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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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비판, 칭찬 등 아주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잡지 연재 당시부터 적잖은 논란에 휩싸이며 화제를 모았고 심사위원들의 팽팽한 찬반 격론 끝에 결국 나오키상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연애 소설과 범죄 소설의 영역을 넘나들며,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의 15년에 걸친 사랑의 행적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 내고 있는데, 아름답고 뛰어난 흡입력을 가진 이 소설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유는 친아버지와 딸의 사랑이라는 충격적인 소재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읽어보면 작품의 흡입력이나 완성도에서는 아주 높은 평가를 하지만, 소재의 특별함(?) 때문에 조금의 거리낌이라도 있으면 읽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게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소설의 소재가 그만큼이나 ‘충격적’인가 하는 것에 조금 의문을 가졌다. 어찌 보면, ‘근친상간’이라는 것은 문학이나 여러 예술장르에 있어서 조금 낡은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근원에 있는 터부를 건드린다는 것에서 언제 어떤 형태로 맞닥뜨려도 충격적이라는 것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나 오래된 고전 『오이디푸스 왕』,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김진규의 「달을 먹다」, 드라마 <피아노> 등등 약간만 생각해보면 ‘근친상간’을 다루고 있는 작품(대부분 친 혈육 사이의 사랑이 아닐 때가 많지만)은 은근히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충격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단순하게 소재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 전체에 흐르는 강렬한 존재감, 선명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적나라한 묘사가 평범하지 않은 소재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의 특이점이라 할 만한 것은 구성이다. 『내 남자』는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는 소설인데, 하나의 결혼식 전날부터 하나와 준고가 만나는 날까지 이어진다. 비오는 거리에서 둘이 만나는 첫 장면부터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둘이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두 번째 장 ‘요시로와 오래된 시신’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시체는 독자에게 궁금증을 더 가중시킨다. 작가가 한국의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 하는 시간의 역순전개. 이것은 독자들이 작품의 초반부에서 얻게 되는 준고와 하나의 관계, 왜 그들에겐 시신이 있으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나 등의 물음에 대한 답을 시간의 역 흐름에 따라 하나씩 보여주기에 끝까지 긴장감과 집중력을 유지하게 한다.

  맨 처음 장인 ‘하나와 낡은 카메라’의 끝에서 준고는 하나의 곁은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왜 하나를 떠났는지에 대한 답변은 작품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어딘가 허무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결말이 정말 작품의 대미를 장식했다면 지금의 『내 남자』와는 무척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소설은 끝이 났고, 분명이 앞부분에서 성장한 하나와 늙은 준고는 이별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소설의 끝을 보면 아직도 그들의 관계가 계속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 부분부터 다시 소설의 처음 부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하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의 처음부분은 이야기의 마지막이지만 구성상 처음이라서 다시 시간의 역행을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준고의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이 또한 이 소설의 구성이 주는 강렬한 힘일 것이다.


  하나와 준고에게 서로는 가족이면서도 연인이고 이 세상에게 유일하게 남은 ‘너와 나’인 것 같다. 그들의 사랑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아준 인물에게, 마치 오리새끼가 태어나 처음 눈뜨자마자 본 것을 어미로 인식하는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준고를 따른다. 준고 또한 상실한 어머니를 하나에게 투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어머니의 피로 만들어진 자신의 피가 흐르는 하나에게서 흐르는 어머니의 피를 쫒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의 관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금기시 되는 죄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런 용서받지 못할 사랑이야기를 왜 쓴 것일까. 어쩌면 작가는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이 세상이고 어디부터가 저 세상인가. 선을 긋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본문 p.259)이라고. 과연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무엇이며 선과 악의 경계는 어디일까. 소설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두 번의 살인까지 저지른다. 이 둘의 결합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짓’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하나와 준고의 사랑을, 그들의 시간을 보면서 왠지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또한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무어라고 정리할 수 없다.

  “이 소설의 냄새와 색채를 재현하기 위해 나는 어둠의 세계에 푹 빠져야만 했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어 며칠이고 식사를 할 수 없었고 잠도 잘 수 없었다.”라고 말한 작가의 노력과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품의 깊이를 그저 즐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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