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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읽고...
문장의 끝은 무엇 이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소설집을 덮으며 한참동안 작가가 낸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생각했다. 소설을 읽기 전엔 절반만 읽더라도 여타의 다른 소설집들처럼 작가가 어떤 의도로 소설집을 냈는지 파악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김영하의 13개의 단편소설들을 의기양양하게 읽어 나갔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 달리 절반을 넘게 읽어도 마치 소설을 읽는 내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처음부터 믿었던 13개의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찾아 낼 수 없었다. 아니, 몇몇 단편 소설은 지금 나의 독해력으론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의 소설도 있었다. 결국 서평을 쓰기 위한 소설읽기를 관두고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두 번을 읽어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소설이 있었는데도 신기하게 13개의 소설은 마치 한 호흡의 문장들인 것처럼 쉽게 읽혔다. 이것이 전문가들이 말하는 문체가 가진 힘인가 할 정도의 필력이었다. 그렇게 감탄과 소설의 어려움에 대한 약간의 짜증을 간직한 채 항상 가지고 있는 버릇처럼 작가의 말을 맨 마지막에 읽어나갔다. 그리곤 그나마 어느 정도의 안도를 했다. 작가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 할 수 없었던 것은 김영하의 신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가 어떤 의뢰를 받고 한 번에 쓴 것이 아닌 작가가 일상생활을 하다 문든 생각이 난 상념들을 소설에 여유롭게 풀어냈기 때문이었다. 또, 내용은 어려웠으나 그토록 쉽게 글이 읽혔던 것은 작가마저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필력으로 쓰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흐르는듯한 개인의 머릿속 상념의 강 속에서 어떤 소재를 포착해 소설로 녹여내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누구나 이해하는 속도도 다르고 이해하는 정도도 다른 소설에서 하나의 키워드를 찾아내어 공개하려한 나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소설의 해설집을 내는 듯한 느낌으로 서평을 쓰고 싶었던 나는 책의 제목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독자였다. 김영하의 머릿속에 들어가 본 적도 책이 출판되는 일련의 과정 중 단 한부분이라도 알고 있지 않은 내가 소설의 해설집과 같은 서평을 발표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던 것이다. 몇 해 전, 수능에 조세희 선생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제 되었었다. 그 해 수능이 있기 전 조세희 선생은 '만약 수능에 내가 출판 한 소설이 나온다면 나는 그 문제를 모두 100% 맞추기 힘들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세세히 파악해 분석하고 정의해버리는 일련의 병폐들이 만연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처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마음먹으면서 기존의 사람들이 했던 그러한 병폐를 나역시도 그대로 답습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김영하 인것처럼...
소설을 쓴 작가가 아닌 이상 절대로 알 수없는 그 부분까지 파악한 독자처럼 서평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의 뒤에 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문장을 내가 생각한 하나의 문장으로만 강요하는 병폐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좀 더 다른 접근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믿지 않게 된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들처럼 하나하나의 소설에 하나하나 세세한 분석을 하기 보다는 작가 김영하가 이 소설을 쓴 것처럼 그저 글을 읽으며 느낀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라는 이름의 소설집을 읽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의 생각을 적어 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마치 다 아는 사람인 양 행동을 한다. 소설 [퀴즈쇼]에 등장했던 동국의 어머니처럼 말이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동국의 어머니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사실 관심이 없다. 그저 그 사건이 불러일으킬 대중의 관심이 더욱 궁금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이 퍼 나르는 일들은 항상 누군가의 정의에 의한 진실일 뿐이다. [퀴즈쇼]에는 사람들의 정의 속에 갇힌 은이만을 알고 있는 동국이 등장한다. 동국은 그런 은이와 함께 나간 퀴즈쇼에서 자신이 패배해야만 정당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누군가에 의해 정의 내려진 은이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 동국이 몇 번 은이와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누군가의 정의에 의해 알고 있는 은이가 아닌 지금 새롭게 만나고 있는 은이에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마저도 자신의 동창들이 말하는 은이에 편견을 가진다. 그런 동국이 은이의 집에서 관계를 맺고 은이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알게 됨을 상징하는 동침이 은이의 쿨한 한마디에 깨진다. 관계 후에 함께 잘 줄 알았던 동국에게 던져진 말은 은이와 따로 다른 방에서 혼자 자라는 것이었다. 결국, 동국은 은이를 알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도 은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그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 실린 13편의 단편 소설들은 모두 이런 형태이다. 어떤 소설은 애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겠는 소설도 있고 처음에 확실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다 싶은 소설이 갑자기 '전혀 모르겠네' 라는 느낌으로 변모하는 소설도 있다. 또 한, [로봇]처럼 처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믿기 힘든 소설도 있다. 결국, 이러한 소설들은 누구도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 들인 것이다. 사실 세상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없는 불확실성의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깝게는 사랑이나 미움 그리고 누군가의 상상력들은 그를 제외한 누구도 알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아니,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뒤늦게 깨닫는 경우를 보면 자기 자신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 해도 될 정도이다. 이런 불확실성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너무도 억지스럽게 불확실을 확실로 만들어 믿어버린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심리나 행동을 모두 분석하려 하고 글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평론이나 서평이 쏟아지는 것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불확실에 대한 느낌은 제거해야 할 대상의 성질이 아닌 오히려 즐겨야 하는 성질의 것들인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마치 평론가처럼 세세히 분석한 서평에서 벗어나 그냥 느끼는 대로 읽어 보자라고 읽는 순간 확실하다고 믿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통쾌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내가 알 수 없는 주인공들의 감정에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공감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그 순간이 불안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실제로 [마코토]를 읽다보면 그녀가 그가 잡은 줄로만 알고 그에게 퍼부은 키스와 그가 그러한 순간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확실하게 분석하려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 키스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실 그 누구도 자신의 일이 아닌 다른 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김영하의 소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 들어갈 말이 모른다일지 안다 일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문맥상 모른다가 더 맞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느낌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아무 느낌도 가지고 읽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거짓말이 되기에 나는 스스로 김영하의 소설에 대한 정의 보다는 느낌을 말하려고 한다.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의 뒤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모른다. 그러니 알은 체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느껴라가 아니었을까... 그의 소설이 알은 체를 벗어나 느낀 것만으로 13개의 단편이 슬픔도 아름다움도 허무함도 기쁨도 느끼게 하는 재미있는 소설이 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