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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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 같지만, 일단 책을 읽기전의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이들 가족은 얼마나 불량한가! 라는 것이 가장궁금한 화두였다. 사실 문학에서 불량한 가족사야, 심심찮게 혹은 자주 등장하는 화두지만 청소년소설이라는 한정된 범위안에서 얼마나 불량하고, 또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리라.

이야기는, 학생들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하면서도 교육정책의 면에서 꽤나 등한시되는 도덕 이라는 과목의 선생님이 자서전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면서 시작된다. 자서전이라 함은, 그래도 나름 자랑할 거리라던가, 자신의 생에 자부심이 있는 이들이 쓰는 것일텐데 (그것도 때로는 대필작가까지 동원해서) 파란만장한 가족들 품에서 살고있는 여울이는 과연 어떻게 그것을 풀어낼 수 있을까?

자서전에 대한 여울이의 고민으로 인해, 대략적인 이 가족의 내력을 살펴볼 수 있다. 이미 두집살림을 차려놨던 할아버지에게 속아넘어갔던 할머니, 세 부인을 거쳐갔지만 결국 아무도 남지 않은 아빠, 그런 아빠와 크게 다르지않은, 정말로 길 잃은 기러기 신세가 된 삼촌, 첫째부인이 낳은-기저귀를 차고있어야만 하는 오빠-와 둘째부인이 낳은-배가 삼겹이 되는 언니- 그리고 셋째부인이 낳은-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고등학생 여울이. 게다가 여울이또한 고등학생 신분에, (나이트)클럽도 가고, 술도 하고 식권 위조도 해본..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팔순이 넘었지만 따발총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할매와 항상 충돌하는 언니로 시작하는 이 가족으로 인해 여울이는 언젠가 가출이 아닌 '출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울이가 충동적인 마음을 누르고 차근차근 출가를 준비하는 모습은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뿐만 아니라 대견할 정도였다. 사실, 이정도의 가족사였다면 나는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법한 가족사 아닌가? 그러면 사실 여울이의 참을성또한 보통의 현실에선 보기드문 인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내가 겪지않은 현실에 대한 오만함 이라고도 충분히 생각된다. 항상 현실은 허구보다 더 끔찍하니깐) 그 인내심의 근원은, 명민한 현실인식과, 고등학생의 선을 넘긴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는 좋은친구들, 그리고 코스프레 라는 것을 통해 잠깐씩 현실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던 점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파국이라면 파국이라도 할 수도 있는 어느 지점으로 치닫는 파란만장한 시기에, 여울이가 버틸수 있던 점들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그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에게 (매우 상투적인 표현으로 치자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조금은 불량한, 조금은 괜찮은 친구들

 여울이의 친구들과 여울이의 행동은 사실.... 못말린다. 음주를 하고, 나이트를 가서 춤을 추고.. 그럼에도 친구들과 여울이는 어떤 선을 넘지는 않는다. 한 멀쩡한 가정에서 본다면 어지간히 속썪는 일일테지만, 제각기 그 반항의 이유도 있음직한 그 친구들은, 소박한 탈선은 했을지언정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은 하지 않을줄 아는 현명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것들은 여울이가 콩가루 집안에서, 먼지처럼 떨어져나가지 않고, 가끔 바람같이 떠돌다가도 이내 돌아오고야 말게끔 해주는 좋은 버팀목이다.


현실의 캐릭터 벗기


 이야기의 중심 소재이기도 한, 코스튬플레이. 여울이에게 코스튬플레이는 자신이 주어진 가정의 한계를 잠시 벗어나는 일이었다. 현실이란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17세의 여고생이 아닌, 모두가 캐릭터 복장을 하고선 개인의 이력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코스프레의 세계에서 말이다. 여울이에게 이 세계는, 현실안에 존재하지만 현실의 바깥이기도 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코스튬플레이는 그렇게 현실의 도피이기도 하면서도, 먹먹한 현실에서 쉽게 거머쥘 수 없는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현실을 좀 더 '잘' 바라볼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밉다밉다 해도, 긴시간을 함께한 가족

 사실상 오빠와 삼촌간의 충돌은 거의 없다고 비교될 정도이지만, 아빠와 할머니, 언니와의 충돌은 여울이의 고백을 빌리면 정말 못봐줄만한 수준인데.. 그럼에도 여울이가 그들의 테두리에서 버틸 수 있던점은, 그들이 실은 따뜻했다, 라기 보다는 그들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여울이가 차차 조금씩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국엔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연은 끊지못하는 그들의 가족애(?) 를 통해 자신의 나아갈 길 또한 엿봤기 때문이리라.


