디이며 그것의 구조적 한계와 가능성은 무엇인가? 그로 인해 내가 감각하고 문제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엇일까? 중산층 연구자는 노동자나 하층민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질문할 수 없는 것인가? 난민이나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구는 당사자만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사회 불평등이나 권력의 폭력성에 천착한 사회학 연구자는 피지배층이라는 실존적 위치에 놓인 이들이어야 하는가? - P225
이렇듯 나의 북조선 출신자 연구는 단순히 그들의 삶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연구자인 내가 그들을 만나면서 마주하는 심적 요동을 성찰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질적 연구의 과정이란 연구자에서 연구 참여자로의 일방향이 아니라 두 주체가 상호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남북 출신자가 연구를 통해 접촉하고 교류한다는 것은 분단체제 내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주체들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상호 변화 가능성을 가늠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 P238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더 많은 이들이 함꼐했으면 한다. 그래서 낯선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좁디좁은 각자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한명이라도 더 알아차리기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발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기를. - P240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강건한 구조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만들어낸 북조선 여성들의 분투기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철옹성 같아 보이는 권력과 이데올로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해방적 실천을 통해서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것을 북조선 여성들이라는 존재가 증명하고 있다. 국경이 체제 경쟁과 같은 견고한 틀을 소위 가장 약하다는 여성, 그것도 자본주의적 기준에서는 가장 가난한 북조선 여성들이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시사하는지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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