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 P9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생명이 생명에 그토록 쉽게 가닿는 세계, 바람결에 날리는 꽃들이 꽃들에 뒤섞이는 세계, 백조가 모든 백조들을 알고 있는 세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고독을 쌓아올린다. 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