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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한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의 첫 장편소설, [시간의 계곡]을 읽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 카피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열여섯 살 한 소녀가 자신의 학창 시절에 겪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진로를 스스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주인공 ‘오딜 오잔’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늘 왕따로 지내다가 우연한 계기로 ‘에드메’와 특별한 우정을 쌓게 된다.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의 친구 관계가 어른이 되어 가는 삶의 태도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우정, 사랑, 오해, 질투와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우는 시기가 학창 시절 아닌가.
미래로 부터 방문한 친구의 부모를 목격한 오딜 오잔은 에드메의 죽음을 미리 알게 되지만 자신이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 버린다.
그로 인해, 졸업 후 최고의 권력을 갖게 되는 고위 공무원직 자문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실습을 중도 하차해 버리고 가장 하급 단계인 헌병의 길을 선택한다.
20년 뒤, 그녀는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현재에서 20년 뒤 미래의 모습은 또 어떻게 변화될까?
우리가 과거나 미래를 갈 수 있다면 내 인생을 지금과는 다르게 바꿔놓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저런 공상을 하게 된다.
그동안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나 미래를 얘기하는 SF장르는 영화 ‘인터스텔라’ 처럼 우주 어딘가에 지구와 같은 외계 행성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기본으로 했는데, 이 소설은 지구 안에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이 공존한다는 설정이어서 매우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것도 이틀 정도만 험한 산길을 걸어가면 계곡 건너편 서쪽으로는 과거 20년 전을, 동쪽으로는 미래 20년 후를 직접 볼 수 있다니…
이틀은 너무 짧은 거리 아닌가? 싶지만 드라마 ‘도깨비’에서 문 하나만 열면 서울에서 캐나다로 이동하고 나이도 10년쯤 더 먹은 주인공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물리적 거리는 큰 의미가 없게 된다.
어짜피 초현실적 가상 공간이니까.
하지만 과거나 미래로의 방문은 현재의 삶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어 철저한 규칙으로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과거로 방문하는 경우 어린 자식이 사고로 사망했을 때 부모의 상실감이 너무 커서 과거 그 아이가 살아있던 모습을 보기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면 자문관들이 심사숙고해 방문 여부를 결정하고 경계 철책에 근무하는 헌병을 대동해 마스크를 낀 채 멀리서 잠깐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미래로의 방문은 곧 태어날 손주를 보지 못하고 죽을 병에 걸린 노인이 죽기 전에 미래를 방문해 자신의 손주 모습을 미리 보는 식이다.
말도 안되는 설정이지만 A.I.가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고 하늘을 나는 자율주행차가 나오는 등 그동안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일들이 현실화 되는 것을 보면 이 또한 어쩌면 가능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내용은 과거나 미래를 철책 하나 너머로 드나들 수 있다는 점에서 좀 섬뜩하지만, 자연의 사계절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한 섬세함과 인간 관계에 따른 심리 묘사가 참으로 탁월해 SF임에도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공감되는 문장들 >

책에서 봤을 때는 질투가 분노처럼 뜨거운 감정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질투는 뜨겁다기보다 메스꺼움과 절망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공허하고 자학적인 감정이었다.
p125

어쩌면 꿈도 생명체처럼 크게 키우려면 보살핌이라는 품이 필요할지 모른다.
약간의 격려로 흙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내 꿈은, 이제 작은 새싹처럼 빛을 향해 스멀스멀 뻗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