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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단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왔고, 지금 우리의 이 자리는 어떤 자리이며, 우리는 누구냐는 문제는 절실한 문제이며 사회과학이라든가 하는 전문 분과 학문에서의 학문 방법론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더구나 외국의 이론을 도입해서 그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이른바 ‘소외’의 절정임에 틀림없다. (p.9)
우리의 근현대 사상사는 전통과 근대의 수많은 사상과 문화가 얽혀 온 역사이기에 더욱 어려운 분야이다. 그렇기에 현대 한국인의 모습은 다면적이고 복잡하다. 사상사의 생명은 해석이며, 이는 결코 쉬운 무공(武功)이 아니다. (중략)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또 알겠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도 인정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대해 최소한의 식견과 철학을 갖추지 못한 국민들은 대중 선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그 정치적 사회적 판단은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체성에 대해 관심이 옅은 사회는 안정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 (pp.18-19 중 발췌)
책머리와 서장의 역할을 하는 1장에서 순식간에 마음을 휘어잡고, 독자에게 부끄러움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발동시킨다면 이는 실로 대단한 능력이다. 최정운 교수의 수업은 솔직히 처음부터 수강생들의 관심을 휘어잡는 수업은 아니었으나, 그가 자신의 수업에서 다루었던 지난 15년간의 연구 내용을 토대로 집필한 ‘현대 한국인의 탄생’ 1부에 해당하는 이 책은 수업보다 더 강렬하게 필자의 마음으로 들어온 것 같다. 3년 전에 필자가 근·현대 한국인의 탄생 과정에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쏟아지는 참고문헌 목록을(수업시간에 언급되는 모든 문학 작품과 더불어 이안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 와 같이 수업의 핵심적인 바탕을 마련해 주는 책들이 포함되어 매우 방대하였다)끙끙거리면서 읽기에는 너무 어렸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노교수는 첫 수업 시간에도 정체성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책에 나온 말과 비슷한 말을 했지만 그 때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강의가 강의로만 남지 않고 잘 정리된 책으로 다시 나온다는 것은 이렇게 ‘다시 한 번 버스를 탈 기회가 생긴’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는 분명 큰 행운일 것이다.
‘한국인은 이러이러하다’는 식의 담론은 우리 사회에 차고도 넘친다. ‘왜 한국인은 ○○○○한가?’라는 질문 몇 개 가지고도 책 한권을 금방 만들어내고, 어떤 자리에 가서도 뜨거운 논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책이나 열띤 논의의 자리는 대부분 몇 가지 정해진 틀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민족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한국 민족을 추켜세우거나 비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한국의 기구한 역사를 지정학적 위치 탓으로 돌리며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한국 민족으로 모자라는 사람들은 ‘동양인’의 특성을 내세우기도 하고 모든 것이 다 유교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낯설지 않게 들어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몇 가지의 큰 줄기로 한국인의 자화상을 그려내기는 ‘물감의 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남기 마련이다. 『한국인의 탄생』은 이런 미련을 해결하기 위해 저자가 답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물론 저자도 모든 물감을 다 갖추어놓고 붓질만을 기다리는 팔레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새로운 시도 속에서 정체성을 규명하는 몇 가지의 확실한 조각이라도 찾고자 하는 시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책의 서두에서 제시된 ‘반지성주의’와 ‘교육만능주의’의 망조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사실상 근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민족주의의 두 가지 조류 즉, ‘저항민족주의’와 ‘개화민족주의’의 영향,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는 분명히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이지만 필자는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어대는 것에 대해 타당한 거부감을 표출할 만큼 ’민족주의자‘의 시각으로 논의를 풀어가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 민족‘ 혹은 한국인이 형성되는 과정을 좀 더 제대로 추적하려면 민족주의 담론을 절대로 비켜갈 수 없음을 알고 그의 기묘한 방법론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기묘한 방법론’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이상할 것도 없다. 문학작품을 토대로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겠다는 것인데, 저자가 ‘사상사의 사료’로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 문학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저자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이 기존의 사고와 사상을 더 정교하게 드러낼지 모르지만,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사상의 구체적 실체로의 구상과 창조는 예술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르네상스는 예술가들이 이룩한 역사였다. 우리 근대사의 경우와 같이 상이하고 이질적인 문화와 문명이 뒤얽혀 있던 세상, 논리적으로 따지는 능력만으로는 현실의 갈피를 찾기 어려웠던 시대 상황에서는 예술적 직관력만이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었을지도 모른다(p.26).
이러한 주장의 설득력은 본문을 읽다 보면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데, 필자의 판단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저자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들의 사회과학적 해석의 과정이 기존의 문학 해석과 동떨어지거나 낯선 부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매우 억지스럽다거나 ‘끼워 맞추는 듯한’ 느낌보다는 간과하였던 부분을 날카롭게 찔러주는 통찰력에 한 표를 주고 싶다. 『이야기의 기원』에서 이론적인 배경에 비해 이를 실제 문학 혹은 예술 작품(물론 ‘이야기’를 담고 있는)에 적용하는 과정이 부실했던 것과는 상반되게 저자의 ‘방법론’은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을 분석할 때나, 이광수나 홍명희의 작품을 분석할 때다 비슷한 정도의 설득력을 가진다. 이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합의, 비판, 보완 및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한계로 남을 것이지만 일단 귀 기울여 볼 만한 이야기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