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끓이는 일본남자 ‘나옥희’

아버지는 日, 아들은 한국에서 라면집 운영
기발한 엽기 블로그로 ‘언니들’ 시선집중
글=김미리기자 블로그
miri@chosun.com
사진=조선영상미디어 허재성기자 블로그
heophoto@chosun.com
입력 : 2006.04.19 14:39 02'

누렇게 뒤덮인 황사로 ‘만사 귀차니즘’이 초절정에 이른 어느 토요일. 강력접착제로 딱 붙여놓은 것 같은 침대를 억지로 떼내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거의 한 달 만에 열어본 미니홈피. 후배 M(여·백수)이 흔적을 남겼다. “나오키씨가 이대 앞에 라면가게 열었어요. 맛있더라구요. 사실 나오키씨가 너무 잘생겨서 정신 못 차린 게 더 컸지만.”

나오키? 뭐지? 그녀와 나의 ‘공동저장구역’엔 없는 단어다. 그런데도 다짜고짜 그렇게 적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미 세간에 알려진 존재? 얼리 어답터는 못 돼도 뒷북은 죽어도 싫은 나, M에게 전화하는 대신 N사이트 지식인을 호출했다.

나오키+이대앞+라면집=? 많지 않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본명 스즈키 나오키. 쌍칠(77)년생 일본 청년. 털보 남동생과 지난달 이대 앞에 라면 가게 ‘아지바코(味籍,www.ajibako.com)’ 오픈. 그리고 손님 열에 아홉은 일본 라면보다 꽃미남 ‘나옥희’(스스로 붙인 애칭)씨의 명성을 듣고 가게를 찾아간다는 사실. ‘찬(讚)나오키가(歌)’가 줄을 잇는다. 하기야 마흔 언저리 언니 S는 홍대 근처에서 라면집을 하는 일본출신 꽃미남 넷에 푹 빠진 적도 있는 걸 뭐. 이른바 홍대 ‘F4’(대만 꽃미남 그룹). S는 F4에 일주일 동안 15만원을 바쳤다.

인터넷에서 건진 대어는 나오키의 블로그(www.naokis.net)였다. 1999년 뉴질랜드 유학시절 안뇽(안녕), 노무 있포요(너무 예뻐요) 등 달랑 5개 문장만 외운 채 공짜 비행기표로 한 엽기발랄 한국 여행기와 4년 전 한국에 정착한 뒤에 겪은 좌충우돌 적응기…. 만화적 상상력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그래픽과 엉뚱함으로 빚은 텍스트의 압박 사이, 철학적 메시지가 떡 하니 고개 내밀고 있다. 3년 전부터 알음알음 알려진 이 ‘나오키 월드’는 확실히 중독성이 강했고, 결국 나오키네 라면집에 전화를 걸었다.

▲ 닮은 듯 안 닮은 듯 "한국의 일본 라면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가오로 이대 앞에 라면집을 연 나오키(왼쪽)와 동생 싱고
인터뷰 섭외를 위한 세 번의 전화. 외출 중이라는 ‘알바생’의 짧은 대답. 네 번째 전화, 드디어 나오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여기서 잠깐. 이후 나오키는 블로그에 내 전화가 장난전화인 줄 알고 없는 척 했다고 고백했다. 이럴 수가!). 가게 문을 닫는 오후 2시30분~4시30분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인터뷰에 동행한 후배 M. 헉,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등장하시다! 물론 나오키를 위한 것. 약속 시간 30분 전 이대앞 작은 골목길 아담하게 자리잡은 나오키네 가게에 들어섰다. 일단 잠복취재. 신분을 밝히지 않고 여느 손님처럼 라면을 시킨다.

블로그에서 만난 ‘엽기 소년’ 나오키는 없었다. 두건을 쓴 짙은 눈썹의 무표정한 일본 청년. 봄바람에 폴폴 날리는 가냘픈 꽃미남은 아니지만, 어딘가 모르게 강한 ‘니뽄필(일본느낌)’을 풍긴다. 가게 안 손님 열 셋 중 남자는 1명밖에 없다. 나머지는 모두 면발과 나오키에 번갈아 시선을 주는 ‘언니들’.

