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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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기억은 바래지기 마련이고,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본능에 가깝다. 어떤 기억은 지워져야 하지만, 때로 우리는 어떤 추억 덕분에 하루하루를 견디게 된다. 가령 소중한 사람과의 기억.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건 상대의 소중함 덕분일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던 어느 날 밤, 모르고 있던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던 날들. 그리고 영원한 이별을 앞둔 채 매일 이별해야 했던 어느 날들. ‘영원한 외출은 그 수많은 날들을 추억한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주어진 역할을 해내야 하는 하루 속에서도 덤덤히 맞이해야만 하는 소중한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삶이 소중한 건 그 소중한 사람들과의 일상 덕분이라고 책은 말하고 있다.

 

p.23 단순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기한테 의지하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또 아부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궂은 역할을 떠맡은 적도 있지 않았을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하고 의기양양하다. 즐거울 때만 웃는 무뚝뚝한 사람. 근면한 노력가. 성실한 사람이다. 인색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미덕이었다.

 

 

저자는 아버지를 단순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즐거울 때만 웃는 무뚝뚝한 사람. 그러나 결국 성실한 사람. 모두 우리네 아버지를 말하는 듯하다. 화가 많아 감정 표현에 실패하든, 검소함이 몸에 베여 찡한 마음을 갖게 하든 결국 아부지는 아부지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건 누구나 아버지의 뒷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과의 대면. 아버지가 나보다 앞선 한 시대를 묵묵히 걸어온 누군가임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아버지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이끌림은 시작된다.

어느 날 아버지와 걷고 있을 때였다. 우리 보다 앞서 가던 여자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진 적이 있었다. 나는 당황해 걸음을 멈췄을 뿐인데, 아버지는 차근차근 마치 준비된 일인 양 그 일을 해결했다. 우선 아이를 일으켜 세운 후 다친 데가 없는 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살펴보며, 깨져서 못 먹게 된 유리병에 든 음료와 다행히 깨지지 않는 음료수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다시 그 비닐봉지를 아이에 손에 들려주며 '다행히 거의 깨지지 않았으니 이번엔 뛰지 말고 잘 들고 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격려해주었다. 멍한 아이의 표정. 아마 나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수없이 해왔을 아버지의 일 중 하나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이도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성장한다. 선배가 전해준 혹은 직접 보여준 날들의 조언으로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축적 덕분에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p.125 약아빠지게 남의 짐칸에 슬쩍 기어드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남의 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다. 자신의 자전거에 기름을 치면서 삐걱삐걱 계속 폐달을 밟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법이다.

 

남의 짐칸에 슬쩍 끼어드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저 모르는 척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서툴고 힘들지라도 제 힘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사람을 발견하는 게 반갑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됐다. 아마 이것 또한 함께하는 혹은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서른 하나, 그런 걸 모르지 않는 나이가 됐다. 슬픔을 아는 나이. 그러나 아직 덤덤히 슬픔을 인정하진 못하는 나이. 어느 정도 성숙했으나 아직 경험해야 할 세상의 일들이 두렵기도 한 나이. 앞으로 영원한 외출을 앞둔 사람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책 속의 가족처럼 덤덤히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이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이가 된 것이다. 아직은 이른 고민이길 바라지만, 삶의 속도에 어느새 가속도가 붙었음을 확인하는 매일이기 때문이다.

 

p.96 의외지만, 드문드문 오는 상중 엽서는 아버지의 죽음이 얼마 지나지 않은 내게 어딘가 위안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얼마나 쓸쓸할까,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내 부모가 죽고 나니,

그렇구나, 그랬구나, 요전에 잠깐 얘기할 때는 그렇게 밝았는데, 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니…….”

감정이입하면서 엽서를 보았다. 우리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게 쓸쓸하게 느껴진다. 이미 그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가집에 가야 하는 날이 오면, 가기도 전에 그 쓸쓸함에 사로잡힌다. 누구나 이별을 맞이한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게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다가오고 있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어떤 추억들을 떠올리게 될까. 아마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들도 있을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에 사로잡힐 지도 모른다.

 

p.156 트릭 오어 트릿.

