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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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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자갈) 이 한 문장을 되뇌고 있다.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눈치챈 것은 칠음계를 다섯 손가락으로 연주해야 함을 알았던 때부터였거나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처음, 그 어려움과 맞닥뜨렸을 때 느껴지던 당혹감. 그리고 칠음계를 다섯 손가락으로 연주할 수 있음을 직접 느꼈을 때전해져오던 희열감. 그 기분을 아직 잊지 못한다. 천천히, 계속해서 하다 보면 된다는 걸 처음 느꼈을 때, 어쩌면 그때, 삶이 그리 만만치 않을 것임을 그러나 그 뒤엔 항상 더 큰 감동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음을 지금은 안다. 생각해보면 그 작은 방에서 일어났던 그일, 그것이 삶의 한 단면처럼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의 화자가 지난 을 보내고 난 후에 깨달은 바를 지금 말하고 있듯이 나 또한 내가 지나왔던 을 지금 다시,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앨리스 먼로의 이야기를 읽으니 말이다.

 ‘2013, 잊지 않겠다라는 문장을 일기에 적었던 어느 날. 그리고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자갈)라는 문장을 담았던 또 다른 어느 날. 이 사이에 나는 성장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또한 되새긴 것이다.

디어 라이프를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단어는 균열이었다. 삶의 어느 날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 누군가는 죽고(자갈), 누군가는 깨닫고(코리, 혹은 모든 작품), 누군가는 꿈을 꾸고(호수가 보이는 풍경), 누군가는 사랑을 확인(돌리)한다. 지금 혹은 후에. 그런데 인물들은 그저 그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삶이 균열로 점철되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한바탕 소동처럼 삶의 어느 시기를 휩쓸고 지나가는 균열. 신경숙 작가가 말한 폭죽처럼 쏟아진다는 말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그 속에서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내게 일어난 일은 드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책에 없다면 진짜 인생에는 있을 것이다. 그 문제를 다루는 상투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걷는 것도 물론 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춰야 할 때가 있었다. (돌리, 323)

 

 균열. 그 사이를 채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절대적으로 예측불허지”(돌리)라는 말에 공감하는 것이다. 달콤하지만은 않은 그렇다고 씁쓸하지만도 않은 그 길을 걷고 있는 우리.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일이 드문 일이 아님을 받아들이면 나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론 걷거나 멈추는 것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렇다면, 디어 라이프.

 「호수가 보이는 풍경꿈을 꾸셨나 봐요라는 질문에 남편이 살아 있고 내가 아직 운전을 하던 시절로 돌아갔어요.”라고 답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차종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에게 봐요. 아직 쌩쌩하시잖아요.”라는 말이 뒤따른다. 꿈같아진 시간을 보낸 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런 말을 듣고 있다면 상투적일지라도 문제를 다룰 수 있는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적으로 예측불허인 삶이니 말이다.

 밤에 가장 많이 머물렀던 .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단다. 그저 꿈 같은 것이거든. 장담할 수 있어.”라고 말하던 아버지. 새벽에 잠 못 이루는 딸과 마주친 아버지가 건네는 첫 마디가 굿모닝임이 고마웠다. 단호한 괜찮을 거란 말. 그리고 믿음을 보여준다는 것. 그 확인의 순간에 희망의 폭죽이 터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효과를 발휘하겠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보여주는 희망만큼 강한 것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소리를 아버지가 들은 것이 그날 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자기 땅에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변변치 않아도 돈벌이가 되는 것을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책상 서랍에 권총을 넣어두는 사람이라면 계단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기척이나 살그머니 문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만 들려도 분명 몸이 움찔 할 것이다.  (, 367)

 

