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녀의 일기
옥타브 미르보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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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으로, 보불전쟁 이후부터 1차 대전 발발 전까지의 프랑스를 가리킨다. 낙천적인 낭만의 시기, 경제적 번영과 과학 기술의 발달 속에 파리 만국박람회까지 열렸으니 당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어떠했겠는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마리옹 꼬티아르가 선망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옥타브 미르보는 이러한 낭만적 분위기에 찬물을 뿌린다. 『어느 하녀의 일기』를 통해 벨 에포크의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부르주아 가정에 하녀로 취업하여 그 실태를 고발한 잠입 르포 같다. 하위계층 여성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소설의 도발성은 '하녀'라는 단어가 주는 뭔가 불순한 느낌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일기는 셀레스틴이 메닐-루아에 도착한 9월 14일부터 그곳을 떠나는 11월 28일까지 이어진다. 셀레스틴은 브르타뉴 출신으로, 어부였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유분방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타고난 영리함으로, 여러 가정을 거치며 노련한 하녀가 된다. 현관을 들어서면 그 집의 재정, 주인의 성품, 하인들의 노동량과 질, 그 자신의 위치까지 금세 알아차릴 정도다. 그녀의 특이성은 날씬하고 예쁜 외모에 깃든 당당함에 있다. 파리에서 문화를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성적으로 콧대가 높다. 한마디로 기품이 있는 하녀다. 반면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며 함께 즐길 용의도 충분하다. 매력적인 셀레스틴 앞에서 평가를 피해갈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둥이지만 부인에게는 꼼짝 못하는 랑레르 씨와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랑레르 부인을 모시게 된 셀레스틴은 이 시골마을이 감옥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지난 세월동안 일했던 가정과 주인들을 회상하게 되는데 그 면모들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가증스럽다. 졸부에 변태, 비열한 부르주아들은 하나같이 인색하다. 그들에게 하인이란 인간이 아닌, 제3의 부속물 같은 존재다. 하인들은 잠재적인 도둑이며, 그들의 노동력은 월급 이상으로 뽑아내야 한다. 하녀가 임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비가 주인 나리건 뜨내기이건 임신한 하녀는 쫓겨난다. 가정을 위해 일하는 고용인 부부도 임신이 허락되지 않는다. 기른 작물들이 썩어갈 지라도 하인들에게는 나눠줄 수 없다. 게다가 밖으로 나도는 아들을 붙들기 위한 정부로 하녀라면 싸게 먹히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다고 하인들이 당하고만 있을쏘냐. 주인의 눈을 피해 제 잇속을 차리고 재산을 불린다. 앞에선 굽실거리지만 뒤에선 조롱한다. 어떤 주인들은 어수룩해 하인들에게 이용당한다. 글을 읽으며 독자는 특히, 하녀라는 직업의 취약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녀로 일하기 위해서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야 한다. 일을 구하는게 급해 모든 조건을 수락하면 노예처럼 부려지다 쫓겨난다. 추천장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소개소 주인과 고용주들의 태도를 잘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이 난관을 거쳐 소개소를 나서는 순간 그녀들을 유혹하는 포주들이 따라 붙는다. 포주들의 감언이설을 떨쳐내고 드디어 취직하면 주인 나리와 마부, 배달부 같은 남자들의 유혹이 기다린다. 변덕스러운 주인의 손짓에 해고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정말 오갈 데 없는 하녀들이 머무는 수녀원은 더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하녀들의 노동은 착취당하며 빚은 더해간다. 노련한 하녀일수록 놔주지 않는다. 일할 만한 가정을 소개해주더라도 주인과 이미 얘기가 끝나, 수수료를 뗀다. 이 착취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다.


이렇듯 해외 식민지에서의 제국주의는 본토에서 하인들에 대한 착취로 나타났다. 셀레스틴을 내세워 부르주아와 정치, 종교 그리고 하인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고발한 미르보는 허위로 가득한 세계 자체를 규탄하고 있다. 이런 시대가 어떻게 벨 에포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문화적으로 풍성하고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두운 면들, 일상 속의 희생들은 들여다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이러한 융성과 자부심 아래 깔린 교묘한 민족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우리의 도발적인 하녀도 하류 인생을 벗어나지 못한다. 절제와 무절제, 그 사이의 긴장과 허영을 즐기던 그녀는 카페의 여주인이 된다. 주인나리의 유혹도, 이웃집 대령의 유혹도 잘 견뎌냈건만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그 남자 때문에 성을 상품화한다! 그에게 이용당하면서도 행복한 셀레스틴은 그토록 조롱하던, 하인을 부리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백년이 지난 지금 봐도 부르주아의 호색은 외설적이며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하층민, 노동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과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다. 미르보와 졸라, 두 지식인은 모두 프랑스의 국론을 양분했던 드레퓌스 사건에서, 親드레퓌스 진영에 섰던 인물이다. 평론가이자 예술 애호가로서, 미르보가 알리고 찬미하고 옹호한 문인, 화가, 조각가들은 아주 많다. 대표적으로 모네, 세잔, 고갱, 고흐가 있으며 조각가 로댕, 클로델, 마이욜이 있다. 아카데미 공쿠르의 회원으로서 발견한 메테를링크의 이름은 소설 속에서도 등장한다. 그 외에도 레옹 블루아, 쥘 르나르가 있고, 크누트 함순과 입센이 프랑스 내에서 인정받는데도 한 몫 했다. 미르보는 세상은 천재를 참아내지 못한다며 파리 살롱의 등단 형식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의 신랄한 혀가 그려낸 『어느 하녀의 일기』는 영화로 세 번 제작되었으며, 잔느 모로가 열연한 루이스 부뉴엘의 작품이 유명하다. 그리고 올해 개봉한 레아 세이두 주연의 작품이 있다.


(미르보에 관한 부분은 위키피디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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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 2015-10-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매력적이고 당당한 하녀로군요ㅎ 읽어보고 싶어요!! 목로주점도 함께 ㅎ

에이바 2015-10-06 17:16   좋아요 0 | URL
목로주점은 서사성이 강하면서 대를 이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리즈물 중 하나라 스케일도 큽니다. 미르보 작품은 분류하자면 르포물이지요.

다락방 2015-10-0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엇, 에이바님의 리뷰닷! 하고 달려왔어요. 역시나 읽기가 즐거운 리뷰입니다. 저 이책 있는데(뭔들 없겠습니까..), 역시 읽지 않은 책으로 존재... 읽고 싶은 생각을 부채줄해주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에이바님!

에이바 2015-10-06 17: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책이 생각보다 쉬이 읽히는데 중후반쯤 이르면 온갖 군상들의 끝없는 위선에 좀 질린다고 할까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