장난을 쳤다가는 아버지는 파랗게 핏줄을 세우고 진심으로 화를 낼 게 분명하다.

화난 얼굴조차 그리워질 때가 올까?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부아가 치미니, 그것만은 그리워하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나 역시 너무나도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의 화난 얼굴. 그런 표정까지 그리워진다는 건 결국 전부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결국 나쁜 기억은 다 사라지게 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싫어했던모습조차 바래지는 것이다. 기억은 미화되는 것이라 했으니 싫어했던 모습조차 추억이라 소중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래도 다른 기억을 더 그리워하고 싶긴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의 모습은 슬픔 속에서도 웃음 짓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걸 이해해주는 사람들의 모습. 그래서 마음이 끌렸던 장면이 있다.

 

p.78 장의장에도 포켓몬고몬스터는 나오는가, 하는 게 화제가 되어서 다들 해보니 몇 마린가 나와서 겟.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이런 우리를 보며 재미있어 했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어서, 그들의 가족이 짧은 순간의 웃음으로 삶의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었다. 너무 오랜 시간 슬픔에만 잠식되기엔 곳곳에 놓인 슬픔이 너무 많다. 이를 딛고 더 나은 삶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다.

아픈 추억, 아름다운 기억. 기억과 망각. 그 사이 어디즈음에서 삶은 계속되고 있다. 에세이집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아버지가 본인과 동생을 위해 사준 40년이 된 인형. 잠시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버리기로 결정한다. 40. 충분히 소중히 간직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처분했다고 해서 추억을 잃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고 있다. 이미 내 곁을 떠난 누군가가 지금 내 옆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와의 추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어쩌면 책의 제목처럼 그는 단지 영원한 외출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단지 돌아오지 않을 뿐 사라지진 않는 것이다. 그러니 잊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트릭 오어 트릿을 외치는 젊은이들을 기대하며 길을 걷던 어느 날. 설렘으로 들떴을 이가 그 다음날 아버지의 부고를 듣게 되리라곤 상상치 못한다. 삶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좋은 일과 나쁜 일. 언젠가 이 반복에 무뎌지는 날이 올까. 여전히 슬픔을 이겨내는 법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번갈아 주는 세상에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칠 거야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종종 기쁨과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영원한 외출을 앞둔 이 긴 여행도 꽤나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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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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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버틴다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버티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게 되는 걸까. 그리움. 저자의 어머니는 그저 그리움이 남게 된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어린 자식의 모습, 젊디젊던 서로를 기억해주는 시이.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생략된 말이지만 내내 듣고 있는 것만 같은 것은 미처 감출 수 없는 한숨이었다. 한숨은 숨길 수도, 깊이 들이킬 수도 없는 무게를 지녔다. 나는 기억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게서 반대로 또렷이 기억해내는 것들을 확인하곤 했다. 그것은 각자의 행복이었다. 역사와 사회, 이념과는 상관없던 개인의 행복. 그 이야기를 하기까지 우리는 삼대를 거쳐야만 했다.

 

1. 모두 저마다의 한숨을 쉰다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도, 어머니의 이야기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시집살이였다. 아마 익숙한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우리네 어머니는 깊게 숨을 내뱉으며 살아왔을까. 뚝딱뚝딱. 시아버지가 먹고 싶다는 국을 끓여내고, 떡을 하고, 심술궂게 계속되는 주문과 타박에도 그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는 이들을 어쩌면 우리는 약자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자린고비인 시어미니의 눈을 피해 배고픈 배를 채우려 동서지간에 함께 하던 토마토 서리. 그리고 죽은 남편의 곁을 떠나 재혼한 며느리가 낳은 자식에게 인벌레(사람벌레)’라고 칭하던 모습들.

삭히면 삭혀지는 것일까. 내가 겪지 못했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에선 늘 낯설지만 익숙한 한()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기 전 잔치를 벌이던 부모들, 그리고 나는 죽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어느새 눈물짓던 누군가의 아들. 허망한 건 마음껏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잔치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감성을 이라 칭하게 된 것은 오래도록 이어진 한숨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한민족끼리 하이까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하던 시숙이 죽인 단 한 명의 사람은 죽어가던 사람이었다. 총을 잘못 맞아 죽지 못하고 고통받던 사람. 그 사람은 살려달란 말 대신에 빨리 총을 쏴달란 말을 했다.