 위의 문장 어느 것 하나 해당하지 않는 나의 아버지가 떠오르는데도, 내 기척 소리를 듣는 아버지가 그려졌다. 그러니까 소설 속 와 나는 다른 인물이고, 소설 속 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다름을 알면서 예상했던 대로 대출금 상환기한을 연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그의 모습에, “어찌됐건, 그때부터 나는 잠을 잘 수 있었다라는 문장에 쿵, 하는 것이다. 아마 나도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되돌아왔던 것 같다. 균열 속에 갇히지 않고,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누군가 덕분에. 이를 통해 우리가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이야기가. 문제와 희망이. 사람은 사람으로 위로 받고, 이야기로 위안 받으며, 문제는 또 다른 희망으로 해결된다. 이것이 다행히도 지금까지의 삶이었다.

 조금 짧은 손가락 덕분에 에서 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알았고, 혼자 조용히 심호흡하는 법도 배웠던 그때.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으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삶, 타인의 이야기 덕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의 문장, 그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새삼 지금 그냥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후에라도 놓치지 않길 바라본다. “싸울 여력이 없음을 느꼈던 2013년의 어느 날,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늘 괴로워할 것과 불평할 것이 존재”(돌리)함을 확인했던 어느 새벽. 낯선 이의 책을 읽으며, 문장을 옮겨 적었다. 이 문장이 내 삶에 큰 위안이 돼주길 바란다.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는 것이니 말이다. 디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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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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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에서 출발했다고 다 사실은 아니고 상상에서 시작됐다고 다 허구는 아닌 것이 소설의 세계다. 나는 단지 그녀가 쓴 한 편의 글을 읽었을 뿐인 것이다.(278)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혹은 듣고 싶어한다. 그것을 의식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과 스스로 그 사실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부러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임을 숨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 뒤로 숨는 것이다.

 나는 소설로부터 부재의 이미지를 발견했고, 소설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 속에서는 부재’(혹은 존재)의 반복이 두드러진다. 마술 장면에서 사람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모습과 화장실에서 낳은 자신의 아기(제이)를 찾는 아기, 아기 어딨어요?”라고 묻는 소녀. 제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동규) 기억 속 제이에 관한 최초의 기억, 말을 잃고 찾게 되는 나, 자취를 감춰버린 제이 등의 모습이 그러하다. 이렇게 부재(혹은 반대로 부재로 인해 강조되는 존재)의 모습은 환상과 이어지게 된다. 마술이 그려내는 환상 혹은 소설이 그려내는 허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소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는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 소설은 작가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 본격적인 이야기 전에 진행되는 마술에 관한 이야기와 2. 제이와 나(제이의 탄생과 나의 함구증을 비롯한 그들의 방황과 시련을 보여줌)의 이야기, 그리고 3. 소설가인 의 이야기까지. 이야기는 이야기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소설에서 제이는 책을 읽을 때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찢어내고 읽었다고 했다. 작가들이 시작과 끝에 사람을 홀리는 뭔가를 숨겨놓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리고 독자인 나는 이 소설은 처음과 끝 부분이 더욱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와 나의 이야기가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면. 이야기 밖의 이야기인 소설의 처음과 끝 부분에 진행되는 마술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소설가인 의 이야기가 보다 중요한 것이다. 제이와 내 이야기(이야기 속의 이야기) 부분에는 함구증의 시절에 제이는 내 욕망의 통역자였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 소설가인 의 이야기 부분에는 제이가 바로 저예요.”라고 말하는 동규의 말이 나온다. 이러한 작가의 말()을 지켜보면서 독자인 나는 결국 모든 것은 작가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소설은 작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설이 작가의 품을 떠나게 되는 순간, 독자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작가의 이야기로 규정함은 곧 이 소설이 독자인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말을 할 거 아니야? 네 인물들이 말이야.”라는 그녀의 말처럼. 소설은 내 안에서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다. “존재는 여기있으면서도 정신은 저기속해 있다는 식의 느낌”. 그 느낌을 받았다. “굳이 보고 싶지도 않고, 보지 않아도 좋았을 어떤 것을보았다는 느낌보다 제이가 환영을 보는 것에 초점이 가기보다 소설가가 말하고 싶은 것 혹은 소설가가 말하고 있는 것에 궁금증을 느꼈다. 작가는 사실에서 출발했다고 다 사실은 아니고 상상에서 시작됐다고 다 허구는 아닌 것이 소설의 세계다. 나는 단지 그녀가 쓴 한 편의 글을 읽었을 뿐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단지 그가 쓴 한 편의 글을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제이가 보는 환영이 진짜인지, 제이가 환영 그 자체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내가 읽은 소설이 사실일지, 아니면 소설 자체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소설로부터 작가의 목소리 혹은 내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작가 혹은 내 이야기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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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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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삶 비열한 삶

