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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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음을 견디는 것이 힘들까, 아니면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힘들까. 늙어갈수록 죽음에 가까워지고 죽음을 의식할수록 늙어갈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내려가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의식하며 늙음을 견디는 것일까.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 오늘을 행복해할 수 있는 것은 늙음과 죽음 사이에 두근거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김애란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었다. 계간 <창작과 비평>에 연재될 무렵보다,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보다 더 늙고 죽음에 가까워진 내가 세밑이 되어서야 어떻게든 읽음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도 그 사이의 두근거림, 혹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열일곱, 세상이란 퍼즐을 맞춰나가기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나이. 한 사람의 부모가 되기엔 이른 나이. 생을 마치기엔 지나치게 어린 나이. 서둘러 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아름은 자기 나이의 꼭 두 배인 젊은 부모의 성숙을 유도한다. 미진한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며 열일곱의 눈으로 세상을 스캔한다.

 

  장씨 할아버지가 사온 팩소주를 홀짝이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리지만 늙어버린 아이의 두근거림. 서하로 각인된 낯익은 존재가 낯선 음성으로 다가올 때의 번민과 두근거림. 엄마 뱃속에서부터 느껴온 콩닥거림이 다시 엄마에게 전해지는 두근거림. 한때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살았음을, 사랑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어마어마한 두근거림을 남긴 아이.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난 그런 박자를, 누군가와 온전하게 합쳐지는 느낌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비로소 알아낸 기분이었다. 그건 누군가를 힘껏 안아 서로의 박동을 느낄 만큼 심장을 가까이 포개는 거였다. (P. 320)

 

  까꿍, 하고 아름은 사라졌지만 독자는 그 아이를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의 심장박동수가 내 갈비뼈를 진동시키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리고 이내 깨달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또한 사라지지 않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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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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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뇨르 조바니티! 그이도 감옥에서 죽을 거예요! 시인은 길들여지지 않는 사랑스러운 새와 같아서 새장에 가두면 노래를 못 해요. 그래서 죽는 거라고요!” (P. 144)

 

  새빨간 장미를 입에 물고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바람을 일으킨다. 예사스럽지 않은 낯선 공기의 흐름을 감지한 사내들. 한 송이 장미가 여러 사내 가슴에 가닿다가 되돌아올 때마다 고혹적인 눈빛을 잊지 않는 집시 여인.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 사랑스러운 새와 같다고 노래한다. 여인의 손에 들렸던 장미는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지 않던 호세에게 뿐만 아니라 한 이탈리아 여인의 가슴에 놓여졌다. 그랬기 때문에 이와 같이 아리아 가사를 차용하여 간결하면서도 낭만적인 문장으로 직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분노가 언어로 연주되는 순간, 장미는 내게도 놓여졌다.

 

  독자는 활자 안에 숨겨진 선율에 잠깐 취할 수도 있겠으나 이내 새장이 시인 조르바티가 시위를 주도하다 갇힌 감옥임을, 로렌스 플레인스 지역이 실은 거대한 감옥임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희망을 잔뜩 안고 이주한 유럽의 빈민자들을 기계인간으로 만드는 곳. 오로지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곳.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 곳. 비제 오페라 <카르멘> 중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의 거침없는 선율이 파고들어오더니 그들이 원하는 빵과 장미를 저울질하게 한다. 빵뿐만 아니라 장미도 원한다는 피켓 문구를 가슴에 새기게 한다.

 

  공장주의 일방적인 임금 결정으로 최저 생활조차 위협받게 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파업 투쟁을 감행하게 된다. 급여를 받으면 상당한 액수를 집세로 도로 거두어가는, 남은 돈으로 빵과 석탄을 사기에도 빠듯한, 좀처럼 나아지질 수 없는 노동자의 생활환경. 도시의 악순환을 해변에 쌓은 모래성을 부수듯 지워줄 파도에 동참한 로사의 엄마인 알바는 요리하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중 초초상의 아리아 ‘어느 갠 날’을 부를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이탈리아 이민자이다. 생리적 충족을 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문화의 욕구를 해갈하면서 삶을 즐기며 자기 존재를 찾을 수 있는 영혼의 양식, 즉 푸치니 음악 같은 것을 피켓에 넣고 싶어 하는 알바. 그의 뜻대로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라는 문구가 탄생되고, 후에 로렌스 파업 투쟁을 빵과 장미파업이라 기록되게 하였다. 그리고 한참 후에 캐서린 패터슨의 <빵과 장미>를 우리는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소설가의 위대함에 탄복했다. 우연히 목도한 사진 한 장에 대한 궁금증으로 하나의 소설을 완성시켰다. 좀체 잠재워지지 않는 창작욕으로 오랜 기간의 자료 조사를 거쳐 당시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려내어 한 세기 뒤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색의 시간을 선사하는 작가의 힘!