꽉 부여잡고 있는 순수

 사실 여울이가 빗나가도 빗나가도, 아예 튕겨나가지 않을 수 있던 점은, 근본적으로는 여울이가 본질적으로 착하고 배려있는 심성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둘러싼 여러가지 험한 요건들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시도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장 드라마를 한편 본 느낌이다. 답답한 가슴을 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래층 계단 끝에 오빠의 파란색 티셔츠가 보였다. 오빠는 담배를 피우며 창너머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의 그 모습은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외로워 보였다. (127p)



이해를 시도하는 이야기..

사실 코스튬플레이는 나도 소싯적에 한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동경의 놀이였다. 지금은 사회적인식이 아주 약간 나아진 상태인진 모르겠지만 (사실 폄하하는 시선은 여전할뿐이고, 그것들을 다소 이해할 수 있는 세대들이 점점 사회에 발을 들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쨌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에서 그런 소싯적의 관심사를 발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 여울이는 코스튬플레이에 대해서 어떤 어려운 이해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은 자신에게 잠시 나갔다가 들어올 수 있는 비상구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했고, 여울이는 그것을 인정하고 꿰뚫어서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나같은 경우엔 그저 동경하는 만화캐릭터에 스스로 몰입하고, 삐까뻔쩍하고 뭔가 폼나는 그들이 부러웠을 뿐인데, 여울이가 코스튬플레이에 대해 갖는 생각은, 오히려 그때의 내가 부끄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여울이의 코스튬플레이에 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 할 거리가 많다. 여울이에게 그 놀이는 어떤 터닝포인트라고 부를정도의 힘은 없었을지 몰라도, 만만찮은 어떤 사유를 가능케 한 큰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엔, 천사옷을 입은 사십대의 아줌마가 있고, 여울이가 짝사랑했던 세바스찬이 있다.

코스프레 행사장에서 우연히 달라붙은 천사코스튬의 아줌아에게 추천받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를 읽고서 여울이의 반응은 이랬다.

"누군가 내게 묻는 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104p)

그럼에도, 후에 다시 천사코스튬의 아줌마를 다시 만났을때 여울이는 이렇게 깨달은점도 있다고 얘기한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남들이 관심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요. 그건 서로 사랑하라는 아주아주 고리타분한 교훈이기도 하죠. 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요,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데, 어른들을 보면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 (180p)

거기에 아줌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말이야, 어른이 되면 얼마나 말이 늘어나는지 아니? 말이 잔뜩 늘어나서 자기가 내뱉는 말들에 발목을 잡혀 얽매이게 돼. 말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그러다 보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마음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도 알고 보면 마음 깊숙한 곳에 사랑이 숨겨져 있어."(180p)

여울이의 깨달음은 지극히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씁쓸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어떤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조용히 거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에, 가족의 대부분이 '출가'를 하고, 아빠가 하는일은 이제 정말 '끝물'이 되어가고, 할머니는 양로원을 알아보러 다니는 와중에서, 아이는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얻은 깨달음이 아닌, 최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들의 연속적인 연결의 틈에서, 그녀는 가족에게, 사람에게 관심-즉 사랑의 가장 큰 표현방법 이기도 할- 이야말로 얼마나 서로를 지탱해 줄 수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의지할 수 있는지 조금씩 알아갔던 것이다.