감히 상상해보건대 그들도 잘 모르지 않았을까. 너무 어렸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러나 우왕좌왕하기에 시간은 없었고,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선 선택을 해야 했다. 후회를 걱정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후회는 늘 나중 몫이 되었다. 살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삼팔선을 건넜다는 이들. 할머니는 위험을 무릎 쓰고 손주를 부모에게 전해주기 위해 그 길을 나선다. 할머니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부모와 어린 자식을 떼어놓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나선 길. 그러나 후에 할머니는 엄마와의 이별을 겪게 된다. 살아서는 볼 수 없고, 꿈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이산가족. 누군가는 북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만화로 접할 수 있어 좋다는 감상을 표했다고 한다. 맞다. 할머니가 아닌 북한 할머니가 된 내 어머니 이야기. 나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공허함이 조금은 무서웠다. 그리고 여전히 그 아픔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저자 역시 어머니에게 묻고, 묻되 기다렸다고 했다. 어머니가 말하기 힘들어하실 때마다 딸로서 그녀 역시 함께 아팠을 것이다.

어린 시절, 설핏 일제강점기의 힘든 생활상을 할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한 세기를 살다 가신 할머니였기에 나 역시 들을 수 있던 이야기가 많았으리란 생각을 내내했다. 그런데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힘든 시절의 이야기를 물어도 되나 하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내가 전해 들은 이야기의 전부는 한 해 내내 쉼 없이 일해도 절대 배를 채울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모두 빼앗긴 노력의 결과물. 반세기가 지나 들려주신 이야기에는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던 고통을 감내하던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2. 그럼에도 행복을 꿈꾸다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남편의 폭력이나 도박, 첫째 아이를 잃은 아픔이나 부모와의 이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자꾸 마음에 남는 것은 혹시나하는 그러나 평생 마음에 남았을 사랑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었던 시흥이를, 그리고 혼담 얘기가 오가던 한 교사와의 성공했을지 모를 결혼 생활을 상상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하곤 했다. 가능성에 대한 미련은 참 아픈 거라고. 정말 자신을 좋아하던 시흥이와 결혼했다면 엄마는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전쟁을 겪은 후 밤마다 후유증을 앓는다는 시흥이 역시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다 그 상상은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됐다. 그보다 결혼 닷새 뒤 맞이한 해방이 좀 더 일찍 이뤄졌다면 아니면 한민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아픈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그렇다면 정말 행복을 꿈꿀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를 직접 겪은 이들은 얼마나 이 같은 상상을 했을까.

언뜻언뜻 비치는 아버지의 평온한 미소나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을 만화 곳곳에서 볼 때마다 그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어머니에게 장사를 나가지 말라고 하고, 뒤이어 자신이 일을 나가던 모습. 어머니 역시 직접 속으로는 나를 아껴가지고 자기가 한 거야라고 했으니 계속된 좌절이나 비극이 없었다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계속됐다. 같이 피난 오고, 군인 신분인 아버지의 이동 대열을 함께 달린 어머니였다. 둘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가난이 없었다면 도둑질을 하던 식모나 이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마음 아파하는 피해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어?”

“60년이 지나니까 더 나.”

고향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어머니. 만약 간다면 묘를 파헤쳐 뼈라도 만져보고 싶다는 어머니. 나는 이 거대한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어머니 기억 속 사실이란 것이 못내 아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들은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며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일했고, 딸 역시 고생하는 어머니 곁을 살뜰히 지켰다. 그리고 그 비극 속에서 살아남기만을 꿈꿔야 했던 이들도 사랑을 하며, 살아남았다.

