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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여자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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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그녀는 다가가고 싶을수록,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여러 단편들은, 매혹적인 만큼 글자 사이사이에 돌멩이를 박아 놓아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김숨을 생각하면 단편 국수가 떠오른다.
마루 한쪽에 옹송거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어머니와
그녀가 만든 국수가락을 숟가락으로 뚝뚝. 뚝뚝. 끊어내던 딸이 나오는.



바느질하는 여자라는 소설을 집어들게 된 건,
순전히 예전에 읽는 한 단편 때문이다.
낡은 뜨개방 한구석에 앉아, 묵묵히 뜨개하던 한 여자가 나오는 작가가 기억나지 않는 어떤 단편때문에.
이 소설이 마치 그 단편의 후속편 같아 선택했고,
배송 온 책을 손의 단단히 꾸욱 쥔 후에야 이 소설의 작가가 김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느질하는 여자.
숙희한복 여자, 서울한복집 여자, 정인한복 여자, 복래한복 여자, 월성댁, 부령할매,
화순, 금택, 그리고 어머니 수덕.


이야기는 우물집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하게는, 바느질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600쪽이 넘는 이 소설의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다.
각자 잘하는 바느질이 다르듯, 각자의 인생사가 조금씩 다른 것뿐.





우물집에는, 매순간 들숨과 날숨을 내뱉듯 참깨같은 바늘땀을 만드는 어머니 수덕, 집요하게 바늘을 잡으려 하지만 잡지 못하는 금택, 집요하게 바늘을 놓으려 하지만 놓지 못하는 화순이 산다.
쌍둥이 같지만 결코 쌍둥이가 될 수 없는 두 자매, 금택과 화순은 누비옷의 겉감과 안감같다.
둘 사이를 유령처럼 떠도는 목화솜은 어머니이다. 삶은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둘을 올이 어긋나버린 바늘땀으로 천을 우그리고 결을 파괴하며 관통한다.(232p)






집요하게 바늘을 잡으려 하지만 잡지 못하는 금택.
그녀가 집요하게 바늘을 잡으려 함은 욕망 때문이다.
성급하지 않고, 우물처럼 흐르지 않는 금택이지만 늘 강한 욕망에 붙잡힌다.
바늘을 잡고 싶은 욕망. 이것은 어머니가 언젠가 화순과 자신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 어머니에 대한 존경에서 나타난다.
기질적으로 금택은 그 대상이 인간이든, 물건이든, 감정이든, 일이든 하나에 충실한 사람이다.(540p)
그녀는 동그런 구 밖으로 절대 퍼져가지 않는 우물처럼 집요하게 그 욕망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욕망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바늘을 붙잡지 못한다.
바늘을 잊어버릴까봐, 바늘이 자신을 찔러버릴까봐.






집요하게 바늘을 놓으려 하지만 놓지 못하는 화순.
그녀가 집요하게 바늘을 놓으려 함은 욕망 때문이다.
자신을 낳자마자 버린 6년 후, 생각지도 못한 금택과 함께 자신을 찾으러 온 어머니에게 금택은 버려질까 불안해한다.
금택은 성급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늘을 잡을 손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바늘을 잡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에게 바늘의 무용을 증명하고 싶어 의상학과에 가고, 우물집을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바늘을 잡을 수밖에, 우물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화순이니까. 어머니의 딸인 화순이니까.





어머니는 깨 같은 바늘땀을 끈기있게 새긴다.
누비 저고리의 바늘땀이 일제히 숨구멍이 되어 오소소 일어날 것처럼.(14p)
누비옷을 들고 탈탈 털면 깨같은 바늘땀이 우수수 쏟아질 것처럼. (157p)

바늘땀 하나에 쌀 한 톨.
바늘땀 하나에 쌀 한 톨.

바늘땀이 백 개면 쌀 백 톨.
바늘땀이 천 개 면 쌀 천 톨.
저고리 하나면 쌀 한가마니가 되어 돌아온다.









김숨의 소설을 읽으며 수덕의 누비옷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홈질로만 이루어진, 어떤 한 땀이 옷감에 파묻히거나 특별히 튀지 않고 모두가 같은 땀이 되어야 비로소 수만 개의 땀이 보이는 누비옷.
다른 바늘땀에 묻히면서도, 그 바늘땀들 때문데 도드라지는.
수백 개의 바늘땀은 한 가닥의 실로 뜬 것이므로 하나의 바늘땀.



수덕의 저고리에 박힌 바늘땀과 김숨의 소설에 박힌 글자땀 중 어느 것이 더 많은진 모르겠다.
다만 셀 수 없다는 거.
세다가 지쳐버릴 만큼, 알알히 박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천으로 만든 것 같은 이 소설 속 세상에서 말간 무국 맛이 난다.
읽는 내내 무명같은 말간 국을 떠먹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들기름에 달달 볶은 무에, 세 번째로 씻어 나온 쌀뜨물을 넣고, 간을 하지 않은, 그 무명같은 말간 무국을.
그 말간 무국을 꿀꺽꿀꺽 들이킨 다음에야 이 소설을 제대로 덮을 수 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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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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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메큐언, 속죄, 문학동네
공감과 속죄의 폭력





사람의 죄책감. 그것의 경중은 어느 정도가 마땅한가.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철저히 나누어진 폭력이라면, 우리는 타자의 마음에 대해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가해자가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는지, 피해자가 얼마만큼의 고통을 느끼는지.
그렇다면 속죄한다는 것, ATONEMENT. 그것은 가능한가. 진실로 타인을 공감하고 선택의 무게를 느끼고, 그것을 반성한다는 게 가능한가.




