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삶은 소설이다

 

누군가 소설가에 대해 묻는다면 아픔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싶다. ‘쓰되, 잊으면 안 될 것들을 게워내는 존재들이라고. 어쩌면 이 과정은 소가 여물을 게워내는 과정과도 겹칠지 모른다. 좀 더 잘 소화하기 위해 다시 한번의 아픔을 되새기는 사람들. 거꾸로 생각했을 때 내게 소설 읽기란 읽되, 잊지 못할 것들을 간직하는 것이다. 읽은 후 쓰는 것 또한 일맥상통할지 모른다. 오늘의 아픔을 내일도 간직하고 싶어서. 나 또한 읽고 기록한다.

삶은 소설이고, 에세이다. 증언할 사람이 있는 한 혹은 목격자가 있는 한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고 소식 앞에서 친구들은 입을 다물고, ‘는 우두커니 혼자가 된다. 소설가란 얼마나 우직한 사람인가. ‘우두커니어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아버지가 된 순간까지도 외면하지 않은 아픔은 소설가를 소설가이게 한다. 그리고 그 소설가가 주목하는 건 언제나 그 자체였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중략) 나는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 이야기를 줍는 사람일 뿐이다. (중략)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

 

상처는 이야기 되어짐으로써 치유된다. 상처는 사람을 아프게 하지만,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의 경우 아버지, 아버지의 손가락, 그리고 어린 시절 사랑했던 소가 그러했다.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모든 일들. 즉 그가 오래도록 응시하고 마주한 것들이 다시 그로 하여금 그가 꿈꾼 소설가가 될 수 있게 했다. 군 생활을 하며 외운 오십여 편의 시. 무엇을 하건 아무 때고 외운 시가 혀를 단단하게 했듯 오래도록 영혼에 머문 아픔이 곧 마음을 여물게 한다.

삶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생을 행하는 것은 귀하다. 매 순간 소멸하기 때문에 매 순간 소중하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 사람들이 힘든 건 마음을 다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고, 마음을 다친 이유는 흔한 취급을 받기 때문이었다. 호기롭게 나선 하루와 문밖. 그 사이에서 상처받는 이들의 이야기가 삶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사람이 흔하다니. 그 사람들은 삶이 소설임을 모르는 것일까. 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한 것일까. 진짜 을 마주치지 못했던 것일까.

친형과 같았던 친척 형은 수갑을 찬 사촌 동생을 보고 울부짖는다. “내내내가……혀혀형인데……내내내 앞에서……수수수갑을……안 돼!”라고. 그 형은 죽은 어머니의 입에 아버지가 엽전을 넣는 걸 보면서도 울지 못했던 형이다. 모르는 이들은 험상궂게 생겼다고만 볼 수도 있는. 그러나 누군가와 다툰 적 없고 목소리를 높이는 법 없던 이. 이런 이들을 이런 이들의 분노를 목격한 사람의 삶은 소설이 된다. 삶을, 사람을 향한 소설의 주인도, 목격자도 될 수 있다. 반대로 생의 무게를 잊은 자들은 소설과 같은 삶 앞에서, 그 끝에서 무엇도 될 수 없다.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이는 삶의 무게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일

 

앞서간 이의 마음을 주울 수 있다면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지 않을까. “프리모 레비에 따르면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애썼던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누구도 수용소에 대해 증언하지 않을 것이며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수용소의 진실을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주어진 역할에 대해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이들은 또한 작가에게 부여된 의무를 감당하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그려내는 소설가의 일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딸과의 대화를 그려낸다. 그는 딸에게 한 권의 책을 가리키며 스스로 자신의 살붙이와 고향과 고향 사람들과의 추억이 담겼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나선 길에서 딸의 숲속에 괴물이 있지?’란 물음에 숲속엔 잃어버린 것들과 두고 온 것들이 있다고 답했다. 잃어버린 것과 두고 온 것들. 그래서 다시 숲속을 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임을 보여준 것일까.

 

 그해는 유난히 길었다. 누군가는 우시장에서 한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근수를 늘리려고 억지로 소에게 물을 먹였다가 기어이 소를 죽이고 말았으며 (중략) 어느 가장은 제 가족을 모조리 죽인 뒤 목숨을 끊었는데 그 집에서 살아남은 건 외양간의 소가 유일했다. 소는 어떤 심정으로 일가족의 몰살을 묵묵히 지켜보았을까.

 

작가는 이 일을 계기로 어른들이 소가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자주 냉담한 목격자의 역할을 떠맡아야 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고 서술했다. 산문집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문학은 소다에서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삶을 지켜본 목격자인 소를 문학에 비유한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던. 언제 울어야 할지 아는 짐승이었던 소. 한 집의 가장은 죽기 전 고민했을 것이다.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남겨둘 것인가를. 소는 짐승이지만, 가족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니. ‘너는 살아남아라’. 그런 이의 시선을 확인한 소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때 문학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되는 걸까. 자신이 지키던 가정의 몰살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법을 소는 알게 됐을까.

