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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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와 화자의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재희와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화자.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던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한 공간에서 함께 살게 되지만 두 사람에게 극히 자연스러웠던 이 동거는 남들의 눈에 오해를 사기 쉬웠고, 세상의 많은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화자의 삶에서 재희는 재호로, 재희의 삶에서 화자는 지은으로 살아가며 주변의 이목을 가린 채 서로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기로 한다. 재희는 화자를 통해 게이의 힘든 점에 대해 알게 되었고, 화자는 재희를 통해 여자의 삶 또한 만만찮게 힘들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의 시간은 재희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들의 비밀을 처음 알게 되면서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다툼 끝에 재희와 화자의 비밀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게 되고 재희는 그와 함께할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세상에 또 다른 테두리를 만들어갈 재희. 앞으로 그녀가 만드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박상영 소설가의 전작들이 으레 그렇듯 이번 단편에서도 그들이 나누는 위트 있는 대화에 피식 웃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유쾌함마저 느껴졌다. 덕분에 간혹 무겁고 심각할 수 있는 주제가 나올 때에도 갑갑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이번 단편 <재희>에서는 여성인 재희를 중심인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여성의 삶에 대해서도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임신, 출산, 낙태에 관한 세상의 한 편중된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끝으로 화자의 애인이었던 K3가 보낸 마지막 문자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 너무 크고 지나친 집착은 문제가 되지만, 어떻게 사랑에 있어서 '집착'의 감정이 아예 없을 수 있을까

 

누구든 떠들어대도 괜찮지만, 그 누구가 재희라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얘기해도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재희니까. 재희와 내가 공유하고 있던 것들이, 둘만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다. 우리 둘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리 둘만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라도.- P51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P66

선반에서 밥공기를 꺼내 블루베리 봉지를 뒤집었다. 보라색 얼음 조각 하나만이 툭 떨어질 따름이었다.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때에 맞춰 블루베리를 사다놓던 재희.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 재희.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며, 가당찮은 남자만 골라 만나는 재희.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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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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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 인수된 도시. 갑작스레 변화된 사회시스템 속에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에 따라 타운 사람들은 L, L2의 계급으로 나뉘며 그 계급에 따라 차별적인 환경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들에 속하지 못한 가난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들, 결코 이곳을 떠나거나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사하라고 부른다.

 

일곱 명의 총리단이 꾸려지고 특별법이 제정되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채널이 단일화되고 신문사가 통폐합되고, 대학의 특정 전공이 폐지되고 단체 모임 사전 허가제가 생기고 금지어가 생기고.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급격한 변화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사하 본인들조차 자신들에게 행해지는 차별과 멸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아무도 자신들의 입장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해가 뜨고 지고, 사계절이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하로 전락한 사람들, 서서히 이곳으로 밀려난 사람들, 부모를 따라 태생적으로 사하가 된 사람들. 이곳에 오게 된 과정, 절차, 그 전에 하던 일들, 지금 하는 일들, 가족의 사연, 개인의 사연. 모르는 일들도 많고 아는 일들도 많고 숨기는 일들도 많은 이곳에서 도경과 수의 사건이 터지며 사하맨션은 깊은 혼란에 휩싸인다. 연이어 터지는 사건들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의문.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 들여온 일들이 실은 모순투성이의 세계였다는 것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연구실의 실험체로 살아온 우미, 관리실 앞에 버려진 아이 우연, 그런 그들을 품에 받아들인 꽃님이 할머니, 아빠와 함께 이곳으로 도망 왔지만 갑작스러운 아빠의 사고로 왕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만, 죄를 짓고 이곳으로 도망 온 남매 진경과 도경,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살아온 사라, 관리실 영감과 직업소개소의 소장 할머니. ‘사하가 된 사연, ‘사하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에 존재하지 않는 건 앞으로의 미래에 관한 일들뿐이었다. 하지만 도경과 수의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남은 이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함께 세상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기 시작한다. 그냥 살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살기 위해 그들은 이때껏 제대로 보지 못한 세상에 맞서 본격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파헤쳐가는 우미, 사라진 우미와 도경을 찾아 나서게 된 진경,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제대로 살고 싶어진 사라, 오래전 투쟁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관리실 영감과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직업소개소의 소장 할머니. 한 사람에 대한 비밀과 총리단을 둘러싼 전체에 대한 내막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한다.