천사코스튬의 아줌마 말마따나,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말에 갇혀버리는 지도 모른다. 많은 어휘와 수사를 배우면서 점차 타인의 말, 그보다 타인의 진심에 귀기울이는 법을 잃어버리는 것이이다. 오직 말로써만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다. 말로써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우리는 여울이네 가족처럼 끊임없이 오해하고 충돌하고, 안타까워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큼, 말이란것이 중요함은 간과할 수 없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런식으로 살아갈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에 어쩌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말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할지 모른다. 어쩌면, 현란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즉, 말로 표현하다 잃어버린 '진심의 표현법'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입을 통한 말'이 아니라 '마음을 통한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말도, 타인의 말도, 진심과 조금 더 닿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때야 말로, 한뼘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건 아닐까? 그러니깐 나는 여울이가 아주 대견하고, 여타의 어느 어른들보다도 낫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주는, 왕자님의 키스로 마법에서 깨어나... 한뼘 자라났답니다.

세바스찬을 향한 첫사랑의 실패는 여울이가 이미 예견했던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처한 가족이 현실처럼, 피하고, 피하고 싶었던 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바스찬 이라는 왕자는 결국, 키스로 인해서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 놓는다. 물론 세바스찬의 이런 행동은.. 단순 실패한 사랑에서 보자면, 못된 짓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그것을 통해서 현실바깥에서 자신을 위로해주던 판타지에서 깨어날 수 있던 것이다. (물론 다소 상징적으로 말이다) 현실을 좀 더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 책의 표현을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비록 그것이 판타지나, 여타의 현실과 괴리감 있는 경험을 통해서였을지라도, 현실이라는 산의 능선을 한바퀴 돌아서 올라왔다면, 비록 같은 방위에 서 있을지라도, 그곳은 전혀 다른, 더 높은 성숙함을 바탕에 둔 현실이 아닐까. 어쩌면 '성장'이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서 시작 할 테니깐.


그리고 그 '시도'는 우리와 항상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가족'이란 존재에게 먼저 드러서야 할 것이다. 여울이가, 자신의 '불량가족' 을 통해서 그 모습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여울이는 콩가루가 산산이 흩어진 가족위에서 다시 소생을 꿈꾸며, 자신의 엄마를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곧 신뢰할 수 있을테니깐.



파란만장 가족사,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혹은 17년 인생의 자서전)을 덮으며..

<불량가족 레시피> 는 놀랍도록, 소녀의 감수성이 극명하게 사실적으로 드러나있다. 어떨 땐 정말 (서사의 구조등이 아닌, 캐릭터의 대사나 생각의 표현을 미루어봤을 때) 이 작가, 정말 청소년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맨 뒤에 작가의 말에서 그 궁금증이 풀어진다. 작가는 직업때문에 청소년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들이 만난 청소년을 통해서 그들을 좀 더 가깝게 이해하고, 이 이야기를 써내려 갔으리라 추측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한 기성세대 작가가 쓴 이야기보다는, 파란만장 가족사를 지닌, 방황하는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 나아가 조금 특별한 17년간의 자서전 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한편의 소설이 아닌, 좌충우돌 그 시절 한 소녀의 솔직한 일기장을 엿봤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어느정도 의구심이 들때도 있다. 개인적 경험에 입각해보자면, 17세에 이렇게 성숙할 수 있나? 혹은, 이 가족을 정말 이뻐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 ... 그렇게 생각해보고 나니, 나의 청소년기는 왜 이렇게 성숙하지 못했는지 책망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보니 난 이만큼의 위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들만큼 고만고만했던 청춘은,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숙해질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솔직히 그 기회를 부러워하진 않겠지만..) 더욱이, 비슷한 환경이라면 나는 아마 이만큼 버티고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지구 어딘가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이런 비슷한 가정속에서 고민하며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이 책의 여울이만큼 조금 더 지혜롭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나는, '사회는 언제까지고 너희들의 환경을 측은해하지 않는다. 그러니깐!....' 이라고 밖에, 배부른 소리밖에 해줄 수 없지만, 그들을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이렇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일전에, 아는 초등졸업생 에게 여기 <불량가족 레시피>에서도 언급된 <홈리스 중학생> 을 선물해준 적이 있다. 이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대신 이 책을 선물해주었을 것이다. <홈리스 중학생>도 권장도서라 하니 좋은 책이겠지만, 이 책을 덮은 시점에선 조금의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아마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깐 그것은, '위태로운 가족안에서 타인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법' 을 만나는 것은.. 그 가족이 챙겨야 할일 일 것이다. 그 가족이 꼭 이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그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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