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울의 풍경을 스케치로 옮긴 이 책, 정말 좋다. 평소 이런 그림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사진보다 더 풍성한 느낌을 주고 멋스러워서 자꾸만 보게 된다. 그리고 부럽다. 이런 그림을 쓱쓱 그릴수가 있어서. 이렇게 잘 그린 그림을 보고 반했다가 실제 사진을 보고 실망한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만큼 그림이 주는 느낌은 특별한 것 같다. 이 한장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그 풍경 앞에 서 있었을까. 계절과 날씨에 따라 애로사항도 있었겠고, 좋은 순간도 있었겠지? 그림을 보면서 그린 이의 시간까지 얻게 되는 것 같아 휙휙 대충 보고 지나치지 못하겠다. 더군다나 이 책처럼 개구진 표현이 가득있는데다 평소 그냥 지나쳐 버렸던 장소와 구조물을 소개한다면 더더욱 빨리 읽지 못하고 한컷 한컷 소중히 들여다보게 된다. 스케치로 만나는 또 다른 서울의 숨결. 굉장히 매력적이라 별 다섯개 이상을 주고 싶다.

 

 

 

서울의 다양한 곳 중 가장 먼저 그린 곳은 바로 경복궁이다. 나도 자주 찾아가는 곳인데, 이 곳의 역사와 정보를 알고 가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예전에 경복궁으로 나들이 가서 주위를 둘러보며 앉아있는데 한 아저씨가 말을 건네며 각 장소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일행들은 웬 이상한 아저씨냐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역사수업을 듣는 것도 같고, 몰랐던 정보를 얻게 돼서 꽤나 좋았었다.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보니 나무 하나도 그냥 보이지 않고, 이 곳에 사람이 살았었다는 사실이 새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경복궁을 자주 찾았는데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려넣은 스케치를 보니 '여기에 이런 건축물이 있었나' 싶어 놀랐다. 그 곳에 항상 있던 걸 텐데 왜 나는 발견하지 못했을까, 꼼꼼히 본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나 싶었다.

 

 

이 책은 이런 건물과 장소에 대한 역사 이야기가 가득 실려있다. 근정전을 그려 넣은 스케치만 봐도 마당 쇠고리, 뒤로 보이는 북악산, 경회루 지붕, 처마에 잇는 7개의 잡상까지 있는데 저자의 설명이 뒤따르니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거기다 평소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들까지 소개하는데 근정전을 호위하는 돌짐승들 중 해태 가족에겐 새끼까지 붙어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만큼 저자가 하나하나 꼼꼼히 봤다는 증거일 것이다.

 

태원전 중첩된 처마 사이의 하늘, 경복궁의 우물들과 팔우정 등 다양한 풍경들이 많이도 그려져 있어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할애됐는지를 짐작케 한다. 거기다 익살스러운 표현과 유머가 가득해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서울의 시간이 담긴 그림을 보면서 느낀 건, 내가 가본 곳들 중 내가 진짜로 가 본 곳은 없구나 라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분명 이 책에 나온 곳을 가 봤지만 나는 겉모습만 대충 훑어보고 만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책 속의 장소는 내가 알 던 곳과 다른 장소 같았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이 책을 들고 가서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서울의 번화가 중 하나인 명동은 이제 외국 관광객들의 천국이 된지 오래라 내가 가지 않게 된 곳 중 하나이다. 처음으로 간 서울 바로 명동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몇주 전부터 계획을 세우며 설레여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데, 가 봤자 구경하고 밥만 먹고 오는게 전부였지만 왠지 서울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그것도 부모님이 아닌 친구들과) 굉장히 설레였었다. 아..지금 생각하니 참 촌스럽구나! 그런 명동이었는데, 이제는 번잡한 그 곳을 굳이 찾아서 가진 않게 됐다.

 

이제 크리스마스나 연말이 되면 뉴스에서 명동을 볼 수 있겠지.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렬, 커플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리포터가 "여기는 명동입니다"라고 하겠지.

 

그런 명동 길거리에 '이근석 추모비'가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도 않고 존재조차 모르는 이 추모비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는 1997년 3인조 소매치기단에 맞서 싸우다 칼에 찔려 운명을 달리한 인근 행상이었다. 명동엔 또 '이재명 의사의 추모비'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모르나 매국노 이완용은 다 알 것이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현장에서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이다. 만약 그의 암살 계획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그들을 오래도록 기록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지만 흘러버린 시간 속에서 잊혀져갔다.

 

 

이런 추모비와 표지석은 서울 곳곳에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여겨 보지도 않고 바삐 걸음만 내딛는다. 나도 이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영영 모른채로 살았을 것이다. 효자동엔 세종대왕 생가터가 보도블럭 한쪽에 표지석으로 남겨져 있는데 모든 역사의 흔적들이 표지석으로 남겨진다는 것이 참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낡은 건 허물고 없애는 서울의 공사판에서 집터를 알려주는 표지석만이 남은 것도 어찌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 했던 척화파 김상헌이 살았던 집터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에겐 소중하고 기억되는 장소인 모양이다.

 

 

저자가 정확히 3개월 2주 걸려 완성한 스케치이다. 종각역에 갈 때마다 같은 의자에 앉아 조금씩 그렸다는데 요즘은 스크린 도어 공사로 이제 곧 가려질 풍경이라고 하니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저자는 그림을 볼 때마다 그걸 그렸을 때의 일이 같이 떠오르기 마련이라 더웠던 그 여름 날, 정전이 됐던 사건 등을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지하철 안이야 사시사철 똑같겠지만 설명을 듣고 있으니 왠지 더운 바람이 훅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보게 된다.

 

 

볼때마다 한숨 쉬게 만드는 청계천의 수표교 이다. 각하의 전시행정은 꼴사납고 보기 흉한 구조물을 탄생시켰다. 그림만 봐도 얼굴이 화끈화끈 거리는데, 부디 이런 흉물은 이게 마지막이기를 바래본다.

 

 

손기정 두상 조형을 그린 저자는 달리는 모습을 계단에라도 그려넣고 싶은 충동을 느껴 이런 그림을 탄생시켰다. 손기정 선생을 기념할 동상을 만들거였으면 이왕 뛰는 모습으로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돈이 모자랐던 걸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언제나 마라톤 복을 입고 뛰는 모습의 손기정 선생의 사진만 보다가 이렇게 얼굴만 달랑 있는 조형물을 보니 굉장히 어색했다. 손기정 선생님을 달리게 해주세요~!

 

 

스케치 하는 저자의 모습이 많이 그려져 있는데 정말 편안해 보인다. 공원에서, 카페에서, 야외에서, 지하철 등에서 스케치북과 연필 하나만 있으면 그 시간을 그대로 그릴 수 있다는 재능은 참 부럽다. 그 재능이 따뜻한 그림으로 남겨져 책으로 묶여 나왔고 이렇게 서울 곳곳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줬으니 저자의 재능에 감사해야겠다. 더불어 그림 낙서를 하고 싶은 욕구도 간만에 들기 시작한다. 슥삭슥삭, 풍경을 그려내며 그 안에 이야기를 담아내고 그렇게 그 장소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 서울의 시간을 그려 넣는 작업이 정말 즐거워 보이는데그 즐거움을 같이 공유하게 해줘서 고마움을 느낀다. 다음엔 다른 지역을 그려 달라고 부탁해도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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