마음에 가장 남는 장면 중 하나는 1부의 엄마와 나도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기로 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 일,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는 문구였다. 이는 4부의 역사와 사회와 혁명이 화두였고, 개인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는 말과 닿아있다. 시간이 지나 이제 우리는 거대한 이념이나 혁명보단 개인의 몸과 마음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지난 아픔 덕분이라는 것을 독자는 모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쉽지 않은 일을 하며 지쳐간 몸과 마음을 지켜낸 청춘 시절의 저자에게 가장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청춘으로서 대단한 것을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고, ‘내 일이라고 말해주어 감사하다. 저자와 같은 시대의 어른으로부터 너와 나는 다르다는 말을 겪어내야 했다. 그것은 종종 임원 면접에서 행해졌고, 그런 어른들을 볼 때마다 무기력해졌다. 그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단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한 단체의 임원이던 그녀는 자신이 대통령처럼 뽑혔다며 깔깔 웃었다.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그녀는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은 말과 행동을 했고, 그만큼 나는 어지러웠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청춘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던 사람인가 보다. 할머니에게 지독한 시집살이를 겪게 하던 시아버지인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착한 널 괴롭힌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 이야기를 해보자면, 현재 내 목표 중 하나는 지금의 마음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결코 작은 행복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성공했던 어머니와 저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또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어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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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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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설이다

 

누군가 소설가에 대해 묻는다면 아픔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싶다. ‘쓰되, 잊으면 안 될 것들을 게워내는 존재들이라고. 어쩌면 이 과정은 소가 여물을 게워내는 과정과도 겹칠지 모른다. 좀 더 잘 소화하기 위해 다시 한번의 아픔을 되새기는 사람들. 거꾸로 생각했을 때 내게 소설 읽기란 읽되, 잊지 못할 것들을 간직하는 것이다. 읽은 후 쓰는 것 또한 일맥상통할지 모른다. 오늘의 아픔을 내일도 간직하고 싶어서. 나 또한 읽고 기록한다.

삶은 소설이고, 에세이다. 증언할 사람이 있는 한 혹은 목격자가 있는 한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고 소식 앞에서 친구들은 입을 다물고, ‘는 우두커니 혼자가 된다. 소설가란 얼마나 우직한 사람인가. ‘우두커니어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아버지가 된 순간까지도 외면하지 않은 아픔은 소설가를 소설가이게 한다. 그리고 그 소설가가 주목하는 건 언제나 그 자체였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중략) 나는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일 뿐이다. (중략)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

 

상처는 이야기 되어짐으로써 치유된다. 상처는 사람을 아프게 하지만,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의 경우 아버지, 아버지의 손가락, 그리고 어린 시절 사랑했던 소가 그러했다.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모든 일들. 즉 그가 오래도록 응시하고 마주한 것들이 다시 그로 하여금 그가 꿈꾼 소설가가 될 수 있게 했다. 군 생활을 하며 외운 오십여 편의 시. 무엇을 하건 아무 때고 외운 시가 혀를 단단하게 했듯 오래도록 영혼에 머문 아픔이 곧 마음을 여물게 한다.

삶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생을 행하는 것은 귀하다. 매 순간 소멸하기 때문에 매 순간 소중하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 사람들이 힘든 건 마음을 다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고, 마음을 다친 이유는 흔한 취급을 받기 때문이었다. 호기롭게 나선 하루와 문밖. 그 사이에서 상처받는 이들의 이야기가 삶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사람이 흔하다니. 그 사람들은 삶이 소설임을 모르는 것일까. 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한 것일까. 진짜 을 마주치지 못했던 것일까.

친형과 같았던 친척 형은 수갑을 찬 사촌 동생을 보고 울부짖는다. “내내내가……혀혀형인데……내내내 앞에서……수수수갑을……안 돼!”라고. 그 형은 죽은 어머니의 입에 아버지가 엽전을 넣는 걸 보면서도 울지 못했던 형이다. 모르는 이들은 험상궂게 생겼다고만 볼 수도 있는. 그러나 누군가와 다툰 적 없고 목소리를 높이는 법 없던 이. 이런 이들을 이런 이들의 분노를 목격한 사람의 삶은 소설이 된다. 삶을, 사람을 향한 소설의 주인도, 목격자도 될 수 있다. 반대로 생의 무게를 잊은 자들은 소설과 같은 삶 앞에서, 그 끝에서 무엇도 될 수 없다.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이는 삶의 무게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일

 

