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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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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평가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누구나 그런 일을 해왔을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지키는데 충실하려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한다. 요즘 사회에선 특히나 자아의 생존능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이므로, 누구나 자아의 능력을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불안해한다. 그렇기에 현대의 많은 소설들은 ‘자아’가 주요하게 등장하여 세계를 멋대로 판단하고 휘젓나보다. 여기 작가의 가치관이 개입되기도 한다. 

언제부터 자아가 주인공이 되어 ‘소설’장르가 발달했는지는 모른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도 ‘자아’의 위력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자아’는 어떤 상황을 분석하고 해석하지만, 그 해석이 과연 진실과 얼마나 가까웠는가? 그리고 진실과 가깝지 않은 그 해석이 누군가를 어떻게 상처입히고, 나중에 자신에게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왔던가?

최정화의 인물들은, 자아의 내면이 발달한 인물들이다. 외부세계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존하여 세계를 다시 재배열한다. 그렇기에 판단한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 여겨지면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을 받는다. 그 균열은 사소한 판단에서 시작된다. 

 「구두」 의 경우, 주인공은 어떤 종류의 착각을 지속적으로 하는 듯 하다.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러 집에 온 여자가 자신이 되려 한다는 감각을 느끼고 계속 경계를 한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편하게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아무리 제안받았다고는 하지만 태연하게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식사준비를 도우려고 하며, 식사준비 하는 것을 극구 말리니 남편의 옆에 가서 자신이 부인인 양 TV를 보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주인공은 남편에게 그 가사도우미의 험담을 하는데, 그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꾸며낸 거짓말이다. 정작 남편은 가사도우미에게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도록 반응하여, 다시 안심하고 자리로 돌아오지만, 경계하는 주인공의 마음에 부합하려는 듯, 주인공의 구두를 그 여자가 신고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빼앗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주인공이 ‘선생님’이라 불리는 누군가에게 이 내용을 말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주인공이 누구든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여, 자신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느끼는 탓에 병원에 가서 ‘선생님’께 진료를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까지도 하게 한다. 그렇다면, 타자가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주인공이 홀로 병적으로 상상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왜냐하면 주인공의 입장에서 벗어나 그 가사도우미를 보면, 겉에서 보기엔 크게 주인공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았고, 침범했다가는 저지당했을 것이다. 구두를 훔쳐간 것은, 별개의 일로 볼수도 있는 일인데 굳이 연결시킨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주인공의 자아는 자아와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는 상으로 타자를 왜곡하여 바라보고, 자신이 있을 세계마저 없애버리려는 욕구를 가진 것이라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 

「홍로」 의 경우, ‘그녀’는 ‘그’에게 고용된 사람이다. 마치 부인처럼 모든 일은 하지만 ‘그’는 딱히 ‘그녀’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으며, ‘그녀’의 일을 댓가로 돈을 주는 게 전부다.  ‘그’에게 ’그녀’는 고용하기에는 적합하지만 결혼할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렇게 주늑들어 살던 ‘그녀’는 ‘그’의 필요에 의해 동창회에 나가게 되고, ‘그’의 필요때문에 거짓말을 시작하고, 그 거짓말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이전보다 생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현실은 아무것도 변한게 없어도 그녀는 그 환상세계 안에서 ‘그’의 부인이고, 잘 살고 있는 자식들을 둔 행복한 사람이다. 이 역시 자아가 현상세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간 부분이라 볼 수 있다.  타자와 소통해서 만들어낸 맥락이 아니라, 혼자만의 맥락 안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이 이루어진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서로 대화하지만 정말 대화하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서로의 영역을 감각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도 어디까지 가능한지, 어디까지 불가능한지 가늠을 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어떤 영역을 허용했다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상대를 잃어버리는, 「틀니」의 경우, 만약 세계를 자아의 영역으로 판단하여 좌지우지 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로 보인다. 자아의 호의때문에 벌어진 일이든, 자아가 못견딘다 여겨서 그런 일이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세계를 자신의 마음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더라면 상대를 잃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지극히 내성적인 이야기들. 지극히 일상적인 불안들을 잘 묘사한 그녀의 작품들은 대체로 재미있었지만, 두세 작품들은 피상적인 이야기에 그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도 쉽게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에, 인물과 함께 불안에 시달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때문인지, 재미가 덜했다. 이 이야기들이 인물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뭔가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까지 이어지기보다는 현상적인 이야기들에 그치고 있다는 점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런 점들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아의 사소한 판단이 개인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포착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묘한 차이로 사람의 판단이 변화한다. 그 사소한 판단이 스스로가 서 있는 자리의 지형을 변화시킨다. 소설 안에서 자극적이거나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해도, 불안은 그대로 전이된다. 그런 균열을 일상적으로 겪는 독자도 겪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대적인 균열을 잘 포착한다는 건, 지금 인간을 구성하는 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이야기로 풀어낼 능력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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