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없도록 하자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몰라야만' 하는 세대

'노동' 하지 않으면 '햄'이 되어버리는 질문도 해답도 없는 세대


안개가 뿌옇게 둘러싸고 있는 것 같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는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표지가 책의 내용을 전부 담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책의 내용과 표지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과 판타지가 묘하게 뒤섞인 지극히도 현실적인 소설이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햄'이 되어버리는 세계.

여기서 '햄'은 바로 그 분홍색 통통한 살결을 가진

우리가 종종 즐겨먹는 그 '햄'이 맞다.

뜨끈한 흰 밥 위에 올려먹는.

왠 '햄(?)' 하고 의하해 하는 순간

그 세계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아닌, 바로 여기가 아닌가 금세 수긍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노동을 해서 햄이 되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때론 이미 햄이 되었다가, 다시 햄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햄이 된 이상, 다시 햄이 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131page

햄이 되지 않는 것.

그것만이 다행스러운 현재다.

이 세계에 대항하는 단 하나의 방어태세로서

나는 노동한다.


그런데, 과연 노동을 한다고 해서 햄이 되지 않는 것일까.

직장을 나가는 순간, 나는 더이상 나이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내가 아닌 상태로 기계적으로 일하고 순응하는 것.

때로는 악해지기도 하다가 내쳐지기도 하는 것.

우리는 햄이기도 하면서 햄이 아니기도 하다.


*199page

(햄의 대사 中)

노동은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움직이고,

그러한 수고로써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나아지지 않고, 나일 수 없고,

나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니 일을 한다는 건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노동이라는 굴레에 갇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저당잡히는 사람들.

추의 아버지는 맥도날드에서 남들이 먹고 버린 햄버거 포장지나

음료수 컵 등을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도

몇 달째 임금을 받지 못하고, 결국 육체와 정신까지도

좀먹어버린 상태가 되어 3층짜리 건물을 모두 태워버리고 감옥에 간다.


추는 구속된 아버지의 정신이 조금씩 상해가는 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게임장에서 '홀맨'으로 일하며

손님들에게 맞고, 터지고, 피흘리고 아물고

그렇게 안개로 뒤덮인 인생을 연명하듯 살아간다.



얼음공장에서 추와 같이 일하던 동생 케이는

자신의 몸집보다도 큰 삽으로 얼음을 채워넣다가

허리를 삐끗하지만, 작업반장은 며칠 휴가를 원하는 케이에게

허리가 얼음에 꽂혔다는 것을 증명할 CT촬영 자료를 요구한다.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받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모욕적인가.


노동을 이어가고, 또 노동을 하는 장소를 옮겨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그간의 자신을 증명할 서류를 내민다.

그렇게 햄이 아니지만, 햄이 아닌 자신을 꾸며낼 포장된 자신을

세상에 진열하기 위해 햄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오늘 아침 네이X 메인 창에 '고용쇼크에 놀란 당정청 긴급회의'

라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의 댓글에는

연애도 힘들고,

결혼도 힘들고,

애 낳기도 힘들다

는 내용의 댓글들과 성토가 가득하다.


정말 이러다가 이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부서지고 쪼개져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뒹굴어 다니는

분홍색 햄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염승숙 작가의 소설은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주제가 다소 무거웠다.

근데 햄이 사람처럼 철학적인 말을 중얼거리고,

문어체로 말하는 부분이 재밌어서 지루하거나 마냥 늘어지는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햄이 익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염승숙 작가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인간 샌드백에 대한 기사를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회를 향한 감출 수 없는 낙심과

나 자신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경멸 사이에서

나부터도 좀 곤란해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을 써버렸는지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다.


(작가의 말 中)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124page

사람들이 일을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그런 물음표 섞인 말도 섞어가며 뉴스를 보았다.

안 하는 게 죄일까, 못하는 게 죄일까?

.

.

.

일할 수 있다. 일할 수 없다. 어느 쪽이 잘못일까?


*113page

좋은 얼굴로 헤어지는 게 좋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게 어른의 방식이니까.


*61page

무엇을 하고 싶어서 노동하는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 이토록 노동하고자 애를 쓰는가.

노동의 찬란은 어디에서 오는가.

노동의 세계에서 '긍지'를 갖는다는 건 가능한가.

고작해야 햄이 되지 않기 위해서만 노동하는

이 절실한 행위를 살아 움직인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