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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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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나는 입을 열어 당신을 부른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저 쪽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온다. “지금도 여기 있어요,” 아직 서로의 곁에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의 존재가 있기에 내 존재가 의미가 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하듯 당신도 나를 의지하기에 나는 힘이 난다. 존재가 존재에게 존재만으로 온기를 전하는 일은 위대하다. 서로가 없다면 세상에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은 물이 되어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스며들어 온 이 온기를 뿌리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새 고스란이 몸 안에 흘러 핏줄기 사이에 줄기줄기 뿌리내린다. 어느 무엇도 이 순간을 갈라놓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뿐. 서로의 존재를 확신하는 우리들만 남아서 다시 서로를 확인하고 쓰다듬는다. 

이 위대함이 없이 우리는 어떻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가? 미치지 않고 세상에 살아남은 게 용하다는 말이 그릇된 말이 아니다. 세상에 나온 이유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데, 정합적인 과학정보만 진짜 취급하느라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곁을 나눈 사람 뿐이다. 그런데 곁을 나눈 사람과 함께 잘 살다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사랑을 나누지? 그 사람은 나와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사람과 나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어떻게 파악해야 하지? 세계가 전쟁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복수심에 가득차서 서로를 죽이는 상황에서 우리 둘만 곁을 지키며 잘 살 수 있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나와 당신 뿐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내 곁의 위대함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위대함을 쫓아야 하는가.


『파묻힌 거인』에서 엑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아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암용이 내뿜는 숨 때문에 안개가 세상을 뒤덮어서, 그들 자신도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에게 닥쳤던 전쟁을 잊어버린다. 부부는 그 기억을 되찾는 것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당시엔 판가름하지 못한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 망각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증오심을 기억하고 물려주기를 바란다. 작가는 이것을 동화처럼 그려낸다. 가웨인은 망각을 부르는 암용을 수호하는 역할을, 위스턴은 암용을 죽여 증오를 세상 밖으로 꺼내려고 하는 역할을 맡는다.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그냥 잊힌 채 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

“… 하지만 오래된 과거고, 이제는 죽은 뼈들도 기분 좋은 푸른 풀밭 카펫 아래 편히 쉬고 있다오. 젊은 사람들은 그 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오래된 상처들이 영구히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가 정착되기에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할거요. …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어리석은 소립니다. 구더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학살과 마법사의 술수 위에 세워진 평화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오래된 두려움이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되기를 당신이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땅속에 하얀 뼈로 묻힌 채 사람들이 파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 p426-427『파묻힌 거인』


유럽의 어떤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세계2차대전을 언급하며 수업을 진행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한 학생이 질문했다. 

“세계 2차대전을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세계 1차대전도 있었나요?” 

아직 한 세기도 체 지나지 않은 싸움을 잊어버린 학생이 유럽에만 있는 건 아니다. 역사를 잊어버린 젊은 세대가 교실에 앉아 있다. 이들이 전쟁을, 민주화 과정을 기억하지 않고 평화를 평화로 유지할까. 

일본 우익들은 그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데서 비롯한 증오를 자식세대에게 학습시키려고 교과서를 왜곡한다. 자위대를 키운다. 

누군가가 수직적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지적했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와 소통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끼리만 대화를 주고받는다. sns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내뱉고, 다른 세대가 대화에 끼는 것을 어려워한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도,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말들이 아닐까.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관한 기억이다. 삶으로서 서로에게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생략되어버릴 정도로 바쁘기만 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에게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자기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워하면서도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고, 살아온 그대로 주어진 생명을 연명하는 걸까. 알 껍질은 너무도 단단하기에, 패배감을 가슴 깊숙히 눌러놓았기에,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아서? '암용은 무시무시하고, 그것을 잊어야만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서?'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려면,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되찾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암용을 죽일 힘은 없지만 암용을 없애는 데 동의한다. 아서왕 시절 법을 세우고 그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액슬, 그것을 부수고 암용이 세상의 기억을 지우도록 도와서 평화로운 상태를 꿈꾼 가웨인, 평화를 기억하지만 그 이후 경험한 분노를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에 복수를 실현하려는 위스턴, 그리고 아직 어린 세대인 에드윈. 에드윈에게 위스턴은 분노를 학습시키려고 하고,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지금도 거기 있나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우리에게는 소통이 필요하다. 무슨 방법이든 논의하려면, 소통이 필요하다고, 서로의 존재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대화가, 아프지만 평화로운 약속을 담은 대화가, 각자의 아픈 역사를 품을 자세로 나누는 대화가. 여전히 "관습과 의심은 사람들을 갈라놓을지라도,"(p443『파묻힌 거인』) 기억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니까."(p468『파묻힌 거인』)


신화적으로 현대사회의 축소판을 그리고서,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면 이런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까? 


p.s.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궁금하다. 무거운 이야기가 신화적으로,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은 상상력이 고갈된 우리 사회를 향한 목소리일까, 아니면 조금 더 부드럽게 마음에 가닿기 위한 장치일까? 피카소가 폭격당한 마을을 묘사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린 것은, 우리가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어떤 사진작가는 잔인한 전쟁 장면을 찍어서 사진전을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이 전쟁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것에 충격을 받고 나중에는 사진이 아닌 글로만 책을 냈다. 작가가 리얼리즘 형식이 아닌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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