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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평점 :
현재를 살으라는 작가의 말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는 그리고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 나를 수단으로 희생하고 있는 지금이 슬프지만,
더욱 슬픈 것은 그렇다고 지금의 현재를 버리고 내가 원하는 데로 살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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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인간을 가두고 있는 담벼락으로 "유일한 것, 완전한 것, 자기 충족적인 것, 그리고 불멸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상정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라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니체는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가 망치로 부수겠다고 선언한 담벼락을 기독교의 신에 한정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신은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구조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는 생각, 혹은 인간의 본성은 결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는 생각도 인간을 체념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담벼락이기 때문이다.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로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 길들이는 담벼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다. - 엥케이리디온
우리 정신은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 번째는 낙타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아무런 반성 없이 일체의 사회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정신이다. 마치 낙타가 주인이 등에 짐을 올리면 아무런 저항 없이 실어 나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사자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낙타와 달리 사자의 등에는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 어떤 짐도 올릴 수가 없다. 짐을 올리려면 사자를 죽여야 할 것이다. 사자의 정신은 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 세 번째는 정신의 마지막 단계, 즉 인간이라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아이의 정신이다. 니체의 아이는 솔직함과 당당함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과거나 미래는 단지 우리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과거란 존재할 수 없고, 기대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의 삶에 집착하고 있다. 그들은 삶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렇지만 죽음은 혼자 걸을 수 밖에 없는 외로운 길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음의 문턱까지만 따라올 뿐 그 다음부터는 오직 나 혼자 가야만 한다. 그래서 죽음은 지독하게 무섭고 두려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험 업계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공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누군가에게 책음을 묻는 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있을 수 없다. 사실 자유 = 책임의 논리는 이미 우리의 일상적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자본주의는 돈을 목적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체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보자는 칸트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인간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돈은 수단의 지위로 전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비극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의 문제에 대해 숙고하도록 만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 메를로 퐁티
유한자인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파괴해야만 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그리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가족들,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타인들을 떠올려보자.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탄생은 태어나지 않음과 태어남이 공존하는 경계를 거쳐야만 하고, 사랑도 사랑하지 않음과 사랑함이 공존하는 경계를 넘어서야만 하고, 죽음도 살아 있음과 살아 있지 않음이 공존하는 경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성의 담화는 사랑에 망설이는 상대방에게 요구한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감수성은 현실이란 모순된 것의 공존이라는 것을 직감한다.이것은 여성이 자신과 자신 아닌 것, 즉 타자의 공존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알려고 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타자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숙고해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잇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산업자본은 기본적으로 시간적 차이, 즉 유행을 만들면서 이윤을 얻는 체계이다. 이 점에서 산업자본은 미리 주어진 공간적 차이를 이용하여 이윤을 얻으려는 상업자본과는 질적으로 다른 논리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한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마주침이라는 것은 능력을 미리 닦아두는 것도 아니고 유세할 내용을 미리 갖추어두는 것도 아니지만 군주의 마음에 우연히 맞게 되기 때문에, 마주침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군주의 마음을 헤아려 유세할 내용을 조절하여 존귀한 지위를 얻었다면 이것은 헤아림이라고 하지, 마주침이라고 하지 않는다.
덕은 무력이나 재력과는 다른 능력이다. 무력이나 재력으로는 몸을 잡아둘 수 있을 뿐, 마음을 얻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렇지만 덕은 마음까지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덕이란 글자는 얻는다는 뜻의 득이란 글자와 마음이란 뜻의 심이란 글자가 합성되어 있다.
결혼을 했든 아이를 낳았든 간에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만큼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을 버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너가 자유로운 결정으로 나를 사랑할 떄까지 말이다. 이런 기다림을 유지한다면, 다시 말해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노동은 수단과 목적인 분리된 것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되어 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는 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고단함으로 충만한 현재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가 두 가지 의미로, 혹은 두 가지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자체로 향유되고 긍정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경우처럼 미래를 위해 소비되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 현재이다. 우리에게는 첫 번째 현재, 즉 긍정적인 현재가 필요하다. 오직 이런 현재로 충만한 삶만이 행복한 삶이기 떄문이다. - 하위징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 몽테뉴 <수상록>
참다운 여행은 배움의 과정이어야 한다. 첫 번째 배움은 여행지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배우는 것이다. 두 번쨰는 여행지에서 삶이 충분히 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떠나온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진정한 여행을 떠난 사람은 자신이 도착한 낯선 곳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