 

허구로 시작한 가상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그들이 지닌 아픔과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섬뜩하고 서글픈 감정을 느꼈다. 결코 낯설지 않은 이런 감정의 파편을 끌어안고서 그동안 우리가 지키기 위해 투쟁해왔던 시간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부조리의 잔재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항상 진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는 영감님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진경이 총비서에게 한 마지막 말처럼 아직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고 투쟁하는 이들은 끝까지 함께할 것이며 나비 혁명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작은 새의 깃털을 두 개 꽂아 놓은 것처럼 나비는 계속해서 높은 곳으로 멀리멀리 날아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더 많은 나비들이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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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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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오프라인 서점에서 처음 이 책을 발견했을 때가 떠오른다. 숨죽인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며 쌓여있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나를 보고 있던 시선, 반쯤 찢어진 종이가 나풀거리고 그 틈 사이에서 나를 맹렬히 보고 있던 그 노랗고 작은 새 한 마리를.

 

약속시간에 맞춰 서둘러 그곳을 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깨끗한 새 책들 사이에 놓인 찢어진 표지는 내게 있어 충분히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그 당시 얌전하게 표지가 덮여 있는 다른 책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게 깊숙이 각인되었다. 이 책을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때의 이끌림이 여전히 지금까지도 이어져왔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달라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과거의 숱한 결정에 대한 수많은 가정을 하게 된다. ‘그때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이게 아니라 저걸 선택했더라면. 다른 날 저곳에 갔더라면. 그 사람과 가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가정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심하게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마저 빼앗아 버리지만, 현실이 막막할 때마다 앞이 더 불행해질 것 같을 때마다 이러한 가정을 우린 쉽게 놓을 수가 없다. 미술관 테러사건으로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이 책의 화자 시오 또한 그랬다. 달라질 게 없단 걸 알면서도 끝없이 무수한 가정을 만들어냈다. 내가 그때로 돌아가서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미술관이 아니라 식당에 가자고 우기지 않았을까? 왜 비먼 선생님은 화요일에, 그것도 아니면 목요일에 우리를 부르지 않았을까? (118p) 매일 함께할 것 같았던 엄마와의 일상이 사라졌고, 자신 때문에 엄마가 죽은 거라는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엄마가 없는 현실에 대한 부정, 앞으로의 불안한 일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서 예전에 친하게 지낸 친구 앤디의 집에서도, 아빠를 따라 갑작스레 가게 된 라스베이거스의 집에서도, 다시 돌아와 살게 된 호비 아저씨네 집에서도 그는 삶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하며 불안하고 어두운 숨을 몰아 내쉬어야 했다. 먼 앞날에 대한 안락보다는 당장의 고통을 줄여줄 쾌락을 택했으며 설사 그것이 잠깐밖에 허락되지 않는 쾌락일지라도, 그 뒤에 더한 고통과 괴로움이 따를지라도 그는 그러한 쾌락이 있는 곳에서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약이 필요했고, 먹고 살기 위해선 도둑질을 해야만 했으며, 그의 행동에는 종종 거짓말이 따라야 했다. 미술관에서 처음 웰티 할아버지와 대화를 했을 때부터, 그때 그 부탁을 들었을 때부터, 그에게서 그림 <황금방울새>를 떠맡게 된 후부터, 엄마를 잃은 그날 그때부터 그에겐 그러한 것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남들이 부정하다고 하는 그 모든 어두운 것들이.

 

따로 상상할 필요도 없이 소설 속 모든 일들은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 책을 읽으면서 늘 그와 같은 시간을 보낸 것만 같다.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나는 시오를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했으며, 꿈속을 헤매고, 그림을 보고, 누군가로부터 도망을 쳤다가, 다시 어떠한 지점으로 되돌아와 거짓말을 하고, 살아가면서 그가 했던 그 모든 것들을 시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호비 아저씨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진실을 털어놓아야 했을 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피파를 간절히 원할 때에도, 바버 부인에게 가족의 정과 사랑을 갈구할 때에도, 보리스와 함께 방탕하고 위험한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림을 찾기 위해서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을 때도 늘 그와 함께 했다. “그러지 마, 시오. 그러면 안 돼. 더 이상 그곳으로 가지마. 돌아와. 여기서 더 나쁜 길로 가면 안 돼. 진실을 말해. 이제라도 바른길로 돌아와야 해.”라고 듣지 않는, 들을 수 없는 그에게 수없이 소리치면서도, 그에게 있어 바른길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지 내가 생각하는 바른길이란 게 정말 그에게 필요한 것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시오의 삶이 여기서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를, 그에게도 부디 조그만 평안이 허락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떨리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 가까이에 붙어왔던 시오, 그는 늘 죽음을 갈구하면서 살아왔다. 그에게 만약 피파와 호비 아저씨가 없었더라면, 골동품이 없었더라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던 바버 가의 식구들과 잠깐 동안이지만 함께 했던 아빠와 그의 여자친구 잰드라, 그리고 그때 만난 소중한 친구 보리스가 없었더라면 그의 이야기는 한참 전에 이미 끝났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에게 큰 불안을 가져다준 그림 <황금방울새>가 주는 위안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 이야기의 끝까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호비 아저씨가 시오에게 해주었던 말처럼 나는 예술이 누군가에게 있어서 아주 오래도록 깊이 남다른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을 알 것만 같다. 시오의 황금방울새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게도 남다르게 다가오는 그런 작품이 있다. 그동안 나를 바꾸어준 작품. 미술작품으로 시작해서 소설, 영화, 장르를 불문하고 나를 바꾸어준 그 모든 예술 작품들을 떠올려본다. 나에게만 남다른 언어로 말을 걸어왔을 그것들을. , 그래, . 얘야. 그래, . 네 거야, 네 거. 난 널 위해서 그려졌어.

