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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따뜻한 느낌이었다. 책을 덮었을 때, 내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알랭은 이 신간에서 프롤로그에서 시작으로 '언론'을 고찰하고 들어간다.
'이 작은 매뉴얼은, 오늘날 좀 지나치다 싶게 당연하고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된 어떤 습관을 우리 자신을 위해 잠시나마 복잡하게 비틀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지금의 언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종국에 가서는 언론에 기대고 있다. 우리는 뉴스와 신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쨌든 문제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이 세상을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뉴스기 때문에, 뉴스를 멀리하는 삶은 있을 수 없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실제적으로 보이는 것이 제약적이다. 그런 시력을 좀 더 선명하게 그리고 더 멀리 보이도록 도와주는 것은 '안경'이다. 뉴스는 바로 이 안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뉴스에 권위를 부여했었다. 안경이 없으면 볼 수 없다는 그 근본적 이유만으로 말이다. 알랭은 권위를 부여한 뉴스를 어쩔 수 없이 보는 시각을 앞서 이렇게 정의했다. '지나치다 싶게 당연하고 무해한 것으로 보이게 된 어떤 습관'이라고 이야기하며, 당연하다시피 받아들이는 일상의 뉴스를 우리 자신을 위해 잠시나마 복잡하게 비튼다고 정의하며 뉴스를 근본적으로 고찰하며 비평하고 있다.
이 서두를 끝으로, 그는 뉴스를 분야별로 세분화하여 비틀기 시작했고, '그만의 바람직한' 뉴스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정치, 해외, 경제, 셀러브리티, 재난, 소비자 정보 등등으로 세분화하여 각 뉴스의 문제점을 알아보고 추구해야 할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각각의 뉴스 설명으로부터 알랭은 뉴스 텍스트를 그의 시각으로 뉴스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 뉴스의 텍스트의 한계를 지적하며, 동시에 그가 뉴스 내면에서 읽어내고자 하는 '가치'를 이야기함으로써, 기존 뉴스 텍스트의 부재된 부분 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랭의 글을 보며 느낀 점은 세분화된 뉴스에서 결여된 속성, 그것들은 가지각색이지만, 한 가지로 모아서 이야기해보자면 결국 지금의 뉴스에는 '긍정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휴머니즘'의 결여라고 확대해서 해석했었다. 뉴스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식욕의 충족과 인간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뉴스, 발전 가능성을 위해 만들어진 정보 전달의 매개체인 뉴스에서 휴머니즘을 느낄 수 없다는 이 사태를 알랭은 강하게 지적했다.
뉴스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사실성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다 해서 사실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론 뉴스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과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상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 뉴스는 현상과 사실을 다루는 과정에서 가치 개입이 이뤄지며, 어떤 사실을 어떻게 보도할까, 어떻게 중요성을 가져야 할까에 대한 가치판단의 개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뉴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은 사실이더라도, 그것을 어디에 편집했고, 사태의 어느 부분을 부각하여 의도적으로 더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부분에서 '가치 개입'이 들어가 있다.
알랭 식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단지 현실을 선택적으로 빚어낼 뿐이다.' - 51쪽 첫 단락 끝 부분
알랭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뉴스가 '가치 개입'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보통 우리는 그러한 가치 개입적 사고를 '진보'와 '보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여 편가르기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알랭은 그러한 논의를 넘어서, '근본적인 언론'의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요지는 뉴스라는 매체는 지극히 사실성을 바탕으로 보도하는데 집중하여서, 정작 뉴스가 추구해야 하는 부분을 망각한다고 꼬집고 있었다. 뉴스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현상에 대한 비판성과 더불어 긍정성 역시도 제공해야 한다고 알랭은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뉴스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항상 비판적 사고만을 견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비판에 익숙해지고, 점점 더 뉴스를 볼수록 시니컬해져갔다. 알랭은 여기서 뉴스의 맹점이 있다고 봤다. 비판과 더불어 긍정성과 휴머니즘을 뉴스는 제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비평서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첫 번째 현상을 고찰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 두 번째 현상을 고찰하고 이상을 제시하는 것에서 그치는 책, 세 번째는 현상을 고찰하고 실현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궁극적인 이상을 제시하는 책, 여기서 알랭의 책은 두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뉴스의 문제점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뉴스가 추구해야 하는 사상을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의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다. 알랭은 정치 뉴스 챕터에서 이런 논지로 말했다. 한 가지 문제 현상에 대해서 뉴스는 단기간에 해결될 것처럼 해결방안을 제시하지만, 모든 현상을 그렇게 쉽게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뉴스의 바람직한 (알랭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상적인 언론) 이상을 추구하려면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게 간단하게 제시될 부분이 아니라고 알랭은 주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의 논의를 떠나서 어쨌든 책은 참 매력적이다. 보통 비평서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굉장히 날카롭다거나, 때론 책의 냉소적 풍자적 논조에 차가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비평을 날카롭게, 자극적으로 표현하는데 힘을 들인다. 톡 쏘듯, 자신의 비평을 대중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며, 독자는 비평서를 볼 때 어쩌면 그런 톡 쏘는 비평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공감력을 형성한다.
