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유리창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강지영 외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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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님들이 참여한 책이라 기대가 됩니다. 한국 장르문학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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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형사들 - 사라진 기와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명섭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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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작가님 책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눈 앞에 그려지듯한 묘사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신간이 나왔네요.
이번 책은 더 재미있겠죠?
표지부터 제 취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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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탐정 유동인 - 더 비기닝 서점 탐정 유동인
김재희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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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잘 생김 뚝뚝...
김재희 작가님 믿고 읽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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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어 - 사법체계에 숨겨진 불평등을 범죄심리학과 신경과학으로 해부하다
애덤 벤포라도 지음, 강혜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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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스에서 화가 머리 끝까지 솟는 사건들을 접하곤 한다. 사회에 결코 나와서는 안될 것만 같은 범죄자들에게 터무니없는 형량이 나온다거나, 뻥튀기 3개를 훔쳤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는 판결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판사들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정의의 여신은 이해 당사자들의 차이를 보지 않기 때문에 눈 가리개를 했다 하는데 그녀의 정의는 전혀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추의 무게는 동일한걸까?

어렸을 때 ‘별나라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도 우리 친구다! 이거 나이 제대로 인증하는구만)에서 보았던 오로라 공주의 마녀 재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떤 별에서 오로라 공주가 마녀로 몰렸더랬다. 오로라 공주가 의심에서 벗어나려면 물 속에서 익사하지 말고 살아야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봤음에도 그것이 말이 안되는 것을 알고 안타까워하며 화를 냈다. 성인이 되고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재판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충격이었다. 현재의 우리는 그것이 비합리적임을 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9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볼까? 우리가 900년 전의 재판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만큼 그들도 충격을 받을까? 그들이 우리 재판에서 편견과 불합리성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직관이 워낙 몸에 배어 있어서 그것이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사건을 판단하고 결과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그 직관은 사실 기껏해야 매우 불완전한 관심 사안 목록을 만들어낼 뿐이다. 최악의 경우 그것은 사건과는 대체로 무관하다. 가령 우리가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있는 익숙한 문제들을 모두 깔끔히 해결한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 제도가 원래 목적대로 정확히 운용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부당한 유죄 판결, 편향된 절차, 짓밟힌 권리, 불평등한 대우라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부정의는 우리 법률 구조 자체에 내재되어 있으며, 매일 매 순간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부정의의 근원은 편협한 경찰관이나 교활한 검사의 사악한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 p.19

수사, 판결, 처벌, 개혁. 이렇게 4부로 구성된 책은 우리가 사법제도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편견과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률회사 변호사로 일하는 저자의 글은 내부고발 보고서를 읽는 것 같다. 법 집행까지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법제도의 불공정한 부분을 볼 수 있다. 경량화된 조직, 시스템이 된 사법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인 판단, 상황이 벌어지는 심리적인 근거들을 설명한다.

“맞아. 상관없어. 상관없는 건 오로지 증거물뿐이야. 증거물은 오버롤 차림의 남자 따윈 없고, 개릿이 범인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어.”

“증거물은 그럴 ‘가능성을 제시할’뿐이죠, 라임. 그걸 증명해 주지는 않아요. 증거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요. 게다가 나한테도 나름대로 증거가 있어요.”

(곤충소년 중에서)

CSI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의 수사도 매우 과학적으로 바뀌었다고 믿는다. 증거들이 용의자를 가리킨다는 말을 듣곤 한다. 사실 그렇지가 않다. 증거들은 거기에 있을 뿐이다. 해석하는 것은 감정적인 인간일 뿐이다.

“사법제도는 우리가 공정했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민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자꾸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도 제가 노력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p.262

사법제도라는 자체가 인간에 대해 부정확한 가정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태생부터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얼핏 보면 그것은 그런대로 괜찮아보인다. 자세히 들여봐야 알 수 있다. 법이 복잡하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은 없어지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문제다. 이 책은 문제점을 인지하고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발짝 그 가능성에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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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
배윤민정 지음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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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칭은 신분을 지칭할까?

