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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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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란 무엇일까? 내가 시중에서 본 자기계발서를 쓴 저자는, 일생의 일부분만 편집하여 소위 ‘성공’을 말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자기계발서의 한 유형인 위인전이나, 자서전(?)은 일생을 다룬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도,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미화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애초 ‘일생’을 다루려면 어느정도 편집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떤 책도 시간을 다루면서 이야기를 편집하지 않고 쓸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시중의 자기계발서나, 위인전, 자서전 들을 읽으면 정말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을 위하여 짜여진 것 같고, 그 이외의 그의 어떤 점들을 알기는 어렵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완벽한 모습일 때도 있다. 찌질하거나, 실패작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쓰거나, 그런 사람들을 다룬 이야기의 일부분을 읽고, 무엇인가 하고 싶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그 이야기들이 내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워서 그대로 살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그 사람들처럼 ‘성공’하면 허영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각자는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그동안 반드시 ‘먹고 살아야 하고’, 그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줄 것 같은 내용이 거기 적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신 하미드의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읽고 나면, 마치 그런 생존문제를 말하는 것처럼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대놓고 말한다. 실상은 자기계발서랑 달리 뭔가 생존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당신’의 일생만이 적혀 있다. 같은 아시아에 살고 있지만 한국과는 또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당신’의 일생을 읽으면, 부자되는 법을 알게 되기 보다는 ‘당신’이 생존해온 방식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할 뿐이다. 

거창한 부제들은 신랄하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상주의자를 멀리한다」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건 삶의 일부를 깎아서 사는 것 처럼 보이기에 내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이지만, 이 시대에서 생존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까.  「폭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는다」, 「관료와 친구가 된다」, 「전쟁 기술자들을 후원한다」, 이건 대놓고 ‘더럽게 부자가 된’ 사람들을 비꼬기 위해서 쓰여진 부제같다. 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들이 왜 일어나고,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 말하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래서 다른 형식의 자기계발을 독자에게, 독자를 통해 세상에게 호소하는 것이라 본다면, 이 소설을 자기계발서라 볼 수도 있겠다.
저자도 자기계발서 형식을 차용하려고 하면서, 자기계발서라는 게 무엇인지 고민한 것 같다. 사실 누구나, 일종의 자기계발을 하려고 글을 읽는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들은 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일할 뿐이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바로 여기에 독서의 풍부함이 있다.” p106 그래서, 이 소설은 독자에게 자기계발을 유도할만큼 유용할까? 이 소설 안에서 뭔가를 건저올릴 수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교육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는 도약대이다. 이것은 비밀도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좋은 것들이 늘 그렇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해서 쉽게 다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를 향한 길에는 가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향배를 좌우하는 건 선택이나 욕망, 노력 등과는 관례가 없는 순전한 우연이다. 당신의 경우 출생 순서가 그 향배를 결정한다. 셋째로 태어났다는 사실인 즉 조만간 시골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페인트공의 조수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또한 세상을 일찍 떠난 당신 집안의 넷째와는 달리 어느 나무 밑동의 조그만 무덤 속에 유골이 돼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사실 이점이 가장 중요하다.” p40

책의 화자, 즉 저자는 ‘부자’가 되는 조건으로,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을 꼽는다. 여기서 이미, 그는 ‘부자’가 되는 것이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 그는 자기계발서라 지칭하고서,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런 식의 부정은 초반에는 잘 이루어지지만, 후반부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제는 후반부로 갈수록 과격해지지만, 후반부로 갈 수록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면모보다는 ‘당신’의 인생이 어떤 역경을 거치는지 보여준다. ‘당신’의 아내는 ‘당신’이 아내가 가장 힘들었던 때 홀대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아들이 성인이 되자 떠나기로 결심한다. ‘당신’은 뒤늦게 아내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아내의 남동생을 고용하나, 나중에는 그를 신임하게 되어 ‘당신’의 오른팔이 되기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런 ‘당신’의 행동에도 아내는 마음이 돌아서지 않아 결국 때가 오자 떠난다. 이후 ‘당신’은 전처가 된 아내의 남동생에게 사기를 당한다. ‘당신’은 늘그막에야 어릴 때 좋아했던 ‘예쁜 여자’를 만나 살다가, ‘예쁜 여자’의 죽음을 먼저 본다. 그리고 환상에 휩싸여 결국 ‘당신’도 죽는다. 

