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비키니 논쟁](대충 이렇게 부르자. 머리 아프니까]이 점입가경이다. 우리 모두는 이 논쟁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모두 궁금해 하고 있는 것 같다. 시쳇말로 끝을 보고자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나꼼수> 비키니 논쟁]이라는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며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묻지 말자.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소위 여성인권을 대리표상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이나 그밖에 <나꼼수>를 비난, 비판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것처럼 "사과는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 아니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이번 사태를 바라보기 위한 전제들의 설정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이 전제들은 우리가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주의)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Ⅰ. 이번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세 가지 고리들[기독교 문제, 지역차별, 성차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리들에 걸리면 발생하는 사태와 관련해서 어떤 주체들일지라도 결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Ⅱ. 그런 만큼 이번 사태도 아마 어떤 결정 (불)가능성의 영역 안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

 

Ⅲ. 사건과 관련되는 주체들은 어떠한 관계성에 놓이게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방법은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들 각자가 어떤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 [<나꼼수> 비키니 논쟁]과 관련해서 사과는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에둘러가지 말자. 소위 페미니스트를 대리표상한다는 일부 여성들이나 그밖에 <나꼼수>를 비난, 비판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것은 단 하나다.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사과의 주체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사과의 대상은 누구인가? 사과를 하는 행위가 합리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의 관계성이 성립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건 <합리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위 여성인권을 대리표상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이나 그밖에 <나꼼수>를 비난,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과하는 행위> 그 자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과를 받는 사람의 존재의 명확성이다. <나꼼수>가 유령에게 사과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말 누구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가? 비키니 응원의 당사자인 아가씨? 삼국카페 회원들? 숙대 총학생회? 공지영? 조중동?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마초들?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고매하다고 자위하는 순혈주의 진보 및 좌파 지식인들/운동가들? 이땅의 모든 여성들? 꼴통 수구 보수파들? 정말 그럴리 없겠지만 가까? 안타깝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은 철저히 분열적이다. 이게 <나꼼수>의 전적인 잘못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을 극단으로 치닫게 할 뿐이다. 즉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이 사태의 본질과 교훈은 망각된 채 사라져버린다. 지금 이 논쟁의 역설적 귀결은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나꼼수>의 멤버이지만, F4 중 이 사건과 관련해서 자신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정봉주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 <폭력의 증거>가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생산하는 정치적 효과를 직접적으로 표상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번 사건에서 어떤 부재하는 유령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고 그것을 갈기갈기 찢기 위해 거룩한 신성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폭력의 증거]

 

 

3. 누가 누구의 욕망을 대리표상하는가?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어떤 부재하는 유령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고 그것을 갈기갈기 찢기 위해 거룩한 신성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믿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이번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욕망하는 주체들 간의 욕망이 상충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게 상충하는 욕망은 어떤 대리자들에 의해서 결코 대리표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봉주를 제외한 <나꼼수>의 김어준, 주진우, 김용민은 2월 4일 열린 <시사인 2012콘서트>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그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나꼼수>뿐 아니라 그간의 삶에서도 여성에 대해 취한 스탠스를 포괄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우리는 <한국일보>에 보도된 내용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콘서트에 직접 참여한 사람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비키니>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졌던 <코피>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스스로 해명한다. 물론 그들의 행위와 관련된 해명의 촛점은 물론 가카라는 대타자에 대한 욕망의 역동일시(화)에 맞추어져 있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그들은 <진정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응은 나꼼수 측의 사과와 관련하여 두 가지로 이끌려 나올 수 있다. 한편으로, 그들의 진정성을 믿고자 하는 반응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꼼수>의 사과를 끝까지 받아내고자 압박하고자 하는 반응이 있을 것이다.

 

 

[시사인 2012콘서트]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 두 가지 반응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1) 결국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을 극단으로 치달아 어떤 아포리아적 상황에 이를 것이다.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말이다. 2)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은 이 사태와 관련될 수 잇는 어떤 주체도 가능적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한 주체가 다른 주체의 욕망을 대리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삼국카페가 모든 여성주체들의 욕망을 <여성인권>이라는 언표 아래 동일성의 이름으로 묶어둘 수 없다. 이에 대한 사례는 82COOK 여성 회원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통해서 증명된다. 그러므로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이 돋보이는 현재적 시점에서 <나꼼수>의 사과/사과하지 않음은 어떤 동전 던지기의 상황에 놓여있다. 앞면과 뒷면에 따라서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나꼼수>의 사과/사과하지 않음은 어떤 한 집단 혹은 몇몇의 주체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집단 혹은 몇몇의 주체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즉 그들의 사과하는 행위의 선택은 모두를 위한 선택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위하지 않는 선택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이라는 무서운 진리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82COOK]

 

 

