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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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소설을 펼쳐들 때면 언젠가 머물렀던 제주의 기억이 떠오른다. 환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날도 있었을 텐데, 푸르게 넘실거리던 바닷가의 물결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던 눈부신 날도 있었을 텐데, 제주를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흐린 하늘과 세찬 바람에 대한 기억뿐이다. 온몸으로 부딪혀 오던 그 거친 바람이, 마음을 세차게 때리던 바람 소리에 대한 기억이 책장을 넘기는 내게 애잔한 그리움처럼 밀려들었다. 윤대녕의 소설은 그 바람 소리를 닮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잊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는 그의 인물들을 보면서 제주의 바람 소리를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음 속 담아두었던 깊은 그리움을 툭툭 건드리는 것만 같았던 제주의 바람, 그리고 그 바람소리로 기억되는 제주. 작가가 제주에서 쓴 소설, 「탱자」는 고단한 생을 누린 고모가 제주에서 머무른 여정을 담고 있다. 고모의 고단한 생이 제주의 거친 바람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모의 한탄 섞인 자조의 목소리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결국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며 차가운 바람을 견뎌내는 게 우리네 인생일 테니까. 「못구멍」에 나오는 말처럼,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잠깐 스쳐 지나가는 빛을 바라보는 게 우리들 인생”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움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생에 스며드는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의 인물들은 그리움을 멍에처럼 이고 살아간다. 「제비를 기르다」의 어머니는 가슴에 스며있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집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곤 했다. 마치 제비처럼 떠났다 돌아오는 어머니의 삶은 어디 한 곳 정착하지 못하고 평생을 떠도는 사람처럼 황량하고 고독했을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삶이야 말해 무엇하랴.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조차 어루만져 줄 수 없는 내밀한 생의 고독은, 그리고 그 고독으로 이루어져 있는 관계는 「못구멍」에서도 마찬가지다. 운명처럼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지만 이들은 고단한 생을 핑계 삼아 서로를 가장 외롭게 한 후에 헤어진다. 이들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 재결합이 쓸쓸하게만 느껴진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가 못구멍처럼 어떤 것으로도 지워질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처는 겉으로는 치유된 듯 보이지만, 그 앙금은 깊숙하게 남아 우리 삶을 이끌고 갈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가까운 듯 보이지만 가장 멀리 존재하는 관계일 수 있는 가족. 그 가족의 고단한 관계가 여러 소설에서 보인다. 「제비를 기르다」에서 어머니는 그 자신의 고독으로 남은 가족들을 고독하게 만들었고, 「고래등」과 「편백나무숲 쪽으로」의 아버지는 ‘나’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멍에 같은 존재이다. 「못구멍」에서 부부는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낀다.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밀한 외로움을 나누지 못했다. 따뜻한 관계라고 생각했던 ‘가족’이 그렇게 고단한 삶의 짐이 되기도 하고, 마음 속 깊이 맺힌 고독의 무게를 더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리움의 정체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관계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크다.

 

그의 소설 속에서 헤어짐, 상처, 그리움의 쓸쓸한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죽음’의 고독함으로 이어진다. 「제비를 기르다」에서 그토록 고독한 생을 살아온 어머니는 당연한 귀결처럼 죽음을 준비한다. 「탱자」의 고모나 「편백나무숲 쪽으로」의 아버지가 맞이하는 죽음은 그 고단했던 생과 맞물려 애잔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타인의 죽음은 지독한 아픔이어서 「낙타 주머니」에서처럼 쓸쓸한 느낌을 어찌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끝을 가지고 태어나는 한, 우리 삶에 드리운 고독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른다. 윤대녕의 소설은 그러한 필연적인 고독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치 그러한 필연적인 고독에 의해 소설이 쓰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각별히 고독을 챙기며 살았다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온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시간,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에 먹먹해졌던 기억이 있다. 환한 빛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생이란 끊임없이 고독한 질문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 때의 먹먹했던 기억만큼이나 가슴을 아련하게 파고드는 문장들은 마치 옛사람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만큼이나 쓸쓸하다. 윤대녕의 서정적인 문장들 속에서 서서히 아픈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거닐었다. 그 아픈 통증을 쓰다듬어 주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문장들이었다. 부드럽게 매만져주는 따뜻한 손길처럼 그가 속삭이는 듯 했다. 쌓여가는 그리움들이 상처가 되어 삶 속으로 파고들어도,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따스한 강물 같은 위로 받을 수 있는 날이 있다고. 고독한 삶 위로 따스한 빛이 내리쬐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이 삶에도 존재한다고. 그러니 살아가는 게 아니겠냐고.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감정들로 아파할 때, 잠들지 못하는 밤 그리움들이 가슴 시리도록 스며들 때, 누군가의 위로로도 스산해진 마음을 다독이지 못할 때, 그럴 때면 늘 윤대녕의 소설집을 꺼내들었다. 살아 있는 일이 이토록 고독한 일이었던가. 그의 문장들에서 나는 얼마나 고독해졌고,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편안해졌는지. 우울했던 시간, 그의 문장들에서 나는 또 얼마나 위로받았었는지. 그의 말처럼 살아 있는 한 그리움은 계속되고 누군가 글을 쓰는 일도 계속된다면, 이제는 더 이상 내 깊은 그리움을 홀로 삭이지는 말아야겠다. 마음이 시리거나, 그리움이 서걱거리는 밤이면 펼쳐볼 한 권의 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따뜻한 이불에 파고들듯, 그리운 이가 전해주는 엽서를 읽듯, 그의 소설 속으로 파고들어야겠다. 내 깊은 그리움을 달래주기 위하여. 내 고독한 삶에 아름다운 위로 하나 건네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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