그러나 알랭의 비평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조곤하고, 조용하면서, 때론 추상성이 보이기도 했었지만 대체적으로 조용하면서 섬세하고 여성적인 느낌이었다. 날카로운 비평이 아닌, 따뜻한 비평을 가하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언어의 신중함이 돋보이고 있었다. 무미건조할 법도 한 논지를 특유의 비유와, 일상의 추상화적 글쓰기를 통해 날카롭고 자극적인 선선함과 대조적인 신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언론의 방향을 고찰하며, 언론에게 망각된 긍정성과, 따스함 휴머니티를 강조하며, 알랭 역시도 그것을 표현하는데 따뜻함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볼 때 기분이 좋았었다.
사실 비판하고 싶은 부분도 있다. 여러 부분이 있지만 한 가지 꼽자면, 세계 뉴스를 다룰 때 좀 더 '예술적'으로 다뤄달라는 말, <줄리어스 시저>의 극과 그와 비슷한 뉴스를 대조하며, 특히 뉴스는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큼, 좀 더 문학적이고 흥미롭게, 그리고 세계의 현상만 고찰할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에 있는 그 사회(예를 들면 그 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다양함) 문화적 부분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어쨌든 기사가 너무 길어진다. 뉴스가 문학적 기법이나 예술적 기법을 도입한다면 물론 대중의 시선을 더 끌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뉴스가 그렇게 진행된다면, 다소 뉴스를 볼 때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랭은 대중이 무관심하고 우리가 뉴스에 멀어지게 된 것이 뉴스의 간결성과 현상만을 전달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모든 뉴스가 문학적, 예술적 기법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물론 사람들이 이전보다는 뉴스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그럼 전달량이 많아진 뉴스의 양을 어떻게 분별하고 감당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극도로 단편화되고 간결한 뉴스, 그 뉴스들이 쏟아지는 세상을 살고 있고, 그 간결화된 뉴스조차도 똑바로 선별하지 못하는데, 개개의 뉴스가 문학예술적 기법을 쓰는 세상에서, 그 분량이 많아진(기법이 추가된) 뉴스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데에는 더 힘들지 않을까?
사실 나 역시도 개인적으로는 알랭의 논의인 뉴스에 문학적 예술적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시각에 찬성한다. 사실 뉴스는 다른 텍스트나 영상에 비해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예술적 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부분도 수긍하기는 조심스럽다.
또 한 가지는 이 책의 결론은 '알랭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상적 언론'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개개인 만다 생각이 다르듯, 어쨌든 알랭이라는 한 개인이 바라본 언론의 문제점과 언론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책의 원저 이름인 "The News : A User's Manual"에서 유저 매뉴얼이라 표현하는 부분에서 좀 거부감이 들었다. 매뉴얼은 공인된 설명서에 붙일 수 있는 안내서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내용의 한계가 있더라도, 나는 이 책이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의 내용을 동조하거나 비판하거나를 떠나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우리는 어쨌든 '언론'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열풍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윤리 속에 정의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최근 열풍을 불러오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경제, 자본주의의 모순점과 부의 불평등에 대한 시각을 더욱더 강하게 인식하게 됐다. 비단 저 책들을 읽지 않더라도, 책이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앞선 블로그의 글에서 나는 밝혔듯, '명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내용을 넘어선 시대의 모순이나 일상화된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여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책이야말로 명저'라고 이야기했다. 알랭의 이 책 역시 내가 알기론 베스트셀러에 머물러 있으며, 두 책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우리 시대의 언론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책을 보다가 덮은 경우도 많았고(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빨리 읽어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끌거나 배송 온 <21세기 자본>을 읽느라 자꾸 미뤄서 봤던 경우도 있다. 따뜻한 비평서이고, 알랭을 좋아하는 나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자꾸 덮어지는 책이 이 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여름 막바지에 다시 읽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글귀가 생각났다.
'자꾸 덮어지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다.'라는 스님의 말씀. 그 말씀이 유난히 생각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