“ 이 모든 것이 이제 곧 작동을 멈출 뇌가 만들어낸 환상임을 자각하고, 그리고 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당신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인간답게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느끼며, 당신이 사랑했던 다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누나와 아들, 그리고 당신의 전처를 사랑했으며, 누구보다 예쁜 여자를 사랑했고, 이미 당신 자신을 초월했으니 흔들림 없는 용기와 존엄을 가질 수 있으며, 두려움과 경외심에도 불구하고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고, 게다가 예쁜 여자가 당신의 손을 잡고 있으니 당신은 그녀를 담고 있고, 이 책과, 이 책을 쓰는 나를 담고 있으며, 나 역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당신 속의 내 속의 당신을 담고 있으니, 이것이 그렇게 오싹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신도, 나도, 우리도, 우리 모두 이렇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를.” p230-231

그는 ‘당신’의 고통에 공감한다. ‘당신’은 더이상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과는 관련이 없다. 그 역시도 한때는 ‘더러운 부자’였고, 사회의 불합리한 점들을 이용하여 잘 벌었으나, 결국 다시 불행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처음부터 연민의 대상이었고, 중반부를 거치고  마지막이 되자 다시 연민의 대상이 된다. 고로 ‘더럽게 부자가 된 당신’은 욕을 먹지 않는다. 여기서 자기계발서를 비꼬려고 했던 초기의 목적을 상실한 듯 하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당신’은 자기계발서에 등장할 만한 인물이 아니고, 악랄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행동을 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각기 행동을 하는데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처럼 폭력을 사용하고, 전쟁기술자를 후원하고, 부채를 경험하고.. 그렇기에 그런 행동들이 각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독자에게 다가오기 보다는, ‘당신’의 일생 전체를 보게 된다. 전체 골격은 ‘당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도중에 열심히 이 사회를 비꼬려는 것처럼 짜여져 있으나, 그게 ‘당신’의 삶과 아주 절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삶은 비판하려는 것만큼 악랄하지도 않다. 그럴 의도도 전혀 없이 주어진 시스템에 의해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이야기 흐름만 따라가면, 딱히 시스템에 의해 ‘당신’이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라, ‘당신’에 감정이입하고 보는 독자에게는 아이러니가 돋보이는 것같지도 않다. 시스템과 개인이 서로 맞서 싸우고 있는 대립구도도 아니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를 비꼬고, 이 사회를 비꼬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작가가 소제목이 달린 내용을 시작할 때마다 붙인 자기계발서에 관한 사유들은 독특하고 재미있었는데 그게 ‘당신’의 이야기와 완전히 잘 버무려졌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당신의 특별히 아름답지 않은 평범한 일생’은 고단하다. 누구의 잘못도 묻기 어렵게, 그는 열심히 살고, 끝을 맞이한다. 평범하게 살다 죽었는데, ’당신’의 끝이, 끝은 누구에게나 오는 당연한 것인데도 새삼 자꾸 돌이켜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는 ‘끝’을 이야기하지 않고 끝난다. 일생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이 중요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까지, ‘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어떻게든 살려고 하다가 무엇을 했든 간에 결국은 죽는다는 점. 그것 만큼 이 소설에서 내게 당연하고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다. 비참하지 않은 노년과 죽음이었기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맞은, 딱 그정도의 죽음은 나도 꿈꾸고 있던 죽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삶을 살았든 그것과는 무관한 죽음이었기에, 죽은 이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점이 충격이었고, 새삼스레 ‘당신’의 일생이 다루어진 소설이라는 점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다시 내 삶을 돌아보듯 ‘당신’의 일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로서, 작가의 의도도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 소설은 그렇기에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잘 쓰여진 자기계발서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이야기에 거리감이 조금 줄어들면 더 좋겠지만, 기획할 때 의도치 않았을 것 같은 부분도 건저낼 수 있도록 이야기가 흘러가버린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살아있는’소설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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