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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3
츠쯔졘 지음, 김윤진 옮김 / 들녘 / 2011년 7월
평점 :
나는 어원커의 여인이다. 우리 부족 마지막 추장의 여인이다.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어미니의이름은 다마라, 아버지는 린커다.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아버지는 흑곰 한 마리를 잡았다. 나무 굴에 웅크리고 겨울잠을 자고 있던 곰을 찾아낸 아버지는 좋은 웅담을 얻을 심산으로 자작나무 가지를 들쑤셨다. 슬슬 약이 오른 곰이 격노하자 그제서야 아버지는 사냥총을 쏘았다. 곰이 화를 내면 담즙 분비가 왕성해져 두둑하게 부풀어 오른 쓸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일진이 괜찮았다. 윤이 좌르르 흐르는 두둑한 웅담 하나와 나를 한 쾌에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p.15>
표지가 넘 맘에 들어 읽게 된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특이한 제목도 한 몫 했다. 무슨 뜻일까 굉장히 궁금하더라는 ~
중국문학을 크게 즐겨 읽지는 않지만 19세기 중국 후난성을 배경으로 여자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전해져 내려온 비밀의 문자 '누슈'를 통해 평생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두 여인의 삶과 사랑을 신비롭고 아름답게 그려낸 '설화와 비밀의 부채'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숲 속 여인'의 놀라운 100년 삶을 증언한다는 글귀에 반해 집어든 이 책. 설화와 비밀의 부채와 비슷해 비교해 읽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아 냉큼 집어 들게 되었는데 순전히 상상으로 쓴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자신이 다양한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 다싱안링에서 태어나 열일곱이 될때까지 살기도 했고 2005년, 어원커 족의 발자취를 좇아 탐방을 마치고 이들 부족의 100년사를 조망한 작품인지라 사실적이라 맘에 든다.
루쉰문학상, 빙신(氷心)산문상, 좡중원(壯重文)문학상 등 권위있는 문학상을 두루 수상함은 물론 중국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루쉰문학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운 작가의 작품이라니 ~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운명이 아닐런지 !!
밤에도 달과 별을 볼 수 있는 시렁주에 살며 고기를 먹고 사냥을 하며 불씨와 순록을 귀히 여기는 어원커 부족. 다람쥐가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버섯을 보고 다가올 겨울 날씨를 미리 점치는 그들. 눈밭의 발자취를 찾지 못하면 나뭇가지 위에 매달린 버섯을 찾으며 친칠라 사냥을 하고, 소금 함정을 이용해 사슴을 잡으며 자연을 벗삼아 삶을 꾸려나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한동안 내가 즐겨봤던 다큐멘타리 한편를 떠올리게 했다. 툰드라에서 살고있는 지구상의 마지막 순록 유목민인 네네츠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최후의 툰두라>로 그들 역시 자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자신들의 친구이자 먹이 그리고 살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는 순록을 키우며 살아가는 부족인지라 이들의 모습이 그들과 많이 닮아있어 익숙하면서 친근했는데 다큐를 소설로 옮겨놓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자연에서 얻은 것들을 이용해 유지해온 그들의 삶. 하지만 가스를 얻기 위해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술과 마약에 노출된 네네츠 족의 모습은 굉장히 충격적 이었는데 어원커족 역시 부차별한 벌목으로 인한 자연생태계의 파괴와 현대 문명의 투입으로 부족의 일원이 산을 버리고 마을에 정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사랑하는 여인을 뒤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니두 무당과 다른이의 생명은 물론 죄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아이의 목숨을 신에게 맡길 수 밖에 없었던 니하오의 운명과 견주지는 못하리라.
가장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물건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쉽게 손에서 떠나는 법이라는 말.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걸까 ~
어얼구나 강은 헤이룽 성 서남쪽 변경에 위치하며, 오늘날 내몽고 자치구 동북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가르는 강이다.
1689년 7월 24일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네르친스크조약'으로 인해 어얼구나 강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게 되고 그 명칭도 둘로 갈라지게 되는데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에서 사는 어원커족, 마지막 추장의 여인이었던 아흔살인 '나'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새벽 - 정오 - 황혼으로 이어지는데 아흔해의 삶, 그것은 그녀의 삶이자 곧 소수민족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되어 장엄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진행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들이 또다른 가정을 꾸리면서 쭈욱 이어져온 그들의 삶.
그 속에는 자연을 벗삼아 순록을 키우며 살아가는 순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운명같은 사랑이야기도 있고, 소박한 즐거움이 있으며, 자신의 자식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다른 이의 목숨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이의 사무친 모정도 담겨 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름을 남겨놓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바램에 린커, 다마라, 니두 무당, 라지다, 와뤄쟈, 니하오 등등과 다르게 그녀를 기억해낼 수 있는 이름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서운하지만 해와 달, 바람, 순록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나는 가만히 그녀를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너는 라지다를 좋아했지. 그런데 라지다는 지금 어디있지? 이완은 나제스카를 좋아했어. 그런데 나제스카는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지 않았니?
린커와 네 큰아버지 니두 무당은 네 아마였던 다마라를 좋아해서 겵를 벌이게 됐어. 진더는 니하오를 좋아했지만, 니하오는 루니한테 시집가지 않았니?
난 깨달았어. 사랑하는 건 반드시 잃게 된다는 사실을. 오히려 사랑하지 않은 것이 오래도록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이푸린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가슴속 깊이상처를 간직한 여인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 설파하고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사랑했다면 찰나의 행복이 떠나가버린들 무엇이 두렵겠는가. <p.237>
사랑하라.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G.상드-
사랑이라는 이름의 찰나의 행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에 새긴 사람, 죽음으로 거부한 사람, 곁에 살면서 영원히 부정한 사람.
그 지독한 열병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