실제 누군가의 고통을 그대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초등교과에서 늘 등장하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기른다` 라는 말에 의문을 가졌었다. 공감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타인인데. 우리는 그 사람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낄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비슷한 감정을 떠올리며 추측해보겠지. 그리고 곧 잊을 것이다. 결국은 타인의 일이니까.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영화관에서 주인공에 마음에 이입했다가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다 먹은 팝콘 상자와 함께 마음을 버리는 일이다.


속죄라는 말에는 잘못을 뉘우친다는 의미가 있으니 공감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속죄는 공감에 기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속죄는 자신에게 하는 속죄이다. 내 스스로를 고통에서 놓아주기 위한 속죄. 그렇기에 속죄는 무엇인가 바라면 안된다. 속죄가 끝나기를 바라서도, 들어주길 원해서도.





공부를 하다 중간중간 읽느라 이 책을 몇 번에 나누어 읽게 되었는데, 1부를 읽고 나서 한동안 나는 계속 움찔거렸다. 나는 얼마나 브리오니 같은가.
최근 일련의 사건을 겪는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건을 나의 이야기로 환원시키고 있었다. 나는 엄밀히 타자의 위치에 서 있을 뿐인데,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선 피해자인것 마냥. 이런 태도는 타인에게 폭력이다.
속죄가 아닌 공감에 상황에서도 우리는 폭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공감해주기만을 바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뿐이다.




속죄의 반전반전이 너무 좋다.
이 모든 소설이 반전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욱 좋다.
이야기를 위한 반전.
마지막 에필로그는 두고두고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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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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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처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한국 단편중에 이 문단만큼 유명한 문단이 있을까.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김승옥. 그의 [서울 1964년의 겨울]을 작년에 읽었는데 어쩌다보니 무진기행을 지금까지 읽지 않고 있었다. 명성만 알고 읽어보지 못한 책이 한 두 권이겠냐만은. 새로 시작한 독서모임을 통해 그렇게 한 권의 짐을 덜어간다.




무진이라는 곳.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 장소.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이 머무는 곳. '나'는 그런 무진에 다시 한 번 발을 딛는다. 무진은 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출발이 필요할 때 당도하는 곳이었다. 6.25 사변 때 어머니에게 몰려 군인이 되지 않고 골방에 숨어 수음하던 곳도, 더러워진 폐를 씻어내며 '쓸쓸하다'는 엽서를 하염없이 보내던 곳도, 곁을 떠난 희 때문에  공상과 불면을 쫓으며 편도선을 붓게 하던 담배꽁초와 함께 하던 그 모든 곳이 무진이었다. '나'의 지루함과 허전함과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런 생활은 이곳이 무진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이다. 무진의 안개는, '나'와 독자를 모두 취하게 만들만큼 선명한 무진의 묘사는 모든 일을 당연하게 만든다. '나'는, '나'를 전무님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무 선출에 관계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호걸웃음을 웃고 있을 장인연감을 상상하면 어머니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나'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감성을 이 무진에 흐트린다.  그래서 그는 오바라고 부를테니 서울로 데려가달라는 '인숙'을, 무진을 못견뎌하는 그녀를, 자신이 '쓸쓸함'을 느끼던 옛 집에서 껴안는다.


'나'가 무진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나'이다. 문학을 사랑했던 '나'를 존경하며 피츠제럴드를 좋아하나 얌전하고 엄숙하며 가난한 박군은 과거의 나. 자랑할 새도 없이 바쁜, 그럼에도 일이 서툴러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나게 만드는 조는 지금의 나. 당신은 저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엣날의 저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는 인숙은 또다른 시간에 위치한 과거의 나이다. 


무진의 안개 속에서, 푸른색의 깃발이 시체를 옹위하고 있듯 자신들에게 옹위된 '나'는 과거의 자신을 되짚는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느끼고, 결정짓고, 안는다. 그러다 아내 '영'의 전보에 무진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전보와의 다툼 끝에'인숙'에게 편지를 쓰나, 결국 찢어버린다. 그리고 무진읍을 떠나는 자신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미성숙 때문이 아니었을까. 과거의 '나'를 성숙한 현재의 '나'가 되어 껴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다시 과거의 '나'로 회귀하여 껴안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과거의 '나'인 인숙이 현재의 '나'가 있는 서울로 온다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는 그 편지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당위적으로 그럴 수 없음의 문제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 그럴 의지가 없어서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무진에 남겨두고 오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결국 심한 부끄러움 뿐인 것이다.





_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살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低溫)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잇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_ 그들은 이제 점점 수군거림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으리라,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면서. 나중에 그 소용돌이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자기들이 느낄 공허함도 모른다는 듯이 수군거리고 수군거리고 또 수군거리고 있으리라.


_ 박은 가고 나는 다시 '속물'들 틈에 끼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_ 언젠가 여름 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그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_ 우리가 잡고 있는 손바닥과 손바닥 틈으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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