4.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 누구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이다. 이를 정당화하는 낙인은 바로 "<나꼼수>는 <마초>다"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 만큼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표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나꼼수>가 진정 <마초>인 것과 아닌 것과는 전혀 상관 없다. <마초>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인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들이 공명하는 공통의 기표일 뿐이다. 이 기표 아래 좌파/진보 지식인, 운동가뿐 아니라 여성인권주의자, 심지어 조중동 같은 수구 꼴통들의 신성동맹이 이루어진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초 아닌가? 마초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을 둘러싼 생물학적 차이의 단순성이 결코 아니다. 차라리 마초의 진정한 의미는 여성/남성과는 상관 없이 어떤 젠더적 주체들도 권력관계 안에서 폭력(성)의 주체로 생산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누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답은 매우 간단하다. 즉 "<나꼼수>는 <마초>다"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 좌파/진보 지식인, 운동가뿐 아니라 여성인권주의자, 심지어 조중동)과 그 역의 주체들이 "나는 과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자인가?"라고 묻고, 그에 대한 긍정적 답을 얻으면 된다. 이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기를 노력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이 사태와 관련해서 <나꼼수>를 단순히 도덕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관점으로 낙인찍는 자다. 이와 관련해서는 심지어 <나꼼수> 자신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수구든, 보수든, 좌파든, 진보든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과 국면들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을 극단으로 치달아 어떤 아포리아적 상황에 이른 현재의 시점에서 <나꼼수> 로부터 사과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삼국카페가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분명 이러한 맥락에서일 게다.

 

이런 상황을 두고서 진보의 분열이니 갈등이니 하는 수구적이고 꼰대 같은 해석은 그만두자. 다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 각자의 길을 가자. 적어도 우리 좌파/진보의 영역에서만 한정하여 서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나꼼수>를 지양하자. 즉 우리 좌파/진보의 영역에서 긍정적 방식으로 <나꼼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극복하자. 더 분명히 말해 우리 좌파/진보의 영역에서 <나꼼수>가 생산한 정치적 가치들을 낡은 가치들로 전락시킬 새로운 정치적 가치들을 생산하자. <나꼼수>가 보여준 상상력을 뛰어넘자. 그것이 사과를 받아내는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만 진보/좌파가 그토록 비판하는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심지어 <나꼼수>는 극복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노무현조차도 제대로 지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부정하지 말자. 그런 상황에서 <나꼼수>를 지양하자는 것은 엄청나게 지난한 일일 것이다. 쉽게 비판하지만 말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잔 말이다.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하자. <나꼼수>가 생산한 새로운 가치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다. 그 가치를 제대로 지양할 진보/좌파만이 아포리아적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는 정말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게 된다면 매우 고귀하며, 진정 우리 좌파가 원하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땐 그런 세상에 대한 열망은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보다 새누리당이 더한 것 같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라도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뿐 아니라 진보/좌파는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조차도 없다. 그들이 진정 <가까>[이는 단순히 MB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나꼼수>가 폭로했듯이, MB라는 고유명사의 껍데기를 빌린 이땅의 모든 기득권자들의 집합을 현시하는 일반명상일 뿐이다. 따라서 <가까>에 대한 투쟁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다시 읽히고, 씌어져야 한다.]로 대리표상되는 이 땅의 기득권을 전복하고자 하는 자들인가?

 

 

 

P.S. 이 사건과 관련된 몇 가지 판단 자료들을 첨부한다.

 

 

1. 주요일간지 반응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20206141815953&p=mediatoday

 

 

2. 팬덤 현상/이분법주의 비판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20202155446218&p=mediatoday

 

http://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btn&nil_ch=&rtupcoll=&w=news&m=&f=&lpp=&bw=1261&bh=658&sug=&cluster=y&q=%B3%AA%B2%C4%BC%F6%C1%F6%BD%C4%C0%CE

 

 

3. 진보진영의 도덕주의 프레임 비판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014

 

 

4. 전문가 진단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062115555&code=940705

 

 

5. 비키니 논쟁의 SNS 분석

 

http://nakkomsu.blogspot.com/2012/02/blog-post_8600.html

 



 
 
 

아래와 같이 작동하는 전적으로 추상적인 욕망의 구조들로 이루어진 어떤 공동체/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 A라는 욕망의 구조

 

이 욕망의 구조는 "전체는 나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진리 그 자체다"라는 명제를 전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작동한다. 이러한 욕망의 구조에서는 전체=나의 사적 욕망의 충족=진리라는 동일화 기제가 작동한다. 이 구조의 주권자는

 

 

○ B라는 욕망의 구조

 

 

이 욕망의 구조는 "전체는 나의 사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진리 그 자체다"라는 명제를 전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A라는 욕망의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는 주체들의 욕망을 통해서 작동한다. 하지만 이 욕망의 구조를 지탱하는 주체들은 A라는 욕망의 구조에의 동일화(혹은 A라는 욕망의 구조를 작동시키는 대타자의 욕망에의 동일화)를 거부한다. 차라리 그것은 역동일화라고 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 C라는 욕망의 구조

