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문예중앙시선 46
박지웅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고래와 함께 걸었다>

겨우내 눈만 싣고 다니던 트럭
동네 뒷 길에 버려져 큰 눈 맞더니
흰 고래가 되었다

무엇을 저리 애달피 부르는가
밤하늘 길게 가르는 고래 울음소리

얼어붙은 늑골을 쓰다듬으며
먼바다 어디 있었다는 고래의 땅을 떠올린다

고래는 뭍에 제 무덤을 만든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걷고 싶었던 것이다

고래의 눈 안에 눈 내리고
상현달 아래 이동하던 식구들과
먼 외계로 날아간 어미 고래와
별과 별 사이에 힘찬 물줄기들

눈 속에 펑펑 내리는
희디흰 깊이에 나는 곧 묻혔다
그해 겨울에는 나도 아름다웠다

나는 고래와 함께 걸었다.

(시집 .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 박지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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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던 시인은 사실 고래와 함께 걸었는지도 모른다. 구름같은 고래와 무덤 같은 집 사이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시집을 맹탕하게 읽다 '고래'라는 단어 앞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하듯 움찔거렸다. 
이별과 무덤과 죽음과 슬픔과 이승과 영혼이 나비처럼 가볍고 아득하게 팔랑거리는 시집. 나비의 팔랑거리는 날개짓이 가볍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Adagio 싸인을 날개마다 적어넣은 것이 제 죄도 아닌데 ..
몇 해 전 골목 안 깊은 곳에 누군가 버려둔 승용차 한대가 있었다. 찌그러지고 더러운 차는 번호판조차 떼어진 채 버려져 있었다. 손가락을 잘린 채 살해당한 사체를 떠올렸다. 신원조회가 안되는 사체. 누구의 것이었는지 확인이 안되는 자동차. 그 해 겨울 폭설이 서너번 내렸다. 십 몇년만에 보는 눈. 동네 꼬마들과 눈사람을 만들러 골목 안 까지 들어갔을 때, 흰 눈을 덮어쓴 러시아 여자의 모자 같은 그 차를 만났다. 흰 무덤같은 차. 묘비 하나 세우지 못한 가여운 무덤 앞에 눈 사람 하나를 세워주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 기억이 떠올라 손이 시려웠다. 
시린 손가락엔 나비가 앉지 않았고, 내 기억과 닮은 풍경이 어딘지 '극적인 구성'인 듯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고래로'라는 도로명을 가진 곳에 살고 있다.
고래는 이 길로 다니지 않는데...

네모와 동그라미가 맨질맨질하게 만져지는 시집의 감촉이 좋다.

 

뱀발 : 시인의 태몽은 고래였다고 했다. 이 시집의 제목이 "고래와 함께 걸었다"로 정하려했으나 전작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와 비슷해서 뒤로 밀렸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많은 시 중에 이 시가 눈에 들어왔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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