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가한 주말 아침 으스스한 한기가 온 거실을 엄습한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아파트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온 서늘한 바깥 공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바깥 공기엔 창으로 내다보이는 앞산의 맑은 산 공기가 가득 담겨있어 피톤치드를 거실에 흩뿌려준다. 상쾌한 아침을 무겁고도 음침하게 가라앉게 한 건 아내의 입에서 아들에게 전달된 한 마디 말 때문이다.

"시간을 아껴라!"

일요일이라 아침 여덟시 반에야 겨우 일어난 아들의 시간관념은 시험을 앞 둔 이 시대의 부모의 입장에선 영 못마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느긋하기만 한 아들은 느릿느릿 세면을 하고 부스스한 머리칼과 퀭한 눈을 하고 식탁에 앉는다. 식탁에 앉아서도 시험과 관계없는 역사만화를 펼쳐놓고 있다. 또 다시 이어지는 아내의 일갈은 일순간 한가한 일요일 아침에 시간의 가속페달을 밟게 만든다.

"넌 지금 2%가 부족해."

마치 그 부족한 2%를 자투리 시간으로 부지런히 채워야 백 퍼센트의 행복이 충전될 수 있다는 듯 아내는 시간을 독촉하고 있다. 아마도 그 2%의 저축된 시간은 회색 신사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아니 아들의 멋진 반격처럼 4%의 시간이 그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아들은 말한다. "늘 엄마가 제시한 숫자의 곱절이 점수에서 사라지던데..."

이 순간 새벽녘까지 모모를 손에서 떼지 못하고 다 읽어야했던 나는 우리 가정에 가득 들어찬 회색 신사를 쫓게 된다. 실체가 없어, 보이지도 않는 그들을 어찌 쫓느냐고? 호라 박사가 말하지 않던가?

"(회색 신사들은)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가기 때문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간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결국 회색 신사는 '죽은 시간'에 다름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헛된 망상으로 놓쳐버린 시간.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고 타자의 삶을 추구하는 삶에서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간 시간.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의 목표가 아니라 일반적인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삶에서 허비해버린 자신의 시간. 결국 회색 신사를 쫓는 것은 '죽은 시간'을 생산해내는 스스로의 내면적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회색 신사 영업사원 BLW 553 c호가 모모를 꾀기 위해 던진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삶,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남과 경쟁하는 삶,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모으는 삶에서 '죽은 시간'은 만들어진다. 이런 삶은 친구보다 앞서 뛰어가야 하고,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기보다 자신의 앞만 보고 내달려야 하기 때문에 친절, 우정, 사랑과 같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회색 신사는 이처럼 점점 스스로의 삶을 부정하고 타자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이 많아질 때 자신의 덩치를 점점 키워나갈 수 있다. 그만큼 그들의 냉동 금고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포기해버린 시간이 쌓여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축적된 '죽은 시간'은 더 큰 세력으로 자라나 인간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버린다.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들의 의지대로 로봇처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의 삶에서 회색 신사를 물리치기란 그리 수월치 않아 보인다. 이미 우리 주변에 회색 신사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내맡겨버린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일단 회색 신사들이 대부분을 점유해버린 사회에서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봤자 소용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건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과감하게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수많은 주변의 손가락질을 감수해야할 경우가 많아진다. 이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돈과 명예를 떠나 진정한 내면적 자아를 추구할만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사회에는 회색 신사들을 대리하는 인간들이 넘쳐나게 마련이다. 그들은 온갖 화려한 문구들을 거리에 덕지덕지 붙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가슴을 싸늘하게 식게 만든다. 오늘도 서울 시내 한복판의 마천루에는 아이돌 그룹이 섹시한 몸짓으로 당신을 유혹하고, 텔레비전에선 S자 곡선의 몸매를 자랑하는 연예인이 마치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고 당신을 꼬드기고 있지 않는가? 그리하여 회색 신사들이 가장 공략하기 힘들다는 어린이들마저도 그들의 허튼 소리와 몸동작을 로봇처럼 흉내 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더 이상 내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기 위해 내가 진정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정확히 찾아볼 일이다.

먼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푸념이나 늘어놓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의 삶을 실패작이라 여기며 화려하고 멋진 다른 삶을 꿈꾸고 있지나 않은지, 그리하여 부질없는 돈과 명예를 추구하며 정작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여기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의 삶을 요모조모 따져보며 반성해 보자. 헛된 망상의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부정하는 순간 회색 신사가 푸른빛 도는 초록색 연기를 뿜어내는 시간의 시가를 꼬나물고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발사인 푸지 씨가 "내 인생은 실패작이야. 난 누구지? 고작 보잘 것 없는 이발사일 뿐이지, 이게 내 현재 모습이야. 제대로 된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하는 순간 불현듯 나타났듯이 말이다. 늘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가슴으로 만났던 그가 일순간 이발사로서의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순간 회색 신사는 그의 심약한 마음을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다음으로 회색 신사들이 내 삶에 생겨날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가슴으로 느끼는 삶'을 살자.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 삶은 내 삶이 아니다. 어떤 목표를 추구하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하든 진정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진정 내면의 깊은 감정으로 승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진정 자기 것이 된다. 그런 삶의 시간은 '죽은 시간'이 아닌 '살아있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이 있기에 자신만의 황금빛 시간의 사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한다. 그 시간의 사원에서 가슴을 열고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나만의 인생을 설계해보자. 그럼 황금빛이 절대 회색빛으로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곳엔 절대 회색 신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내겐 왠지 자신감이 넘쳐나지 않는다. 굳은 결심으로 내 인생을 좀 먹는 회색 신사들과 맞서리라 다짐하건만 왠지 자꾸만 망설여진다. 아마 내 황금빛 시간의 사원에도 이미 그들이 점유한 부분이 많아서인 것 같다. 그들의 솔깃한 제안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이전의 삶이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긴 힘들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입에 물린 나의 시가를 확 빼앗아 내동댕이쳐버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건 나의 습관적 '재촉병'이 내 몸 뼛속까지 침투해 있기 때문이리라.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다던' 호라 박사의 말처럼 나도 어리석은 인간의 부류를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아무래도 호라 박사가 모모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큼지막하게 메모장에 적어 책상 곁에 붙여두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다시 새겨야 할 것 같다.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 전한다.

"이 세상의 운행에는 이따금 특별한 순간이 있단다. 그 순간이 오면, 저 하늘 가장 먼 곳에 있는 별까지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미쳐서,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애석하게도 인간들은 대개 그 순간을 이용할 줄 몰라, 그래서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릴 때가 많단다. 허나 그 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위대한 일이 이 세상에 벌어지지."

나도 내 '운명의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가슴을 열고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살려한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내 황금빛 시간의 사원에서 회색 신사들을 조금씩 몰아내려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회색 시가에서 뿜어내는 역겨운 초록빛 연기가 내 빛나는 황금 사원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차츰 정화시키려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내게도 위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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