앞서간 이의 마음을 주울 수 있다면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지 않을까. “프리모 레비에 따르면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애썼던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누구도 수용소에 대해 증언하지 않을 것이며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수용소의 진실을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주어진 역할에 대해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이들은 또한 작가에게 부여된 의무를 감당하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그려내는 소설가의 일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딸과의 대화를 그려낸다. 그는 딸에게 한 권의 책을 가리키며 스스로 자신의 살붙이와 고향과 고향 사람들과의 추억이 담겼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나선 길에서 딸의 숲속에 괴물이 있지?’란 물음에 숲속엔 잃어버린 것들과 두고 온 것들이 있다고 답했다. 잃어버린 것과 두고 온 것들. 그래서 다시 숲속을 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임을 보여준 것일까.

 

 그해는 유난히 길었다. 누군가는 우시장에서 한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근수를 늘리려고 억지로 소에게 물을 먹였다가 기어이 소를 죽이고 말았으며 (중략) 어느 가장은 제 가족을 모조리 죽인 뒤 목숨을 끊었는데 그 집에서 살아남은 건 외양간의 소가 유일했다. 소는 어떤 심정으로 일가족의 몰살을 묵묵히 지켜보았을까.

 

작가는 이 일을 계기로 어른들이 소가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자주 냉담한 목격자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고 서술했다. 산문집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문학은 소다에서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삶을 지켜본 목격자인 소를 문학에 비유한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던. 언제 울어야 할지 아는 짐승이었던 소. 한 집의 가장은 죽기 전 고민했을 것이다.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남겨둘 것인가를. 소는 짐승이지만, 가족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니. ‘너는 살아남아라’. 그런 이의 시선을 확인한 소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때 문학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되는 걸까. 자신이 지키던 가정의 몰살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법을 소는 알게 됐을까.

그렇게 늘 집 한 켠을 지키던 소를 팔고 돌아서는 이들의 걸음은 갈팡질팡한다. 이런 그들의 뒷모습을 작가는 소를 잃은것이라 표현한다. 쉬이 집을 향하지 못하는 그들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소를 잃은 것이라고. 외양간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게 아니라 삶의 터전인 밭을 일구고, 자식을 키우며, 자신들의 삶을 지켜봐 주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그러니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어 길을 헤매는 것이다. 아마 소의 맑은 눈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소를 팔았어도 가난한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힘든 순간일수록 길게 느껴진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해가 있다면 거친 한 해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 가는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면 무거워진 발걸음이 자꾸만 멈춰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간을, 발걸음을 기억하는 이가 소설가가 되는 것이겠지. 그런 순간이 있어 삶은 소설이 되는 것일 거다.

 

    

잃어버린 것과 잊지 못하는 것

 

갑작스러운 이별. 그 상실은 때론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한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잃기 전으로, 어린 시절 사랑했던 소를 잃기 전으로, 고모를 잃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무언가를 하나씩은 잃고 사는 것 같았다. 눈에 띄는 것일 수도 있었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별. 하나씩 잃어가는 그것들을 동시에 우리는 잊지 못하게 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할머니의 형제였던 넛할아버지는 자주는 아니었고 일 년에 꼭 한 번씩 우리집을 찾아왔다. (중략) 아마도 넛할아버지는 아직도 캄캄했을 새벽에 집을 나섰을 테고 초겨울 짧은 해가 지고도 밤이 이슥해질 무렵에야 그 집으로 돌아갔을 테다. 오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오직 누이의 얼굴 한 번 보고 손등 한 번 쓸어보기 위해 다니는 이 없어 쌓인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누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곶감을 지게에 지고 걸어왔을 넛할아버지.