 

책을 다 덮고 나서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그림 <황금방울새>를 다시 찾아보았다. 단조로운 배경을 뒤로하고 홰에 사슬로 발목이 묶인 작은 새. 시오가 묘사했듯이 작고 부드러운 가슴털과 연약한 발톱, 뚫어져라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 나는 그 시선에서 무언가 슬프고 고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만의 단호한 의지를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날지 못하게 묶여 있는 그 작은 생명이 그가 처한 현실이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시오의 말처럼 우린 이 그림을 그린 파브리티우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았을 수도 있고, 한 인간에 대한 초상화를 그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그림을 통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는지도. 다만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조차 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새, 세상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새를 보며 물러나기를 거부하게 된 시오의 마지막 변화된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속삭이는 그 그림의 내밀한 비밀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 그래, . 얘야. 그래, . 네 거야, 네 거. 난 널 위해서 그려졌어.

 

시오의 다짐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불속에서 구해내고 사라졌을 때는 찾으려 애쓰고 보존하고 구하려고 노력하며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에 나의 사랑도 더하고 싶다. 살아가는 것이 항상 기쁘지만은 않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불행과 슬픔이 더 많을 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서 끝까지 에 몰두하기를 바라면서 그 사이에 예술과 사랑이 더 큰 힘이 되길 바라면서   

 

네가 보는 그림은 내가 보는 그림과 달라. 미술 책은 그걸 또 다른 위치에 놓고,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카드를 사는 여자는 또 전혀 다른 걸 보겠지. 우리와 다른 시대의 사람들―4백 년 전에 살던 사람들, 4백 년 후에 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절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가지 않을 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심오한 느낌을 받지 않겠지, 정말로 위대한 그림은 아주 유동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지, 독특하고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말이야. 네 거야, 네 거. 난 널 위해서 그려졌어.- P461

웰티는 운명적인 물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어. 미술상과 골동품상은 모두 그런 걸 알아보지. 들어오고 또 들어오는 물건들. 파는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닐 거야. 어떤 도시고, 어떤 색깔이고, 하루 중 어느 순간이지. 사람의 운명이 걸리는 못 같은 거야.- P462

이 세상의 위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위엄을 지키는 것,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위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을 처음으로 흘깃 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꽃피우고 꽃피우는 것.- P466

만약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비밀이라면, 그렇다면 나를 삶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림은 거기에, 내가 쓴 공책의 모든 페이지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했다. 꿈과 마술, 마술과 망상. ‘통일장이론’. 비밀에 관한 비밀.- P470

새와 화가, 그림과 감상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을 건너 나를 부르는 소리가, 호비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통로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들려오는 쉿 소리가 너무나 잘 들린다. 정말로 아주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부름이다. - P473

우리에게 혼잣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이든 중요하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 스스로에게 노래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중요하다. 하지만 그림은 또한 우리가 시간을 초월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음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 P480

우리가 죽어갈 때, 우리가 유기체에서 생겨나 굴욕적이게도 다시 유기체로 돌아갈 때,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영광이고 특권이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재앙과 망각이 뒤따랐다면―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 불멸인 한 (그것은 불멸이다) 나는 그러한 불멸성에서 밝게 빛나는, 변치 않는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며, 계속 존재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불 속에서 구해내고, 사라졌을 때는 찾으려 애쓰고, 보존하고, 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아름다운 것들을 문자 그대로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고 시간의 폐허 속에서 다음 세대를 향해, 또 그 다음 세대를 향해 큰 소리로 멋지게 노래를 불러온 사람들의 역사에 나 자신의 사랑을 더한다. -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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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사계절 4부작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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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노인 대니얼과 십대 소녀 엘리자베스의 특별한 우정 이야기. 요양원에 있는 대니얼을 찾아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처음 이웃으로 만나게 된 그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가까워지는지, 그들이 나눈 대화, 함께 한 일상, 서로의 생각, 예술, 거짓말, 태도에 대해서, 그들이 함께한 시간들이 책을 통해 오롯이 전해진다. 현재와 과거를 돌아가면서 이따금 또 다른 이들의 이상과 삶도 보여주면서.