 

 

이 욕망의 구조는 A라는 욕망의 구조에 대한 역동일화와 B라는 욕망의 구조에 대한 동일화 사이에서 긴장 및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욕망의 구조 속 주체들은 B라는 욕망의 구조에 대한 동일화가 허상임을 깨닫는다. 그건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에서 비롯된다. 물론 동일화에이 욕망의 환상은 C라는 욕망의 구조 속 주체들이 전적으로 생산한 것이다. 하지만 A라는 욕망의 구조에 대한 역동일화에의 끈을 놓지 않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동시적 과정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덧 C라는 욕망의 구조 속 주체들은 A라는 욕망의 구조에의 동일화에 물들어버린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기에서 제시된 욕망의 구조들은 전적으로 추상적이다. 



 
 
 

인륜과 윤리적인 것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니체,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05쪽

<도덕비판이라는 문제설정>이라는 니체의 문제의식은 『도덕의 계보(학)』에서 학문적으로 매우 정교해지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이미 그 단초를 얻을 수 있다.  니체는 위의 인용구에서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니체는 "선하다"와 "악하다"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사람들은 오랜 유전에 의한 본성에 따라 윤리적인 일을 쉽게 그리고 즐겨 행하는 사람을 '선하다'라고 부른다. […] 악하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이성적인 일이든 어리석은 일이든 간에, '윤리적이 아닌'(비윤리적인) 것, 악습을 행하는 것, 관습에 역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니체, 같은 책, 105~106쪽)

니체의 언급처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속한 집단, 무리, 떼를 유지시키고 존속시키기 위해서 <도덕>이라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도덕>은 우리 인간 본성의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속한 집단, 무리, 떼를 유지시키고 존속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규범이나 관습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것>과 <도덕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그런 공동체가 정해놓은 규범이나 관습에 딱 맞게, 즉 적합한 목적에 맞게 행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이지 못한 것>은 구분된다. 물론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권력의지>다. 그래서 선과 악의 문제는 종교적 문제라기 보다는 지극히 사회적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공동체/사회가 정해놓은 규범이나 관습에 포함되는가 아니면 이탈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규범과 관습으로부터 탈주하는 것 그 자체가 악(의) (행위)이 된다. 양떼로부터 벗어난 양의 행위는 악한 것이 된다. 그의 행위는 행위의 본래적 속성이 악했기 때문에 악한 행위가 아니라, 그것이 양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악한 행위가 된다. 이른바 도덕적 행위는 이렇게 구성된다.



 
 
빵가게재습격 2012-02-08 00:22   댓글달기 | URL
동시에, 도덕이란 질서의 내부에 있는 구성원이 '희생자 만들기'에 관여하고 있음을 망각하는 의식이며, 희생자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심적계기기도 하고요. 맥락에서 벗어난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습니다.^^; 날씨 추운데, 건강하시길 빕니다.^^

무화과나무 2012-02-08 00:39   URL
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희생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맥락에서 벗어난 내용이 아닙니다.
윗 부분에 덧붙일 내용이 있었는데 귀찮아서 더 안쓰렵니다...
빵가게재습격님도 건강하세요...
 

요즘 일부 좌파/진보 세력들에 대해서 드는 생각은
그들이 가카를 너무 쉽고 만만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들의 요즘 시나리오는 가카가 레임덕에 빠지고 그러면 쉽게 총선에서 야권이 승리[그 승리하는 최악의 방식은 민주통합당 중심으로 승리하는 방식이다.]하고 야권 연대를 통한 대통령이 후보가 되어서 당선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시팔!"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명박을 철저하게 극복[헤겔을 싫어하지만, 그의 변증법적 용어를 빌리자면, <지양>]하는 것이다.
그게 쉽고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건 노무현 때부터 반복되어온 악습이다.
정말 좌파/진보 세력들이 노무현의 긍정적/부정적 유산을 지양했다면, 이명박과 같은 괴물은 절대 탄생하지 않았다.
지금 이와 똑같은 상황에 우리는 처해 있다.
이명박과 같은 괴물을 지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한 괴물의 탄생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게 박근혜가 되었든 문재인이 되었든, 아니면 누가 되었든 말이다.



 
 
 

이땅의 일부 좌파/진보 지식인들은
잃을 게 너무 많기에 자신을 저 높은 성당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그들에겐 <대중에 대한 선험적 혐오감>이 공유되어 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이 혐오스런 존재임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그들에겐 <도덕적 순결주의에 대한 선험적 맹신>이 공유되어 있다.
그들 스스로 매우 더러운 존재임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그들에겐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에 대한 선험적 정당화>가 공유되어 있다.
그들 스스로 프롤레타리아를 경멸하는 존재임을 부정한 채로 말이다.

 

 

이보다 더 훌륭한 가치 파괴자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은 절대 가치를 창조하는 자가 될 수 없다.

 

오직 몸 속에 가치 파괴의 충동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