 

일 년에 꼭 하루. 서로 기별을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술을 준비하고, 그런 어느 날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들이닥친다. 찰나의 만남을 위해 새벽같이 길을 나서는 이도, 그런 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배웅할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씩 잃어갔던 형제들을 잃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형제를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그 그리움은 더욱 고요할 수밖에 없다. 긴 이별이 다가오기 전 고요히 맞이하는 짧은 만남. 만남이 짧더라도 일 년 중 하루뿐이어도 말을 건네고,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수감 생활 중 백일의 짧은 만남에도 깨닫는 것이 인간이었다. 이별의 순간 서로 이따금씩 속내를 드러냈음을, 사람을 사람으로 느끼는 데 백일이면 충분함을, 이별은 확인하게 한다. 한 귀로 흘려넘겼던 고모의 꾸지람이 고모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메아리친다. 잃어버린 온기 앞에서 온기는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다. 이것이 곧 산문집에 실린 대목을 대변하는지 모른다. “내 상상 속에서 나는 매번 손가락을 잃었다가 되찾았고 그럴 때마다 그 손가락은 이전의 손가락과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면서 나는 타인들 역시 무엇을 잃었는지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건 모두 이별과 상실을 경험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손가락을 잃은 후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절명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잃었으나 잊지 못하는 것. 삶은 그사이 어디에선가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삶은 균열의 연속이다. 상실은 곧 흔적을 남긴다. 그럼에도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건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전한 진심의 말. ‘너희들은 젊으니까, 살아야 한다’. 삶이 뻔하지 않은 건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온기를 찾았던 어느 곳에서건 사람을, 생을 주목했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으니 이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놓치고 잃어버렸으나 살아남았으니 진짜 사람이 될 차례다.

    

 

p.22 소름이 돋았다. 언젠가 암소의 혀가 핥고 지나간 적 있던 내 손등 위에 속삭이는 말처럼 은밀하면서 간지러운 것들이 돋아났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외양간으로 가서 얼어붙은 두엄을 밖으로 치웠다. 술기운이 잦아들면서 차가워졌던 몸이 달아올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소를 팔았지만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내게 그 소가 대학 등록금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주무신다. 어머니는 맑은 물로 무쇠솥을 부시어내고 주인을 잃은 외양간으로는 사방에서 사나운 시선 같은 찬바람이 몰아친다. 쇠스랑을 쥘 자격이 없는 손아귀 가득 더운 땀이 배어난다.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그래,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아버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이래도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나는 고개를 저었는데 무엇을 부정하는 거였는지는 아버지 역시 확신할 수 없었으리라. 쓰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제기랄, 소설은 이미 저 소가 다 써버린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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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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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무엇일까. 또 삶에 정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대에 오르는 것일까 아니면 내려오는 것일까. 삶이 시작된 순간 우리는 저마다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를 ‘말’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소설 속 ‘나’는 도발레를 보며 잊고 있던 그리고 동시에 모르고 있던 그의 삶을 보게 된다. 결국 ‘혼자’임을 고백하는. 그래서 독자인 나는 코미디언이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연기는 결국 웃음보다 감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진짜 웃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고백한다. “스탠드업을 하면 가끔 사람들을 진짜로 웃게 만드는데, 그건 작은 게 아니”라고. 그런데 이 고백은 비단 그만의 고백이었을까. 소란 속에서도 그의 말과 몸짓을 듣고 보기 위해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던 결국 모든 이의 또 다른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소설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도발레가 어린 시절 우정을 나눴던 퇴직한 판사인 ‘나’에게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보고 그 무대에 대해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주축을 이룬다. 이런 엄청난 부탁을 도발레는 자신을 잊고 있던 옛 친구에게 부탁한다. 그가 판사였기에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가 말했듯이 “핵심은, 내가 이 생각을 많이 했고, 오랫동안 곱씹었고, 그런데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자신이 없었다는 것. 하지만 그러다가 마침내, 네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거”다. 나는 이 사실이 못내 아팠다. 그가 어린 시절 이후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를 못 만났거나 그의 행복이 ‘상실’을 경험한 바로 직전에 멈춰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행복이 어느 순간 멈춰버렸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너무나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동시에 가장 슬픈 사람으로 생을 마감한 것처럼.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이미 완성된 듯 했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은 공포였다.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 길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무대에 오르기 위한 시간처럼 공포는 깊고 아득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만약 의미가 있다면,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완전해질 수 있다”는 울림 덕분이다. 행복은 짧았다, 마치 한밤의 쇼처럼. 그 짧은 쇼를 즐기기 위해 어머니와 나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써야 했다. 나는 어머니의 고통을 덜기 위해 모든 시간을 그녀를 기쁘게 할 궁리를 하는 데에 사용했다. 돌아보면, 결국, 그 하루하루가 모여 오늘의 쇼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떠났어도 삶은 계속돼야 했으니까. 이는 나를 장례식에 데려다 준 운전병의 개그와도 중첩된다. 기억하지 못하는 형을 잃은, 상실만을 기억하는 이가 보여준 끝없던 개그. 개그 경연대회를 꾸며대면서까지 개그에 개그를 되풀이 하던. 그런 이의 얼굴은 어느새 강인해졌다.