그렇게 늘 집 한 켠을 지키던 소를 팔고 돌아서는 이들의 걸음은 갈팡질팡한다. 이런 그들의 뒷모습을 작가는 소를 잃은것이라 표현한다. 쉬이 집을 향하지 못하는 그들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소를 잃은 것이라고. 외양간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게 아니라 삶의 터전인 밭을 일구고, 자식을 키우며, 자신들의 삶을 지켜봐 주던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그러니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없어 길을 헤매는 것이다. 아마 소의 맑은 눈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소를 팔았어도 가난한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힘든 순간일수록 길게 느껴진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해가 있다면 거친 한 해를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 가는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면 무거워진 발걸음이 자꾸만 멈춰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간을, 발걸음을 기억하는 이가 소설가가 되는 것이겠지. 그런 순간이 있어 삶은 소설이 되는 것일 거다.

 

    

잃어버린 것과 잊지 못하는 것

 

갑작스러운 이별. 그 상실은 때론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한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잃기 전으로, 어린 시절 사랑했던 소를 잃기 전으로, 고모를 잃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무언가를 하나씩은 잃고 사는 것 같았다. 눈에 띄는 것일 수도 있었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별. 하나씩 잃어가는 그것들을 동시에 우리는 잊지 못하게 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할머니의 형제였던 넛할아버지는 자주는 아니었고 일 년에 꼭 한 번씩 우리집을 찾아왔다. (중략) 아마도 넛할아버지는 아직도 캄캄했을 새벽에 집을 나섰을 테고 초겨울 짧은 해가 지고도 밤이 이슥해질 무렵에야 그 집으로 돌아갔을 테다. 오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오직 누이의 얼굴 한 번 보고 손등 한 번 쓸어보기 위해 다니는 이 없어 쌓인 눈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누이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곶감을 지게에 지고 걸어왔을 넛할아버지.

 

일 년에 꼭 하루. 서로 기별을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술을 준비하고, 그런 어느 날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들이닥친다. 찰나의 만남을 위해 새벽같이 길을 나서는 이도, 그런 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배웅할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씩 잃어갔던 형제들을 잃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형제를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그 그리움은 더욱 고요할 수밖에 없다. 긴 이별이 다가오기 전 고요히 맞이하는 짧은 만남. 만남이 짧더라도 일 년 중 하루뿐이어도 말을 건네고,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수감 생활 중 백일의 짧은 만남에도 깨닫는 것이 인간이었다. 이별의 순간 서로 이따금씩 속내를 드러냈음을, 사람을 사람으로 느끼는 데 백일이면 충분함을, 이별은 확인하게 한다. 한 귀로 흘려넘겼던 고모의 꾸지람이 고모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메아리친다. 잃어버린 온기 앞에서 온기는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다. 이것이 곧 산문집에 실린 대목을 대변하는지 모른다. “내 상상 속에서 나는 매번 손가락을 잃었다가 되찾았고 그럴 때마다 그 손가락은 이전의 손가락과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면서 나는 타인들 역시 무엇을 잃었는지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건 모두 이별과 상실을 경험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손가락을 잃은 후 아버지가 어떻게 절망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절명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왔는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잃었으나 잊지 못하는 것. 삶은 그사이 어디에선가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삶은 균열의 연속이다. 상실은 곧 흔적을 남긴다. 그럼에도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건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전한 진심의 말. ‘너희들은 젊으니까, 살아야 한다’. 삶이 뻔하지 않은 건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온기를 찾았던 어느 곳에서건 사람을, 생을 주목했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으니 이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놓치고 잃어버렸으나 살아남았으니 진짜 사람이 될 차례다.

    

 

p.22 소름이 돋았다. 언젠가 암소의 혀가 핥고 지나간 적 있던 내 손등 위에 속삭이는 말처럼 은밀하면서 간지러운 것들이 돋아났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외양간으로 가서 얼어붙은 두엄을 밖으로 치웠다. 술기운이 잦아들면서 차가워졌던 몸이 달아올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소를 팔았지만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내게 그 소가 대학 등록금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주무신다. 어머니는 맑은 물로 무쇠솥을 부시어내고 주인을 잃은 외양간으로는 사방에서 사나운 시선 같은 찬바람이 몰아친다. 쇠스랑을 쥘 자격이 없는 손아귀 가득 더운 땀이 배어난다.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그래,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아버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이래도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나는 고개를 저었는데 무엇을 부정하는 거였는지는 아버지 역시 확신할 수 없었으리라. 쓰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제기랄, 소설은 이미 저 소가 다 써버린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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