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 자신을기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연극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어쩌다 그만 마음이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자연의 법칙은 꾸준히, 무엇보다도 평생을 두고 나를 모욕해 왔지만 그럴 땐 자연의 법칙을 탓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것은 회상하는 것도 더러운 일이지만 사실 그때도 더럽긴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 분만 지나도 성질을 내면서, 이 모든 것이 거짓에 또 거짓이다. 즉 이 모든 참회, 이 모든 감동, 이 모든 갱생의 맹세가 죄다 혐오스럽게 꾸며진 거짓이다. 하는 생각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럼,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병신으로 만들고 괴롭혔느냐, 하고 물을 텐가? 대답인즉 이렇다. 즉,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지겨웠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재주를 부려 본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자신을 좀 더 잘 살펴보면, 여러분, 여러분도 정말로 그렇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하다보니 스스로 이런저런 모험담을 고안해 내고 삶 자체를 지어냈던 것이다. 이런 일이 나한테 얼마나 자주 있었던지, 뭐, 예컨대 아무 이유도 없이 일부러 골을 내기도 했다. 그것도 실상아무 이유도 없이 골을 내고 괜히 그런 체했다는 걸 나 자신이 더 알면서도 결국엔 정말로, 진짜로 골을 내는 지경으로까지 몰아갔다. 왠지 나는 평생 이런 장난을 치고 싶은 충동을느껴 왔고, 그래서 결국에는 나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그 다음번엔 억지로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괴로워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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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들어서자 북으로의 방문길이 열렸다. 복종 사용조총련과 그산하단체 및 조선학교 학생 대표단, 일본의 정치가들, 북과 무역처럼 편도 표만 손에 들고 가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조총련과 그 산하단체 및 조선학교 학생 대표단, 일본의 정치가들, 북과 무역 및 기술 지도로 연계된 릴본 기업, 재일코리안 기업, 친선 교류 목적 예술단 등 단체 방문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조총련과 산하단체는 사상 교육을 위한 강습회를 활발히 열었다. 단기 강습회는 2주장기 강습회는 3개월간 북에 체류할 자격이 주어졌다.
어머니도 총련 산하 여성 동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방문했다. 아들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장기 강습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대표단 방문이나 강습회의 경우, 부모 자식 사이라고 해도 호텔에서 짧은 면회만 허락되어 오빠들의 실생활을 차분히 들여다보기는 어려웠다.
이윽고 어머니는 북에 있는 가족과 친척을 만나기 위해 ‘가족방문단‘을 신청하게 되었다. 가족 방문단은 체류 기간 대부분을 가족이   원산 아파트에 머물면서 북의현실을 알게 됐다 - P38

2004년 봄, 나는 어쩐지 긴장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있다가 ‘지금밖에 없다!‘ 직감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까지 꼬여버렸다.
‘세 명 전부 보내서 후회해?" 갑자기 물어보자 침묵이 흘렀다.
될 대로 되라지 생각한 순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미 가버린 건 별수 없다 싶지만, 그, 가서...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려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내 귀를 의심하면서 신중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타임캡슐을 타고 북송 사업이 활발했던 무렵으로 돌아가서 목차를 훑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아버지 연세가? 아들들을 보냈을 때, 아버지는 몇 살이셨죠?"
"몇 살이었으려나…………"
"지금부터 32, 33년 전이면 아버지가 43, 44세?"
"당시 전망이라는 게, 재일조선인 운동이 제일 앙양하던 시기이기도 하고. 문제가 다 잘 풀리는 쪽으로 보았으니까. 안일했지......."
아버지의 솔직함에 놀랐다. 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줘서 고마웠다. 아버지, 그리고 활동가로서 금지했던 문장을 꺼낸 이유는나를 향한 신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딸에게 약해진 나머지 마치에 홀린 것이었을까. 촬영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죄송하고 또 고마웠다. 이걸로 영화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 P92

"내일 인사하러 올 아라이 카오루 씨가 엄청 긴장했다. <디어평양)을 여러 번 봐서 ‘일본인은 안 돼!‘ 하고 쫓겨날 각오를 했대. "나는 카오루가 방문하기 전날 오사카에 먼저 내려가서 어머나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다.
"쓰루하시시장 정육점에다 내가 닭고기를 주문해놨어. 마늘온 오늘 다 까놓고, 내일 아침 일찍부터 고아야지, 점심에 먹을 수있게 준비하면 되겠지?" 깜짝 놀란 나는 일본인이어도 괜찮냐고,
다시 한번 다짐을 받듯이 물었다.
●사실 그런 건 상관없어, 좋아하는 사람이랑 맺어지면 되잖아 어머니가 말했다.
"뭐예요. 그거. 그럼 좀 더 진작 말해주지. 예전이랑 말이 다른
"나는 울면서 웃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뭐 한마디 하셨을지도 모르지만, 사물이 인성이 중요하니까.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자. 돈이야 벌면 되지만 성격은 바뀌는 게 아니야." 어머니는 기뻐 보였다. 당신이 이 - P169

어머니는 도중에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사위, 영희 남편입니다"라며 카오루를 자랑했다. 카오루는 수줍게 머리를 숙이며 ‘아라이 카오루입니다. 일본인 남편입니다. 자기소개를 했다. 그때마다 상대방은 눈을 크게 뜨고 "어머, 그래!"하고 놀랐다. 설마 어머니가 일본인 사위를 자랑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재일코리안인 이웃은 "이제 시대가 달라졌는데, 본인만 좋으면 됐지"라고 했고, 일본인인 이웃은 "잘 모르겠지만 잘됐다"라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직 혼인신고도 안 했지만, 뭐 어때‘ 생각하면서 두 사람을 카메라로 찍었다. 촬영하는 나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 P172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서 어머니가 지금까지 둘러준 이야기라도 카메라 앞에서 다시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정취자가 딸이다 보니 어머니와의 대화는 편집상 ‘사용할 수 없는‘ 앱터뷰가 되기 일쑤였다. 그 점에서 새로운 가족에다 하물며 일본인인카오루에게 말할 때는 나에게 보여주지 않는 정중함까지 더해져, 아주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카오루가 자유기고가라 취재와집필을 해온 것도 한몫했다. 오사카에 가기 전 재일코리안의 역사와 제주4.3사건에 관한 책을 탐독한 그의 적확한 질문에 어머니는점점 적극적으로 자신에 대해 털어놓았다.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어린 시절부터 이야기하던 어머니는 제주4.3사건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다. 기억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안에는 오랜 세월 봉인해온 기억, 말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할 만큼 비장한 기억도 있었다. 가슴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무거운 돌을 여럿 올려두었던 기억의 뚜껑을 카오루와 내가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족이란 혈연이 다가 아니다는 사실을 절절히 믿게 되었다.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기능하는 관계성이 있어야 집합•체가 비로소 가족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기억을 공유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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