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노트 쏜살 문고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정지영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쏜살문고의 판형 사이즈와 북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집에도 몇 권 소장하고 있는데, 내가 소장 중인 쏜살문고 중에 제일 예쁜 책이다.

책은 텍스트를 읽는 기능도 있지만 손으로 잡았을 때의 감촉과
북디자인이 내 취향에 맞아떨어질 때 종이책을 읽는 일이 더 즐겁게 느껴진다.

열네 살인 사춘기 소년 다니엘과 자코.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에 둘은 회색으로 장정된 노트에 둘만의 비밀노트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과 우정, 사랑, 은밀한 고백을 주고받는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말 못할 심적 갈등과 고민들을
두 소년은 그 시기에 품을 수 있는 애틋한 감정들로 채워나가는 편지글 형식으로 읽자니, 예전 나의 사춘기 시절이 생각나 간질간질도 하고,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서로에 대한 인상이나 품은 감정을 고백하는 편지 내용도 꽤 많았는데, 우정이 지나쳐 혹시 둘이 사랑하는 관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계가 끈끈했다. 요즘 문학계에서 퀴어소설의 반응이 뜨거워서 그런지, 내게는 좀 그런 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소 억측일지는 모르겠다. 그건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두길.
(바로 이 부분이 회색노트 소설을 읽는 묘미이기도 하다.)


-81page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너를 나에게 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천분에
환상을 품지 않기 위하여 우린
영원토록 얼마나 서로 필요한지!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해.
나는 지금 오늘 아침처럼
열렬히 네 손을 잡는다.
알지? 무한한 기쁨 속에
전적으로 너의 것인 나의 온몸을
다 바쳐서!


-82page
나는 고민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기 위해 태어났고,
또한 희망하고 사랑하고 고민하고
있어! 내 일생의 이야기는
단 두 줄로 요약될 수 있어.
나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사랑. 그리고 나에게는 단 하나의
사랑이 있을 뿐인데, 그건 너야!


흥미로운 건 다니엘과 자코의 성격적 성향이 닮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은 정반대다. 다니엘은 진중하고 진지하고
성숙한 이미지인 반면, 자코는 다소 충동적이고 흥분을 잘하고
불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둘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는 존재가 아닌 자연스럽게 서로의 반대 성향에
이끌린다. 따라서 둘은 융화된다.


아침 출근길, 그리고 퇴근길에 지하철 내에서 이 책을 읽다보니 마음을 다독이는 글귀들이 많아서 좋았다.
출근길과 퇴근길의 여정에 동반자였던 [회색노트]
그 문구들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


-41page
마음 진정할 것,
마음을 굳게 먹을 것,
신뢰를 가질 것......


-65page
"버리십시오! 버린다 함은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이 가루를 삭이듯,
욕망을 버림은 나쁜 생각을 삭여서
'선'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66page
"주여, 제 뜻대로 이루지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73page
공부하라! 희망을 가지라! 사랑하라! 독서하라!

-76page
세월은 흐르고 우리를 시들게 해. 그러나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늘 우리일 뿐이야.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어.
기운이 빠지고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 외에는.

우리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은 채
위험을 향해 뛰어드는 젊음의 의기가 부러워!


독서를 할 때 킬링타임용 책이 있다. 그냥 술술술술
흥미롭게 잘 읽히고 재미를 주는 책. [회색노트]는
잘 읽히기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킬링타임용으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는 책은 아니다.
적은 분량에 비해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페이지를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게 된다.
피와 열정으로 들끓는 두 사춘기 소년의 모험과 무모한 도전이 재미있기도 했고, 그런 모험 과정에서 다니엘이 겪은 일들이나, 이성을 바라보는 욕망에 대한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경험은 매우흥미로웠다.

어떻게 직접적으로 성적 묘사를 하지 않고도
여인과 다니엘의 만남과 성적 흥분이 오롯이
짜릿하게 느껴질 수 있는지, 그런 부분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니엘의 어머니 퐁타냉 부인이 자신의
남편인 제롬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부분에선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바람꾼 남편 제롬,
그러나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남자 제롬.
퐁타냉 부인은 제롬과의 약혼시절 일기장에
제롬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의 애인은 인도의 왕자처럼 아름답다."

우아하고 동양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제롬,
그러나 그는 부인 퐁타냉의 주변 친구와 사촌여동생,
집안의 여공들까지 농락한 희대의 바람꾼이다.
때문에, 퐁타냉의 주변엔 이제 아무도 없다.
정말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드라마였다면, 아마 제롬은 김치싸대기라도 맞지 않았을까 ㅎ

퐁타냉은 상당히 자기 절제감을 가지고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제롬을 조용히 집 밖으로 내쫓는다.

퐁타냉 부인이 그간의 마음 고생과 시름에서 벗어나
다니엘, 제니와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다니엘, 자코 사춘기 소년들의 뜨거운 우정과 마르세유까지의 여행.

*퐁타냉 부인의 고독감과 바람꾼 남편 제롬에 대한 감정, 그리고 제롬의 여인들과 퐁타냉 부인이 만나서 나눈 대화들.

*앙투안과 자코의 다소 수줍은 형제애.
사랑스러운 여동생 제니와 다니엘의 남매애.

*다니엘이 거리에서 헤매다가 만난 여인과의 경험 등

이 소설의 흥미진진함은 무궁무진하고,
또 마음에 담아둘 만한 문구들이 많다는 것이
독서포인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