‘죄송합니다. 시오(소금)가 다 떨어졌습니다.’ 메뉴판 옆에 붙은 칠판에 적힌 메모를 보고 옆 테이블 여학생이 까르르 웃는다. “저것 봐. 장사할 의지가 있는 거야? 귀여워. 호호.”

“저, 면접 또 떨어졌거든요. 엄마가 아무래도 안되겠다구 쌍꺼풀 수술하재요. 진짜 할까봐요.” 면발을 후루룩 마시며 쌍꺼풀 타령인 M. 그러나 나오키의 일거수일투족에 꽂힌 나에게 그녀의 고민은 귓바퀴만 맴돌 뿐이다. 6000원짜리 소유라면과 2000원짜리 검은 깨 아이스크림은 대만족. 주인장 감상에 실패하더라도 본전은 너끈히 뽑고 갈만한 맛.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한 뒤 나오키에게 신분을 밝혔다. 약간의 놀람을 기대했던 나, 그의 덤덤한 반응에 도리어 놀랐다. 식당 한 켠에 앉아 본격적인 탐색에 들어갔다. 커다란 눈망울이 그물그물한다. “3시간인가, 4시간인가 잤어요. 면 뽑느라.”

▲ 한글로 쓴 자신의 이름이 너무너무 귀여워 대만족이라는 나오키.호빵맨,키티로도 변신 가능(?)한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오키의 아버지는 가나가와현에서 20년째 ‘미스즈’라는 라면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간장 냄새, 삶은 면발에 둘러싸여 산 ‘라면집 아들’은 한국에서 ‘이거다 싶은’ 라면을 맛볼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의 일본 라면 역사를 바꿔버리겠다”는 당찬 각오로 한국어 한 마디 못하는 동생 ‘싱고’와 함께 작은 라면집을 냈다. ‘자아찾기’라는 명목으로 현실도피중인 남동생은 전직 디스플레이 전문가. 가게 이름(‘맛 상자’라는 뜻)에 걸맞게 상자 테마로 가게를 직접 꾸몄다. 당분간 일손 거들어주려 여동생도 원정 와 있다. 아들 실력이 못내 못미더워 두 번이나 다녀간 아버지. “이만하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이셨다고.

나오키가 한국에 정착한 건 2002년 봄. 월드컵 직전이었다. 뉴질랜드에서 ‘비즈니스 컴퓨팅’을 전공하고 일본에서 외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한국에서도 일본어 강사가 첫 직업이었다. 한국어 학원은 딱 한 달 다녔다는 그의 한국어 실력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 “일본어 교재를 한국어로 하나씩 번역했어요. 학생들 이해 못하면 한국어로 설명해주려고요. 그렇게 몇 번했더니 한글이 절로 익혀졌어요.”

신림동에서 살던 그가 굳이 이대 앞에 라면집을 연 이유는? 블로그에 슬쩍 내비친 것처럼 “이대생이 돼 이대 언니와 오뎅에 간장을 ‘쉐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건 농담이고요, 강남, 종로, 명동 사람 많이 모이는데 가봤는데 너무 비쌌어요. 그래서 이대쪽으로 결정했어요.”

자신의 말대로라면 나오키는 ‘무기력남, 무계획남’이다.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많은 ‘귀차니스트’ 언니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번듯한 라면집까지 냈는데 무계획이라고? “저는 인생의 조그만 점(点)은 보이는데, 선(線)을 못 봐요. 선을 보는 능력까지 있으면 좋겠지만, 그거 안되니 보이는 ‘점’대로 사는 거죠. 이거다 싶으면 이렇게 살고 저거다 싶으면 저렇게 살고. 그러다 보면 ‘선’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오호라, 바로 이것. 나오키의 산만한 블로그 글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나오키표 인생철학’ 아닌가.

‘물론’ 라면집도 평생 할 생각은 없단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베스트’를 하고 있어요. 일본 라면 맛을 많은 사람이 알고 나면 가게 문 닫고 또 다른 일 해야죠. 행복하게, 다른 사람한테 도움되면 그렇게 살고. 어, 이렇게 ‘예쁜’ 이야기는 아닌데….” 머쓱하게 웃는 나오키. ‘점’밖에 못 본다는 이대 앞 ‘나옥희’는 이미 인생의 굵은 ‘선’을 아로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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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4-20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까운데 한 번 가볼까? 흠흠... 근데 매체에 너무 많이 소개되어 어째.. 바글거릴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