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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후쿠오카 형무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수십 킬로미터의 철조망을 얹은 담장  /  수천 킬로그램의 철근 쇠창살  /  수십만 개의 별돌로 가로막힌 수백 개의 감방  /  서른여섯 명의 간수와 2백여 명의 간수병, 그리고 형무소장  /  천여 명의 죄수들 ―― 살인자, 강도, 사기꾼, 도둑, 조신인…….  /  처형장 둘, 무연고자 무덤, 시체실.  /  시인 한 명.  /  피아노 한 대.  /  그리고 비밀 하나.

- <스기야마의 메모>

 

  이정명 작가의 책은 읽고 나면 참 아리송해 집니다. 여기서 그의 ‘책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한 출세작(감히 이렇게 표현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그리고 이 책, <별을 스치는 바람>을 말합니다. 그에게 ‘한국형 팩션’ 작가라는 이름표를 붙여준 책들이죠. 이 책들은 모두 하나의 ‘설’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네요. 너무나도 과학적이고 신묘한 구조를 가지는 문자인 ‘한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미스터리, 모델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 미인도와 그 그림의 작가 신윤복에 대한 미스터리 그리고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 다루고 있는 청년 시인 윤동주에 대한 잔혹한 미스터리. 그 희미한 이야기들에 달라붙는 여러 가지 설들에 살을 붙여 만들어 낸 이야기였던 거죠.

 

  근데 그것이 참 절묘했던 겁니다. 이전의 책들이 드라마화 되었을 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학자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었죠. 특히 <바람의 화원>이 드라마화 됐을 때는 한국 미술사학계의 원로 학자들이 앞 다투어 인터뷰를 하고 우려의 기사를 쏟아 냈었죠. 그 정도로 절묘하게 이야기를 추적하고 만들어 내는 재주가 뛰어난 작가입니다, 이정명이라는 작가는. 이번 책도 영상화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영상화 된다면 <바람의 화원> 못지않은 파장이 일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일으킬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읽어 가면서 울컥 울컥 했었거든요.

 

  이야기는 일단은 추리소설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종반으로 치닫던 늦겨울,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어난 간수 살인사건”의 전말을 또 다른 간수인 와타나베 유이치가 조사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그가 19살의 겨울, 그 시절의 기후만큼이나 시리도록 아프고 괴롭고 자괴했던, 충격적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인연과 기억과 회한을 처연하게 되뇝니다. 그 시절 후쿠오카 형무소에는 있던 악마라고 불린 난폭한 교도관 스기야마와 마지막까지 시인이고자 했던 청년 윤동주, 그리고 ‘그’의 최후를 지켜보게 되는 유이치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그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 계획에 연루되어 사그라져 갔습니다. 그 생지옥 속에서 잔혹한 교도관과 젊은 시인이 만나게 됩니다.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검열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대립하며 소리 없는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스기야마 도잔은 살해당합니다. 스기야마 도잔의 진실, 스기야마와 윤동주의 진실 그리고 그 시절 지옥 속에서의 윤동주의 진실. 그리고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유이치의 독백은 괴로움과 자괴감에 차 있었습니다.

 

  교도관 살해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거죽이라면 알맹이는 윤동주입니다. 부당하게 억압받아야 했던 그 시절의 조선의 청년들과 시인 윤동주의 마지막, 그들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보낸 시절의 미스터리가 소재지요. 그 속에서 진정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변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시로서 소통하고 시로서 감화되어 가는 이들의 모습은 처절하고 감동적입니다. 결국에 시는 불태워 지고 진실마저 불살라져 버릴지라도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계속 살아가겠지요. 살아가는 겁니다.

 

  이 책은 참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뿌리 깊은 나무>나 <바람의 화원>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하지만 재미있었던 만큼 읽기도 괴로웠습니다. 아름다운 시로만 기억되어야 할 시인의 참혹한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이란 글이라도, 설사 그것이 허구라고 해도 힘든 일이었네요. 오랜만에 윤동주의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폭력의 시대 속에서 총칼보다 강력했던 시와 문학의 힘 그리고 은폐하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진실’이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작가의 차기작도 기대해 봅니다.

 

 

***

 

1권

 

  어떤 말은 단순한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떤 말은 수천 년을 살아남은 영혼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의를 숨기고 있다. 삶의 신비는 언어를 통해 드러나고 구현된다. 나는 우리의 입을 통해 파열되거나 마찰되는 자음의 신비를 알고 있다.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모음의 우아함도 알고 있다. 그것들은 섞이고 마찰하고 충돌하면서 음조와 의마와 분위기를 만든다. - 36

 

  비가 내렸다. 비는 장막처럼 너울대며 허공에 드리워졌다. 희뿌연 물의 장막 너머로 모든 것이 어렴풋해졌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비가 그치면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8월의 태양이 식고 9월의 바람이 불리란 것을. 전쟁터러 끌려간 소년들은 청년이 되리란 것을. 죄수는 죽어가고 새로운 죄수들이 감방을 채우리란 것을. - 221

 

  스기야마는 원고 맨 앞장을 뜯어냈다. 불꽃이 구겨진 종이의 가장 자리를 핥았다. 단정한 글씨가 순식간에 삼켜지고, 금지된 구문은 불꽃의 혓바닥에 녹았다. 한 자씩 한자씩, 한 줄씩 한줄씩, 한 장씩 한 장씩. 원고 뭉치는 우악스럽게 뜯겨졌고, 찢긴 종이들은 화염 속으로 날아들었다.

  <자화상>, <돌아와 보는 밤>, <사랑스러운 추억>…….

  그는 흩어진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불 그림자가 어른어른 순결한 글자에 달려들었다. - 260

 

 

2권

 

  형무소에서 아프다는 것, 다쳤다는 것은 남들에게 떠벌릴 일이 아니었다. 이 담장 안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곤 없었다. 모든 죄수는 허약했고 병을 달고 살았다. 별것 아닌 감기조차도 이곳에선 폐병으로, 죽음으로 번져다. 이곳에서 죽음은 한 인간의 종말이 아니라 수많은 질환과, 폭력과, 학대의 종착역일 뿐이었다. - 100

 

  책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죽어갈까?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낱말과 조사와 구두점이 모인 문장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순간 삶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가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우듬지를 이루는 동안 책장은 찢어지고 표지는 낡고 글자들을 바랜다. 그리고 어느 날 먼지와 어둠 속에서 숨을 거두지만 그 영혼은 우리 가슴속에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책은 죽지 않는다. - 172

 

  이 더러운 전쟁은 내가 일으킨게 아니예요. 도시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이 그 폭탄에 죽어 간 사람들 때문은 아니에요. 전쟁을 벌인 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병신으로 만들고, 고통에 빠트렸어요. 그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반드시 처절하고 고통스럽게 대가를 치러야 해요! -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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