 

지워지지 않는...

감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색(色)을 띠게 한다. 사람들은 대개 여러 빛깔을 띨 수 있고, 그 여러 가지 색(色)을 실현시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특수한 감정에 사로잡혀있을 경우, 그 사람의 색(色) 또한 특정한 빛깔을 띨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사람을 속박시켜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날 수 없도록.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그저 뒤로 물러서는 게 전부이도록. 그들의 삶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어두운 그 빛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빛에 그 감정 안에 갇혀있었다. 그 절망 안에 머물도록. 그들이 절망으로부터 물러서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절망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빈디시와 카타리나가 그랬듯이 아말리에 또한 결국, 절망하게 된다. 그들은 그 절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살기위해서.

사람들은 특수한 상황에서의 특수한 경험을 잊지 못한다. 인간은 평생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평생을 잊지 못해서 고통받기도 한다. 빈디시는, 카타리나는, 아멜리아는 피해자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갖고 있는. 그들에게 상처는 대물림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 또 고통받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도 치명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때의 아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삶의 마지막 강을 건너기 전까지 말이다.

그들에게 삶은 치열했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죽음을 보았다. 카타리나는 빈디시처럼 살아 돌아왔다. 빈디시는 자신의 삶을 얼른 카타리나에게 붙들어 매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왔다. 얼른 다른 이에게 자신의 삶을 매어야만 살 수 있었던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들의 삶은 무엇도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꿩처럼 날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은 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날개를 느낄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들이 이전에 서로에게 기대어야 생존할 수 있었듯이 이번에 그들은 여권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손내밀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또 다른 도피처를 찾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날개를 접고, 다른 시도로써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빈디시는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여자고, 또 배가 몹시 고팠겠지.’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울분의 감정은 폭발적으로 치솟곤 한다. 그 감정은 아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하지만, 빈디시는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게 현재를 살지도, 미래를 꿈꾸지도 못한다. 그의 기억은 아직 과거에 얽매여있다.

그곳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을 선택하게 했다. 그들은 아내의 엄마의 아픔을 잊지 못했듯이 앞으로 딸의 아픔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픔의 대물림이었다. 그곳의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 아픔은 의도적이지 않았다. 누구도 그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막지는 못했을 뿐이다.

그들이 꿈꾼 것은 또 다른 비상이 아니었다. 단지, 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전에 빈디시가 카타리나에게 자신의 삶을 매도록 하면서 살고자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의 물러남을 택함으로써 그들은 살고자 했다. 그들이 꿈꿈 것은 비상(飛上)이 아니라 비상(非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오직, 살기위해서. 그렇다면 그들의 삶과, 선택은 왜 변화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들은 아픔 안에 절망 안에 갇혀있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누구의 선택이었단 말인가.

