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모르면서
남덕현 지음 / 빨간소금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남덕현의 질펀한 충청도 이야기를 읽는다.충청도의 힘에서 읽힌 수수한 이야기들이 갖는 힘, 슬픔을 권함에서 읽힌 슬픔. 유랑에서 읽힌 섬세한 결, 이 모든것을 읽었어도 읽지 않았어도 한 치 앞도 모르면서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스며있다.

해학과 풍자라고, 향토어로 쓰여진 현장감, 요즘 말로 '웃픈'이야기라고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까르르 웃고 넘기게 되는 엉뚱함과 발랄함. 대부분 어르신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튈지 가늠이 되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은 긴장감마저 갖게 한다. 작가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저 주고 받는 이야기들을 듣고 서술하는 것이 아닌, 그 이야기가 그려내는 큰 그림을 보아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써내는 진심. 웃음이 지어지는 건 바로 그 대목이다.

 

충청도가 아니더라도 어느 곳에서든 만날 수 있는 오랜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흔한 이야기다. 그냥 허투루 뱉어지는 말이 아닌 삶의 문제, 현실의 문제, 관계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글. 덮어놓고 윽박지르듯 사설을 풀어내는 것이 아닌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귀가 만들어내는 나름 장엄하고 진득한 앙상블인것이다.

먼저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랬다.

너무 웃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충청도 사투리가 이렇게 맛깔날지 몰랐다. 등등..

 

그의 전작들을 읽은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나는 자꾸 슬프고 아팠다.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눙치듯 뱉어내는 말들이 사무치게 들렸던 것이다. 어디가서 쉬이 하지 못할 말들, 가슴 속에 응어리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말들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나 신명나게 풀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어디서든 언제든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비나리처럼 읽혔다.

 

방 안 가득 튀밥을 허옇게 흩뿌리고 손끝에 침을 발라 꼭꼭 찍어 먹는 손주년을 보며 외할미는 입버릇처럼 그랬다.

'저기 이 세상을 우예 살아갈끼고, 천지를 모리고 깨춤을 출낀데..한 치 앞도 모리는걸 우야면 좋겠노.'

할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떤 걱정인지도 모르는 해맑은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손주년은 그저 튀밥만큼 뽀얗게 웃으며

'잘 살꺼야'했다.

누군들 살아온 시간 속에 소설 같은 이야기 한자락 꺼낼 것이 없을까? 누구에게나 기구하고 누구에게나 아득한 삶의 공평성(이런 것에 있어서만..). 어디가서 딱히 꺼내기 어렵고, 꺼내기 거시기하고, 꺼내기 매깔스럽고, 꺼내기 민망해서 장~다물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있다면 고해성사하듯 주절주절 이야기할게 뻔하다.

듣는 귀 앞에서 신명이 나는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일거다. 열심히 들어주고 끄덕여주는 고개, 한마디씩 거들며 이야기를 끊기지 않게 부추기는 입까지 있다면 더 없이 좋을게다.

부지런히 이야기하고 부지런히 들은 세상에 더없는 '사람'의 이야기. 너와는 조금 다르고 나와도 조금 다르지만 결국 맹탕처럼 한 치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애틋하다.

 

저절로 리듬을 타게 되고, 저절로 장단을 두드리며 읽게 되는, 충청도식 그루브. 충청도식 라임.

한 치 앞을 모른다한들 뭐 대수겠는가.

아주 예전에 은하철도 999라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불렀던 가수가 그런 노래도 불렀었다.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그래도 가끔 알고 싶긴 하다. 정말 재미 없는지..

 

 

"잉 사램이 한꺼번에 다 울구 마는 게지, 슬플 때마덤 새루 우는 중 아남? 사램 사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구, 애통이구 절통이구 난리를 치나마나 다 빤한 일인디, 뭐가 맨날 새루 슬프다구 그때마다 새루 눈물이 난댜? 사램이 맨날 새루 우는 중 알지만서두 내가 볼 띠는 한번이 다 울구 마는겨. 울기는 다 울었는디 미련이 남아설랑 차마 다 못 떨구구선 장 매달구 사는게지. 우는게 일인중 아는디, 우는 건 일두 아닌겨! 매달려 있는 눔의 거 미련 읎이 다 떨구구 가는게 일이지.(....)"

"그랴 사램 한핑생 사는 게 헛비에 헛꽃 피구 지는 건디, 헛으루 우는거맨치 대간헌 일이 또 읎네.(....) 필요헐 띠마다 한두 방울썩 얼굴이다 지리다 간다 생각햐. 헛눈물에 고연히 헛심 쓰지 말구"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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