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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서 


 죽음의 종류가 있다면 그 중 살인은 가장 기묘한 방식의 죽음이다. 죽음이라기보다 죽임 당함, 이라고 해야 옳을 이 애매모호함은 전반적인 살인의 성격이다. 예컨대 죽임당하는 '나'의 의지가 개입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인자가 행위 자체를 온당히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죽음은 온전히 죽임당하는 자의 것이니까) 어쨋든 죽이는 자는 사라지게 한다는 점, 죽는 자는 사라진다는 점을 봤을 때 그 의지는 온전히 죽이는 자에게 있다. <파과>에서 살인을 하는 자의 이야기가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늙어가는, 다시 말해 사라져가는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게 문제다. 소설이 시작할 때 조각은 처음 방역을 하는데 그 이후에 성공하는 방역이 없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택시기사는  어린 나이에서 부터 방역을 시작해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될 때까지 방역을 한다는 것은 소설에서도 나와있듯 그녀에게 일반의 도덕이 없을 뿐더러 공감의 능력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 사라져간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도덕은 아닐지라도 공감하는 능력이 생긴다. 그녀는 복숭아를 통해, 늙은 개를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이 인식은 철저하게 방역 대상 외에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그녀만의 규칙을 깨게하고 지켜야할 것을 만들지 않는다는 류의 규칙마저 깨버린다. 어느 순간부터 방역을 그만 둘 변명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곧 사라짐에 대한 저항으로 보여진다. 조각이 강 박사에게 보여주는 이상한 감정(사랑이라고 하기에도, 류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이상한)은 감정 그대로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계속되는 방역에 대한 탈주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감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또 다른 인물, 투우의 등장으로 소설은 점점 복잡해진다. 예컨대 조각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 그를 묘사하는 대목은 젊은 조각을 묘사하는 부분과 흡사하고 그것은 '지금 늙은' 조각과의 차이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그의 캐릭터는 애매모호한 느낌이 없지않아 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킬러임과 동시에 조각과의 만남에서는 온통 감정 투성이다. '그녀 때문에 방역을 시작하지 않았다'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각을 의식하고 마지막의 죽음은 마치 그녀의 기억을 복기시키기 위한 작업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결국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직업특수상 생기면 안 될 감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게 미묘하게 인간의 본질과 맞아떨어진다. 팔이 잘린 조각과 죽은 투우는 불행했을까, 라는 질문에 쉽게 그들이 불행했을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불행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게하다니. 죽고 죽이는 진흙탕치고는 물이 깨끗한 소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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