왜 형이나 동생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아가 같은 두 여자 사이에서 호칭의 차등이 생기는 걸까? 여자들이 온전한 개인이 아니라 배우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취급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p.27

탈권위적인 시아버지,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시어머니, 제사 안 지내고 집안을 분담하는 가풍까지... 가족이 되기 전에 봤을 때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결혼을 하고나서야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저자의 시어머니와 아들 둘이 함께 있는 ‘박가네’ 단톡방을 통해 집안의 대소사가 하달되었다.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되었음에도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기만 가장 욕을 먹는다. 나만 그런건가?) 가족이기 보다는 집안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그리고 바라본다. 시가의 모든 가족들에겐 ‘님’이라는 글자가 자연스럽게 붙는다. ‘아버님’, ‘어머님’, ‘아주버님’, ‘형님’이 붙지만 시가 식구 중 그 누구도 막내 며느리에겐 ‘님’자를 불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아주버님’, ‘제수씨’, ‘동서’라는 호칭 대신 이름 뒤에 ‘님’을 붙이자고 의견을 내놓았다. 아주버님은 노골적으로 화를 내고 동갑내기 형님은 무시와 침묵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 백일잔치에서 말을 걸었다. “동서, 왔어?”

저자는 불편했다. 호칭이 불편했고, 아랫사람이라는 위치를 강요하는 것이 불편했다. 몇 번의 갈등 끝에 남편의 형 부부에게 사과를 했다. 이렇게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남았다. 이런 호칭과 위계질서는 당연한걸까? 아랫사람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가족호칭 문제를 적은 머그컵 100개를 맞춰 주변에 나눠주며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그 집안에서 암묵적으로 낮은 위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거리를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어 하죠. p.110

사랑하는 사람과 더 오래 함께 하고 싶다는 이유로 결혼이라는 걸 한다. 결혼을 해서 부부라는 이름만 얻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맏아들이거나 막내라는 이유로 내 위치까지 정해진다. 사회에선 막내라는 자리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진급할 기회가 있다. 가족만이 자리를 고정하고 위치를 강요한다. 왜 가족 안에서는 이름이 없어질까? 이름 부를 일이 없으니 형님들 성이 기억 안 날 때도 있다. 내 이름은 아는 지 궁금해진다. 외국에선 있는 이름 선택한 것도 그렇게 열심히 부른다. 우리나라 이름은 좋은 날과 시간까지 맞춰가며 한자 한자 좋은 뜻, 듣기 좋은, 부르기 좋은 이름을 지어준다. 그럼 뭐하는가? 시집에서 난 ‘애미야’, ‘동서’일뿐... (아주버님들은 날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네.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당신은 가족들을 모두 ‘님’이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당신이 ‘님’이라고 불리고 싶다는 건 무례한 일이 되는 걸까?” p.152

작년 추석에 이 책을 처음 읽고 형님들에게 나만 ‘님’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다. 다들 웃으며 “그렇게 ‘님’이 듣고 싶었어?”라는 말을 했다.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차별적인 호칭에 대해 함께 얘기하고 싶었다. 막내며느리라는 자리는 늘 어리다고만 생각한다. 다행이 내가 나이가 가장 어리다는 거다. 만약에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면? 그랬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책에서도 그렇고 내 주변도 비슷하다. 호칭 그까짓꺼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말이다. 다들 그렇게 쓰자고 약속한 것을 함께 쓰는 말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가장’이라는 단어를 ‘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 가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날부터 아니 그날 전부터 난리가 날 것이다. 가장을 뭘로 보냐고... 가장을 똥처럼 볼 것 아니냐고... 말은 힘을 가진다. 호칭에 차등이 있다면 역할에도 차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저자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호칭을 바꾸자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 개개인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기 위해 쉬운 일부터(그까짓꺼) 바꿔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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