집을 떠나기 전, 아픔에 잠겨있는 아말리아에게 빈디시는 “이별은 원래 힘든 법이야.”라는 말을 한다. 빈디시는 아말리에의 아픔을 느끼긴 하지만, 그 아픔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그랬기에 그녀의 아픔을 위로할 순 없었다. 결국, 그것은 아말리에의 아픔이었다. 살기 위해서 택한 것들이 끊임없이 상처를 주었다. 살기 위해서한 선택이 삶을 힘겹게 만들어버렸다. 삶은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만들어놓고, 다른 이의 아픔조차 위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아픔 그 감정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겐 날개가 있지만 날아오를 순 없었다. 우리는 거대했지만 힘이 없었다. 우리가 짐승보다 더 강한 것은 오로지 두려움과 외로움의 감정일 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삶을 꿈꾸었지만 삶은 늘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떠도는 인생...

"낯선 올빼미는 밤마다 마을을 찾아온다. 낮에 어디서 날개를 접고 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 부리를 다물고 잠을 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라곤 올빼미와 뻐꾸기와 파리들이 전부였다. 날 수 있어서였을까 그들은 때때로 우리를 찾아왔다. 날아가 버리면 그뿐인 그것들은 그렇게 날아왔고 그렇게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본다.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여권을 사서 떠나는 우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그것들도 우리도 떠돌이가 분명한지 모른다.

카타리나의 말처럼 우리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지금까지가 그랬듯이 앞으로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지, 어디에 머물게 될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살기 위한 곳을 찾아 떠돈다. 돌아돌아 정착하는 곳이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한 곳에 머물러있을 수 없듯이 자연의 흐름에 따라 불어불어 떠나듯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흐름에 따라 떠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 우리의 운명이겠지. 순간순간 불어오는 바람처럼 떠날 수도 있는 것이.

떠나기 전, 카타리나는 경사진 빨간 지붕들을 바라보면서 꼭 난생처음 보는 마을 같다고 말한다. 내가 살던 곳이 낯설어지는 순간, 떠돌 수밖에 없는 우리의 떠돌이 인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떠도는 인생,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인생을 손에 잡아 쥘 수도 없다. 우리가 치명적인 선택을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여권에 불과하니까. 그곳에 머물겠다던 야간 경비원의 인생도 결국, 떠도는 인생을 마찬가지일 것이다.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인생은 모르는 것이니까. 지금까지 그랬듯이 누군가가 떠났듯이 누군가를 새롭게 만났듯이 알 수 없는 인생, 떠도는 우리의 인생은 같은 것이니까.

우리는 우리의 감정조차 잘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픔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상처 입히고, 상처 입은 누군가를 위로하지 못하는지도. 인간은 감정에 휩싸여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저마다의 고독감에 사로잡혀 살아갔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통제할 수 없었다. 감정을 뜻대로 조절할 수 없으니 인생 또한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던 그 집이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때에,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무엇을 그리며 살아왔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을 그리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것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누구의 탓이 아니니까. 그러니 그들도 모르는 것이겠지. 살면서 그들과 같은 상실을 경험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결정되어 버리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는 언제나 무관한 것이니까. 달아나보려고 해도 그것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오곤 하니까. 밤이 되면 내 뒤에서 길게 그림자가 되어 나를 따라오곤 하니까.

 

잃어버린 무엇

카타리나가 생존을 위해서 했던 선택이 카타리나의 먼 미래에까지 와 상처를 주고 있다. 그의 남편은 그녀를 보면서 끊임없이 그녀의 과거를 떠올린다. 아프게.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 상처 입는다. 그리고 어린 날의 아말리에를 보면서 생각한다. 언젠가는 아말리에 때문에 크게 망신당할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여자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느끼기도 한다. 함께 살아가면서. 그가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야간 경비원은 말한다. 여자들은 사람을 속인다고 하지만 그도 결국은 새로운 아내를 맞이한다. 그들은 함께 사는 사람을 의심한다. 그것은 그들이 잃어버린 무엇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믿음 같은 것. 그리고 그 믿음이 깨진 것은 상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 의문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것이며 스스로를 외롭게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찾아갔던 모피가공사는 빈디시에게 말한다. 그런 곳에도 그런 산 속에도 여자들이 있더라고. 어디에나 있는 그러나 소중한. 그래서 언제나 함께해야 하는 것들에 의심을 갖기 시작한 건 상실을 겪고 믿음이 깨지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 아팠을 테지만 무엇도 잡히지 않는 그들의 삶에서 쉽게 희망을 품는 것 또한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디의 증조할머니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장례를 치른 남편을 찾아 떠돈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무책임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녀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상실을. 그래서 떠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떠돌아다닌다고 이미 죽은 남편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건 불가능한 것이니까.

