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말들 - 후지이 다케시 칼럼집
후지이 다케시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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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선생의 글은 명쾌하. 사건과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해 준다. 그의 글은 단호하. 어중간하지 말고, 서야 할 자리에 확실히 서라고 촉구한다. 이 명쾌함과 단호함은 그가 사태에 언제나 당사자, 더 정확하게는 우리로 임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의 글은, 선택을 미루고 어정쩡한 관찰자로 머물기 일쑤인 이들을 부끄럽게 한다.

 한겨레신문에 드문드문 연재되는 칼럼을 아껴 읽던 독자로서 기대했던 책은 이런 연재 글 모음이 아니었다. 오롯이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는 단행본이었다세월호 참사 1년을 맞아 가해()와 피해()’ 문제를 다룬 글(<명복을 빌지 마라>)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가해와 피해가 맞서는 자리에서 피해자가 집단으로서의 존재에 머물러 끝내 자립하지 않을 때" 결국 가해와 피해의 구도, 다양한 피해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굴러가는 비인간적 시스템의 온존(溫存)에 기여하게 되며, 설령 가해와 피해의 자리가 역전되더라도 가해와 피해의 구도 자체는 유지된다고. 이런 가해와 피해의 동학(動學)’을 주제로 한 책을 그가 써 준다면, 가해와 피해의 구도로 판짜기가 시스템 유지의 도구 노릇을 해 온 한국 사회에서, 집단에 매몰되지 않은 자립한 존재, 비판적성찰적 주체의 형성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그런데 그가 떠났다. "서문을 대신하여"라는 서문에서 그는 이 책이 '유고집'이라고, 후지이 다케시라는 이름이 잊히기 바란다고 말한다. 출판사에서는 그가 "자신의 글(<무명으로 돌아가기>)에서처럼 '아직 없는 이름'을 짓고 '아직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무명(無名)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 것 아닐까라는 희망을 말하지만, 아무래도 <서문>은  그의 정치적 유언으로, 제목은 '무명(無明)의 글들'로 읽힌다.

18년의 한국 생활 동안 기울인 노력으로 이 사회의 한 귀퉁이도 밝히지 못했다는 회한을 안고 그는 떠난 듯하다. 정확한 사연이야 알 수 없지만, 행여 그의 '명쾌함'과 '단호함'이 그를 상처받게 했다면 그는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게고, 내 마음은 오래 허전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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