 삶의 정점을 무대에 오른 순간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삶의 정수는 마지막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순간을 지켜본 이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마지막 무대를 지키던 그녀와 그런 모든 모습을 기록한 ‘나’. 그리고 그 이야기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 모습 때문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향해 외쳤다.

 

 “쇼는 끝났어. 카이사레아!” 무대 가장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그의 가장 빛나는 미소를 보내준다. “내가 당신들에게 주는 건 이게 다야. 오늘은 더 내줄 도발레가 없고, 내일도 없을 거야. 이것으로 행사는 끝이야. 나가는 길에 조심해. 안내인과 보안요원들 말 잘 듣고. 출구가 혼잡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모두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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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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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내야 더 좋은 사람이 오는 법이여.”


 생각해보니 그 바다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불가피한 시림을 동반했다. 서늘해서였을까. 아니면 감추지 못한 그 푸른빛 때문이었을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우리의 일은 그렇게 시리게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그 빈자리를 되새기는 것일까.


 아주 먼 섬에서 도착한 이야기는 엄마의 한기를, 소울메이트의 빈자리를, 가려진 시야의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잠시의 안도를 위해 우리는 늘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겹겹이 쌓이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스치듯 이어지는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이우의 청춘은 명렬히 끓어오른다. 그 허기가 주는 공허함을 메운 것은 아주 먼 섬에서 만난 뜻밖의 온기였다. 태이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아저씨, 판도, 이삐 할머니. 불완전한 우리는 불완전한 이들과의 만남으로 비로소 안정감을 찾는다. 타인의 간극은 상대를 멈칫하게 했지만, 서로의 빈틈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온기는 한기보다 더 강해서 곧 서로를 물들였고, 어느 순간 말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함께하지 않는 순간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 준다.


 삶이 삶이지.


 살다보면 비워야 하는 순간만을 강요받을 때가 있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비워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 순간 깨닫게 됐다. 저이도 많이 아팠겠구나. 그 사람도 이토록 시렸겠구나. 그리고 드는 생각. 왜 우린 이토록 아파야 하는가.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아직 어린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이우에게 할미는 툭, 한 번 더 마음의 파동을 만들어낸다. "속 끓일 것 없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야." 그래, 지나고 보니 아프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었구나. 아픔에도 시작이 있었구나 싶다. 그렇다면, 아픔에도 끝이 있는 걸까.


판도는 고둥을 내밀었다. 고개를 저었는데 이상한 고집을 부리며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왜? 왜 주는데?”
판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우의 손바닥에 썼다.
알, 았, 는, 데, 묻, 는, 순, 간, 잃, 어, 버, 렸, 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던 시절을 우리는 어느 순간 잊게 되는 것일까. 어린 소녀와 할미가, 말 많은 소녀와 말 없는 소년이, 소녀와 아저씨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온전히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걸. 왜 우린 자꾸 잊게 되는 것일까. 아주 거대한 섬에 살고 있는 우린 왜 번번이 작은 섬의 교훈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있잖아. 난 여기서 조금씩 충전되고 있어."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 나의 눈물이 되어주는 사람. 그 사람을 잊지 못해 쓰고 지웠을 겹겹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충분히 슬퍼했다. 푸른 바다의 이야기가 너무 시려서.


 슬픔을 온전히 품을 수 있어야지만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그럴 수밖에. 삶은 삶이고, 보내야 더 좋은 사람이 오는 거라면.


 바다가 시린 건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짝반짝. 반짝이는 것이 다 아름답기만 하다면 지금 곁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 다 이해하는 수밖에. 내 안의 아주 작은 섬부터 당신의 아주 먼 섬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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