그들은 믿음을 잃었고 희망을 잃었고 사람을 잃었다. 그것이 그들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삶은 그들에게 비열하기까지 했다. 상처주고 상처 입혔다. 그들은 단지 살고자 했을 뿐이었는데 살기 위해선 상처입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그들은 그 상실로 인해 머릿속이 지끈거리거나 뱃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실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치료할 수도 없다. 상실의 시대 속에서 다른 감정까지 잃어버린 채 오직 외로움이나 고독감에 휩싸여있던 그들의 아픔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외롭다는 생각도 억울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들에겐 불편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기도 하니까요.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들의 아픔이 대물림 되었듯이, 그들의 아픔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길게 그림자 져 있는 우리의 고독감은 밤이 되면 나타나 우리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때때로 그것은 믿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과거가 때로는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미래를 경험에 비추어 보곤 하니까요. 그래서 책을 읽으며 현재가, 미래가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이야기 안에서가 아니라도 말이죠. 이야기 밖에서라도. 당장 지금이 아니라도.

기억되는 것이 기록되는 것인지 기록되는 것이 기억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외롭지만, 떠도는 인생이지만 우리가 언제나 희망을 품듯이 또 그 희망은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기도 하듯이 상처가 치유되기만을 꿈꿔봅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지만, 가장 알맞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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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성이다 - 기적의 트럼펫 소년 패트릭 헨리의 열정 행진곡
패트릭 헨리 휴스 외 지음, 이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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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믿는다.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갖게 하는 희망을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헨리로부터 작은 무엇도 포기하지 않았고, 헨리 역시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헨리는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는 보통 아이들과 같이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작은 어른’ 같았다고 한다. 그런 그는, 게임쇼의 진행자를 꿈꾸고, 마칭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 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 그의 시간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상상해본다. 그의 오늘은, 우리의 오늘은 정말,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확실한 건, 지금의 오늘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행히도 우리는 계속해서 오늘을, 내일을 꿈꾸는 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가 늘 그와 함께 동행하는 것처럼, 그들은 책 안에서도 동행한다. 때로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때로는 헨리의 목소리로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와 어떤 점이 닮아있을까? 우리는 ‘저마다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짐은 보일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보인다고 해도,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응원할 수박에 없고, 그들 역시 우리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즉,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헨리의 오늘을 통해, 그의 어제를 상상한다. 헨리의 이야기를 통해 그를 상상한다. 그의 삶을 그려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말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알아갔다. 나는 그 중, ‘디나 선생님’이 자꾸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음악적 재능은 디나 선생님으로부터 좀더 선명한 빛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을 보지 못하는 선생님에게 그의 연주 방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 기억난다. 그래서 순수하게, 음악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이.

그의 말처럼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을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도록 한계를 느끼지 않도록 한 것은 그녀의 영향 역시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도 그녀도 이러한 사실로부터 행복을 느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당연하다. 좋은 영향을 받은 헨리만이 기쁜 것이 아니다. 분명 좋은 영향을 준 디나 선생님도 기뻐했을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부터 기뻐하고 있는 우리만을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늘, 그러한 것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행복해졌다. 그러니, 계속 시간이 갈수록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그가, 이렇게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건강한 삶을 꿈꾸고 있기에 그런 그에게 ‘가능성’을 점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든든한 그의 가족이 있는 한 그들이 좀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건강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의 의미, 가족의 의미까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건강이란 행복을 뜻한다. 가족이란 나를 뜻한다. 그들은 건강한 가족, 행복한 나 안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자신감이, 건강한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내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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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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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상황에 맞게 잘 활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한 문장을 최고의 한 문장으로 뽑고 싶다. 책을 읽기 전에도,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 상황에 맞게, 잘 활용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좋은 이야기는 ‘생각’ 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를 자라게 해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게 해주기도 하고, 어제까지의 내 생각에 확신을 하게 해준다. 나의 삶의, 나의 가치관에 맞게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이야기를 찾는다. 그래서 나는 안젤루를 찾았다.

