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균열이 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예시를 접할 때다. 우리는 발화자의 가치관이 가득 담긴 직설적인 ‘말’보다는 그 말을 한 사람의 표정과눈빛, 제스처, 실제 행한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발화자가 하는 말의 내용보다, 그가 걸어온 인생 행로를 눈여겨본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며 살아온 부모가 자식에게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라고 하면 자식이 마음속으로 코웃음을치는 이유다. 동양 격언에 언행일치를 강조하는 수많은 격언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입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중요한 건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이다.
소설을 읽지 말라는 이들은 궁금할 것이다. 대체 그 쓸데없는 걸 왜 읽는단 말인가? 이런 물음에 소설을 읽는 이들은 간단히 응수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서우리는 저마다 자기 몸 안에 갇혀 있기에 다른 사람이 될 수없다. 하지만 잘 쓰인 소설을 읽으면,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경험에 매우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소설을 읽지 않았으면알지 못했을 타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체험한 타인의 인생은 알 수 없고 두려운 내 인생 행로에환한 가로등 불빛이 되어준다.
그러나 시종일관 설명만으로 일관하면 독자에게 가독성도, 재미도 주지 못하고, 감정이입도 유발하지 못하리란사실을 알기에, 소설가는 가급적 보여주기를 많이 하려고노력한다. ‘고전‘으로 회자되며 몇백 년 동안 끈덕지게 읽히는 소설들에 유독 몇 장씩 이어지는 공간 묘사나 기후 묘사, 인물의 외양 묘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공간과 기후와인물의 외양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여줄수록, 소설가가 내세운 장소와 기후와 인물이 ‘진짜‘처럼 체감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사람‘에 관심을 갖고 해오던 다양한 상상들이어느 순간 화면으로 옮겨졌고, 그것이 내가 쓴 첫 소설이 되었다. 평소 해오던 수많은 상상 속 이야기들 중 하나가 언어라는 형체를 입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소설가들은 대부분 ‘남의 얘기‘에 관심이 많다. 자신과특별하게 연결되지 않은 사람의 사연에도 지대하게 관심을갖고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카페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기울이거나, 친구의 먼 친척에 관한 이야기에도 흥미를 보인다. 수많은 타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언제나 민감한귀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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