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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어머니가 죽었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아버지는 딸의 짐을 정리해 보냈다. 딸의 기대와는 달리 무사히 도착한 25kg짜리 박스 여섯 개에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입양된 딸의 유년시절이 담겨 있었다. 양부모와 함께한 시시콜콜한 추억과 친모와 포대기에 싸인 아기, 즉 딸 자신이 함께 찍힌 사진까지도. 여태까지 자기 이름이 왜 카밀라인지 궁금해 하던 딸은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된다. 사진의 배경에 동백꽃이 흩뿌려져 있으므로. 카멜리아(camellia flower), 동백, 카밀라. 딸은 여섯 개의 박스에 담긴 것들에 대해 글을 썼고, 우연한 기회에 글은 책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의 제의를 받고, 딸은 어머니를 찾아 모국에 들어온다.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진남. 그곳에서 이야기가 시작하고 또 끝난다.



  바다를 건너 고향을 찾은 딸을 맞은 것은 의뭉스럽게 속내를 보이지 않는 진남 사람들이었다. 17살에 딸을 낳은 어머니는 진남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진남여고의 교장은 딸에게 열녀비를 보여주며 진남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잘못 알았을 거라고. 서류도 믿을 수 없다고. 그런, 학교 재학 중에 아이를 낳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학교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게 된 딸은 지역 신문에 인터뷰를 싣는다. 그제야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스멀스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머니는 진남여고에 다니고 있었고, 17살에 딸을 낳았으며, 이듬해 자살했다. 딸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오빠, 그러니까 큰삼촌이라고도 했다.

 


  어머니는 늘 고독했다. 타인과의 간극이 가장 넓은 이는 어머니 당신이었다. 부당한 대우와 질투, 오해와 이해관계에 따른 희생은 모두 어머니가 감당해야 하는 짐이었다. 어머니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위태로워졌다. 누구보다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어머니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 발 디딜 자리를 잃어버린 어머니는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는 자살이며 또한 타살이기도 하다. 이십여 년이 지난 뒤 어머니의 동창은 말한다. "우리가 걔를 죽인 거잖아."



  어머니가 딸을 낳기 전 낙태를 권하기 위해 어머니를 찾은 다른 동창은 어머니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사람과 사람이 통할 수 있는 때는 아주 잠시뿐이다. 보통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은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날개 같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접근법이 필요하다. 평생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지 못한 어머니는 그래서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날개. 그것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분명한 날개를. 날개의 사명을 띤 딸은 어머니의 메신저다. 따라서 딸과 어머니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이다. 평생 단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어머니의 흔적을 좇는 딸이 느끼는 고독은 어머니가 느낀 고독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딸은 그 고독을 고독이라고 소리 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일이었다. 동시에 딸은 어머니를 둘러싼 인물들의 고독을 읽어낸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고독하지 않은 자는 없다. 우리 모두 차고 넘치는 값싼 고독에 지쳐있듯이. 어머니의 동창이나 몰락한 가문의 적자가 느끼는 고독은 어머니가 느끼는 고독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또한 관계 속에서 고독하기 때문이다.


 

  이미 죽고 사라진 어머니는 딸을 바라보며 말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메신저인 딸은 어머니에게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어머니의 아버지에게 보내던 모스 부호 HOPE와 마찬가지로. 딸을 바라보는 것은 어머니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한편, 끝내 내려놓지 못한 책임이다. 어머니에게는 최후의 전언을 맡은 딸의 끝을 바라봐야 할 의무가 있다.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딸과 어머니, 어머니와 딸은 입을 모아 외친다. 도와달라고. 누군가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그토록 먼 길을 힘들게 돌아와야 했다면, 그 누군가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그럴 필요가 없으며, 그러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언젠가, 내가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멀고 길게 돌아갈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당신의 고독은 같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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