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책 속에 삶이 있다. 사람 사는 것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그것이 글로 옮겨지면 보통의 삶도 그럴듯하게 윤을 내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는 그의 글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본다. 나조차도 잊고 산 아무것도 보태지 않은 낯선 감정의 순간들을. 진심이 담긴 사연은 뭇사람의 마음을 쓸어준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글쓰기란 무엇일까. 나에게 글이란 것은 그저 읽는 것에 불과한데 많이 읽다보면 또 잘 쓰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보다. 기껏해야 누가 읽을 성싶은 서평을 쓰는 게 글쓰기의 전부이지만 나 역시 나름의 고충은 있다. 써놓고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투적인 표현들이 그것인데 이곳 저곳 너무 많이 쓰인 나머지 반들반들해진 문장은 혹여나 있을 읽는 이의 마음에 걸리지 못하고 그대로 휙, 지나쳐버릴 확률이 높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다. 나만의 스타일일랑 없고 앞서 읽은 작가의 문체에 영향을 받아 서평을 작성하기 때문에 지금 써내려가는 이 글도 아마 소설가 손홍규의 모습을 조금 닮아있지 않을까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다.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그 목소리의 떨림마저 기록할 수 있는 사전이 나온다면 누구보다 먼저 반기겠지만 그런 사전은 앞으로도 영영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러기에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 역사에 매장된 숱한 언어들은 사전이 아닌 삶에서 발굴되어야 하고 사전이 아닌 소설에 등재되어야 한다." p.45

"그에 비하면 내 말은 허위에 가깝지 않았던가. 내 말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내가 쌓아온 사연들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의 결함은 사투리나 표준어의 결함이 아닌 결국 내가 살아온 삶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p.46




한 마리의 소에게서 그는 소설을 알았다. 가난하고 순수했던 한 시대를 함께한 우직한 소의 삶은 한 사람의 생 전체를 아우르는 기억이 되어 영생한다. 가령 깜깜한 밤 주고 받았던 무심한 눈길과 손등을 스친 어미소의 까끌까끌한 혓바닥의 감촉은 그의 일부가 되어 가슴 한 켠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소는 언제 울어야 할지 아는 짐승"이거늘 얌전히 집을 떠나며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자신의 글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함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글로 풀어낸 오롯한 진심 때문일 것이다. 쓰여지기 위한 글이 아닌 깊은 사유의 흔적이 베인 글이기에. 고로 산문집의 첫 장의 시작은 문학의 길을 열어준 존재에게 바치는 헌정글이자 가족과 다름없는 존재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의 고백록이 되며 이어지는 장(章)은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포착한 절망의 모습이 담겨있다.




어린 시절 갑작스레 날아든 아버지의 사고 소식은 오랫동안 그에게 시시각각 떠오르는 악몽과도 같이 잔상을 남겼다. 아버지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그의 기억이 붙박힌 것처럼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음을 떠올린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 말도 안 되게 어린 나이였고 정말로 죽길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상상에 그친 총동적이었던 최초의 삽화는 줄곧 내 기억에 붙박여 함께 자라났다. 그날 내가 겁을 덜 집어먹었더라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머릿속에서 무한히 되풀이 했다. 그렇게 스스로 키워낸 절망은 울리지 않은 전화벨 소리를 듣고 아무도 여닫지 않은 문소리를 듣게 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연을 쌓아가는 존재"이며 사람은 절망 속에서 성장한다지만 앞으로 쌓아갈 날들에 그토록 깊은 절망은 많지 않기를. 요즘 나는 하루를 산다. 읽고 싶으면 읽고 그러다 지겨워지면 단 한 글자도 읽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보낸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나면 미루지 않고 움직인다. 가만히 흐르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읽히지 않을 책장의 책들이 아까워 조금씩 들인 습관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고 그렇게 책장 속의 짐은 자꾸만 늘어간다. 나의 삶처럼. 그런데 여기 죽음과 책 읽기를 연결짓는 이가 또 있다니! 타인의 공감은 늘 즐겁다.



"세계는 우리가 만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므로 만나지 않은 채 만나기 위해 책은 존재해야 한다. 거기에 다른 군더더기가 무슨 소용이랴. 오래전에도 나는 불온한 도서들의 대출기록부에 쓰인 이름들을 나지막이 호명해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던가. 손가락으로 그 이름들을 쓸어보는 것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않았던가. 이 더러운 세계가 이처럼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 덕분에 완벽하게 붕괴되지는 않았다는 걸, 그리하여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일터로 떠나듯 쓸쓸하게 책을 품고 어딘가로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등을 돌려 떠나야 한다는 걸 오래전에도 알았던 것만 같았다. 나는 무덤 속에 관을 내려놓듯 조심스레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았다." p.153





중생에게 절을 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부처가 있는 경주 열암곡을 지나 이스탄불에서 야샤르 케말과의 아련한 만남에 이르기까지 그와 함께한 여행 한 걸음 한 걸음은 돋보기로 세상을 보듯 너무도 익숙해 쉬이 지나치는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세상 만물이 품은 아름다움과 절망의 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소설가가 응당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 사회의 아픔에 공명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진실을 보도하는 매체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고 권력의 힘으로 가려진 장벽 뒤에선 많은 이들이 조용하고 처절한 싸움을 이어갔다. 본래 아파 본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알아본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그의 시선 끝에 마음을 절뚝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가 타인의 오른손에 자신의 왼손을 살풋 얹어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이다. 그러므로 글쓰는 일이야말로 세상과 밀접히 관련된 일임에 분명하다. 오늘도 우리는 읽음으로써 위로 받는다.




별책 부록의 재미를 선사한 두 편의 미니픽션에 대한 감상평이 남았다.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한 남자의 죽음에서 시작되는 『헛것들』은 과거 국정원에서 일하며 사람들을 감시, 살해한 사람이 겪는 공포를 그려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잃어버린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혹은 유령같은 존재가 되어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을 본다. 모든 것을 조망 가능한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사람들을 감시하는 시선과 그가 쌓아온 공포를 열망하는 소녀의 눈에 비친 것 모두 헛것에 불과하다. 산문집을 들추다 헛것들에 방점이 찍힌 문장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절묘한 일치가 있어 남겨본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전설 같은 풍문과 함께 돌아왔고 그림자 속에 스스로를 은닉해버렸다." (p.88)




『불한당의 소설사』는 오래 전 얻은 명성으로 중압감에 시달리는 한 소설가의 이야기다. 등단 오십 주년을 기념하며 은퇴작을 쓰던 그는 소설의 결말 부분만을 남기고 진전을 보지 못 하던 중 친구의 문학상 수상 자리에 참석했다가 갑작스레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세상은 열광하고 예정대로 칩거에 들어갔던 소설가는 자신을 비난하는 비평가의 글을 읽고 다시 펜을 잡는다. 때론 사랑보다 분노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 비평가와 독자들의 반응이 상반된 것 역시 그의 펜촉을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제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 하는 글은 분노에서 소실될 수밖에 없는 진심과 원고지 앞에서 절로 굽어지는 협심증 환자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에게 글쓰기란 "소유할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결코 소유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부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 됐든 도적질 한 것은 제 손을 떠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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