사실,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말에 실제 자신의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안젤루는 책을 읽는 우리 모든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책을 읽는 내가 그녀의 딸이 되는 것이다. 책을 통해 맺는 ‘관계’란 건, 생각보다 안정적이다. 안정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 경우에는 그렇다. 그녀가 책을 통해 보이는 호의가 그렇고, 그 호의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이 그렇다. 우리의 관계는 꽤 안정적이다. 그래서 나는 새삼 안정적, 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에 작은 기쁨을 느낀다.

책에는 “내가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인정한 다음에야 이런 질문에서 위안을 얻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자 했었던가. 나는 모른다, 하고 말하는 것조차 자신 없어 하는 나.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조차도 확신을 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나는 나는 모른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당당함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나에게 위안을 준다. 그리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어디에 살든 한심하게 무식한 측면은 있기 마련”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알지 못하는 것, 여기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모른다’의 의미와 다르다. 앞에서의 모른다는 우리가 살면서 놓치는 것들, 그 놓친 것들로 인해 어지러움을 느끼는 우리, 그래서 또 쉽게 무언가를 놓치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상황을 말한 것이다. 즉, 알지 못해도 괜찮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문장에서 그녀가 말하는 모른다, 의 의미는 우리가 한심하게 놓치는 것들. 그래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끄러워야만 하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살든, 어느 시대에, 어느 순간에 살고 있든 말이다. 몰라도 되는 것, 몰라서는 안 되는 것. 이 둘을 구분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만나야 할까.

나는 그녀의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에 가장 크게 반응을 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녀의 흑인이고, 좋은 추억만을 가지지는 못한 채 살아왔다. 그녀와 나는 무엇이 같고, 다를까?

사실, 그녀를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만나면서, 가장 마음이 쓰였던 부분은 그녀가 아이를 갖게 되는 장면에서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면서, ‘여자의 몸’에 대한 불안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받는,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확인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사랑하는 아이, 아들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을 맞이하기까지 그녀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을까. 그 몇 페이지에 나는 가장 마음이 쓰였다.

나는 분명히 그녀와는 다르다. 나이도 생김새도 좋아하는 음식도. 하지만,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 그녀와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여자라는 것이 같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그녀와 얼마나 더 닮아갈지는 모르겠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지금의 그녀처럼 나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신에게 자신의 생각에 당당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되든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나도 그녀처럼 ‘이야기’를 통해 좀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지 모른다. 그랬으면,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주는 감정은 편안함이다.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그 마 음따라 생각 따라 함께하는 것이다. 순서도 상관없고, 배경지식도 상관없다. 그런 건 몰라도 되는 것이다.

“실망의 바람이 / 내 꿈의 집을 무너뜨리고 / 문어 같은 분노가 그 축수로 내 영혼을 덮으면 / 나는 그저 멈춘다. 가던 길을 멈추고 / 나를 치유할 수 있는 / 한 가지를 찾는다 / 내 기억 속에서 / 기분 좋게 놀란 얼굴로 / 사고 싶은 장난감을 쳐다보는/한 아이의 얼굴…” 살면서 멈추어야만 하는 순간에, 그 때, 나를 치유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 이야기가 내 안에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느낀다.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만드는 건 믿음’이라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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