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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ㅣ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처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한국 단편중에 이 문단만큼 유명한 문단이 있을까.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김승옥. 그의 [서울 1964년의 겨울]을 작년에 읽었는데 어쩌다보니 무진기행을 지금까지 읽지 않고 있었다. 명성만 알고 읽어보지 못한 책이 한 두 권이겠냐만은. 새로 시작한 독서모임을 통해 그렇게 한 권의 짐을 덜어간다.
무진이라는 곳.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 장소.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 머무는 곳. '나'는 그런 무진에 다시 한 번 발을 딛는다. 무진은 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 당도하는 곳이었다. 6.25 사변 때 어머니에게 몰려 군인이 되지 않고 골방에 숨어 수음하던 곳도, 더러워진 폐를 씻어내며 '쓸쓸하다'는 엽서를 하염없이 보내던 곳도, 곁을 떠난 희 때문에 공상과 불면을 쫓으며 편도선을 붓게 하던 담배꽁초와 함께 하던 그 모든 곳이 무진이었다. '나'의 지루함과 허전함과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런 생활은 이곳이 무진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이다. 무진의 안개는, '나'와 독자를 모두 취하게 만들만큼 선명한 무진의 묘사는 모든 일을 당연하게 만든다. '나'는, '나'를 전무님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무 선출에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호걸웃음을 웃고 있을 장인연감을 상상하면 어머니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나'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감성을 이 무진에 흐트린다. 그래서 그는 오바라고 부를테니 서울로 데려가달라는 '인숙'을, 무진을 못견뎌하는 그녀를, 자신이 '쓸쓸함'을 느끼던 옛 집에서 껴안는다.
'나'가 무진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나'이다. 문학을 사랑했던 '나'를 존경하며 피츠제럴드를 좋아하나 얌전하고 엄숙하며 가난한 박군은 과거의 나. 자랑할 새도 없이 바쁜, 그럼에도 일이 서툴러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나게 만드는 조는 지금의 나. 당신은 저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엣날의 저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 인숙은 또다른 시간에 위치한 과거의 나이다.
무진의 안개 속에서, 푸른색의 깃발이 시체를 옹위하고 있듯 자신들에게 옹위된 '나'는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느끼고, 결정짓고, 안는다. 그러다 아내 '영'의 전보에 무진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전보와의 다툼 끝에'인숙'에게 편지를 쓰나, 결국 찢어버린다. 그리고 무진읍을 떠나는 자신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미성숙 때문이 아니었을까. 과거의 '나'를 성숙한 현재의 '나'가 되어 껴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다시 과거의 '나'로 회귀하여 껴안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과거의 '나'인 인숙이 현재의 '나'가 있는 서울로 온다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는 그 편지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당위적으로 그럴 수 없음의 문제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 그럴 의지가 없어서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무진에 남겨두고 오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결국 심한 부끄러움 뿐인 것이다.
_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살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低溫)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잇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_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함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_ 박은 가고 나는 다시 '속물'들 틈에 끼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_ 언젠가 여름 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그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_ 우리가 잡고 있는 손바닥과 손바닥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