 

이 책은 단순히 세대차를 넘는 이웃 간의 우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와 일상을 통해 지나친 관료주의의 문제와 여성에 대한 차별, 난민 문제 등 여러 세상의 단편들을 아우르고 있다. 폴린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어딜 가나 존재하는, 실제로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심했을 여성에 대한 차별과 모욕, 그리고 그들의 투쟁과 그로 인해 변화된 지금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환상처럼 느껴지는 대니얼의 꿈에서는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가끔은 이런 우정을 꿈꿔본다.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차이와 차별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고 취향을 나누는 우정,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깨닫고 틀린 것을 알고 잘못된 것들을 고쳐가는, 내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우정을. 엘리자베스가 어릴 때 대니얼과 함께한 바가텔 게임처럼, 대니얼이 어떤 이야기의 첫 구절을 들려주면 그걸 듣고 떠오른 이야기를 엘리자베스가 말하고 그럼 내가 연이어 떠오르는 이야기를 말하는 그런 시간들을 함께하고 싶다.

 

많이 기대했던 소설이었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의 묘한 소설이었다. 페이지를 쉽게 넘기면서도 같은 문장을 몇 번 다시 곱씹기도 했고, 다시 앞 장으로 돌아가 뒷장의 이야기와 함께 읽어나가기도 했다. 다른 계절에 읽게 되는 그들의 계절 이야기. 봄에 읽은 가을 이야기를 지나 또 다른 계절에 읽게 될 어떤 계절의 이야기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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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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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상실로부터 시작된 미스터리 형식의 소설. 상큼한 느낌의 제목과 표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다루는 중점적인 사건과 내용은 한없이 무겁고 어둡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로 대한민국이 한창 뜨거울 때, 한 여고생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사인은 두부손상. 수사과정에서 가해자로 지목되었지만 알리바이가 완벽한 사람 신정준과 무언가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목격자 한만우, 그리고 평소 피해자의 외모를 질투했었던 다른 여고생 윤태림이 의심을 받게 되지만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고, 피해자가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가해자로 확정되는 사람은 없는 막막한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사건은 세상에서 잊힌다. 당시 그 일을 겪고 들은 당사자들만 제외하고서.

 

딸 해언이 죽고 나서 딸의 이름에 집착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 곁에서 자신의 존재마저 상실해버린 딸 다언. 죽은 자는 개명신청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엄마는 딸 해언이 생전 소지했던 모든 물품의 이름을 혜은으로 바꾸고, 심지어 가계부에 적힌 이름 하나에도 집착하며 남아있는 딸의 이름을 모두 바꿔버린다. 그리고 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던 다언은 이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니의 얼굴을 따라 계속해서 성형을 시도하며 자신의 고통을 이어나간다.

 

무언가 끊어진 사람들, 생각지 못한 상실에 자신마저 잃어버린 사람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허전한 공백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며 비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마음을 다친 이들을 향한 먹먹한 슬픔이 함께 다가온다.

 

처음 레몬서평단을 신청했을 때 나는 신청이유에 이 책의 제목이 왜 레몬인지 이 책에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썼었다. 레모네이드, 레몬 과자, 베티번 씨, 상희가 직접 쓴 시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번 씨’. 이 얇은 가제본에서 나오는 레몬들은 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하나의 사건, 그리고 여러 화자들이 자신의 시선에서 말하는 이야기 레몬, 그 전체 이야기가 궁금하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P63

내가 다언에 대해 아는 건 오직 한 가지, 한일 월드컵이 있던 그 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 결코 그녀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뿐이다. 끝없이 계속되리라는 사실뿐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 무엇이 끝없이 진행된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P64

엄마가 엄마 스스로를 바꾸지 못해 언니의 이름을 바꾸려 했다면 나는 언니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해 나 스스로를 바꾸기로 했다. 엄마가 말렸더라도 나는 감행했을 것이지만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말리기는커녕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그토록 돈에 무서운 엄마가 선뜻 수술비를 대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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