 

  신문 일면을 장식한 기사나 역사책 한 면을 가득 메운 일목요연한 기록으로 빵과 장미 파업을 접했더라면, 과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낼 수 있었을까. 이내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많고 많은 노동자 투쟁의 하나로 치부될 공산이 큰 단기 기억은 머잖아 저장능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소설가가 부여한 의미를, 공들여 조각한 인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읽게 된다면? 지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려는 머리는 잠시 쉬어도 좋다. 삶의 가치로 재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가슴이 대신 읽을 테니까. 나는 무엇보다 <빵과 장미>를 통해 왜 소설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확인하게 되어 반가웠다. 소설은 쓰이고 읽히며, 빵에 장미물이 드는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장미물이 번져올 때의 쾌감은커녕 오늘의 근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의 고단한 일상을 엿보며 착취의 역사를 짐작하기도 했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구분되고, ‘있음’은 없는 자가 앞으로 가질 수 있을 것들까지 앞서서 가로채는 형국이 되고, 마침내 없는 자는 있는 자의 보다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공장에서 남편을 잃고, 딸의 출생증명서를 위조하여 공장으로 보내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를 알바 수입만으로는 이어갈 수 없는 가정은 플레인스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로사처럼 온전한 미국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꿈을 꾸는 아이가 많겠지만, 도시를 장악한 자본가는 노동자가 꿈꾸길 원하지 않는다. 미래의 노동자도 말이다. 가까스로 기초적인 생활만 가능케 하려는 계략은 물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빵에 길들여지도록 하여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별 탈 없이 움직이는 톱니바퀴를 마련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바짝 조이며 기름칠하면 좀 더 나아질 거라 여겼으나 이미 한계에 다다른 노동자가 선택한 것은 한 가지뿐.

 

  억눌려온 권리가 거센 물결이 되어 파도쳤다. 폭력으로 이를 막으려는 어리석은 수작은 오히려 물결을 쓰나미로 만들었다. 희생이 따를수록 점점 똘똘 뭉치게 되는 노동자들을 보며 벅찬 감동이 쓰나미로 몰려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뭉쳐 피면서 화려함을 자랑하던 벚꽃잎이 비처럼 내리는 풍광과 마주할 때와 흡사한 울림이 전해졌다. 연푸른 이파리로 자기의 건장함을 과시하는 벚나무처럼 당당히 봄햇살을 맞는 승리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소설의 개운함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십대의 내면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담은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로사와 제이크의 커다란 두 개의 축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들이 하나의 축으로 연결될 때 성장소설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전까지는 궁핍한 노동자들의 도시의 이면을 모범생의 눈으로, 폭력에 시달리는 소년 노동자의 눈으로 훑었다면 그 이후는 한 상처받은 어린 영혼이 어떻게 치유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추위에 떠는 거지 아이를 외면할 수 없어 몰래 부엌에 재운 로사가 처음 얼음처럼 차고 단단한 제이크의 마음을 두드렸다. 잠깐이지만 더없이 따뜻한 손길로 소년은 몇 되지 않은 평온한 밤을 보냈을 터. 후에 위기를 모면하도록 도와주는 동생 역할까지 해주지 않았던가(로사가 제이크에게 살바토레라는 이탈리아 이름을 지어 주며 남매 행세를 도와주는데,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영화에 매료되는, 결국엔 영화감독으로 성공하게 되는 살바토레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난생 처음 가족다운 정을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걸리 플린 부인도 제이크에게 중요한 것을 선사했다. 미모의 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는 자신의 현재를 좀 더 나아지게 보이도록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르바티 부부의 한결같은 태도는 웬만한 두드림으로 반응 없던 제이크의 속을 열게 했다. 부인의 헌신적인 보살핌도 한몫했지만 특히 제르바티 씨의 침착함과 배려는 얼마 되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온 상처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길들여지지 않는 새는 이제 노래를 불러도 좋았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람을 온전하게 믿는다는 것이다. 피그말리온처럼 간절히 믿으면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한 세상을 구한 것과 다름없음을, 동시에 한 사람을 믿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제르바티 씨로부터 배운다.

 

  두근거림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고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서 접하게 되는 부당한 대우도 그렇지만, 그들과 쉽게 마주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어 자주 듣게 되는 늦은 밤 낯선 언어가 때때로 아프다. 빵과 장미, 모두를 위해 일하고 싶은데 빵만을 위해 힘줄을 돋우는 건 아닐까.

 

  새장에 가두면 노래를 못 하는 사람들이 새장을 벗어나 흥겹게 노래 부르는 순간. 모두가 길들여지지 않는 새가 된다.

 

  빵에 장미물이 드는 시간. 장미물이 번지기 시작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은 꽤 아름다운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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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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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오빠’라는 말을 듣고 머나먼 이국어를 듣는 듯 낯설었다. 일가친족 중 대빵인 할머니 입에서 오라버니도 아니고 울 오빠라니. 몸빼가 멜빵바지로 일순 바뀌고 희끗한 머리칼이 돌연 여름날 무성한 나뭇잎 같았다.

하긴 할머니에게도 소녀였을 적이 있었겠지. 고무줄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 저물녘이면 마냥 엄마 품이 그리웠을. 갑자기 엄마가 미치듯이 보고파 집으로 뛰어가면 밥 짓는 냄새가 먼저 솔솔 안도감으로 다가왔을. 부산한 부엌바닥을 헤집고 엄마 냄새에 돌격했을. 그럴 때면 할머니의 엄마는 막내딸에게 곱지 않게 눈을 흘기면서도 이내 등을 쓸어내리셨겠지.

할머니는, 내 할머니는 엄마의 냄새를 오래 맡지 못했다. 상실감을 지울 수 없어 그 냄새를 장정이 된 오빠에게서 찾으려 했다. 막내가 한없이 측은했던 오빠는 동생이 마치 딸인 양 감싸주었다.

할머니의 오빠는 오래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할머니 기억 속엔 여전히 사춘기 오빠, 믿을 구석의 전부였던 청년 오빠로만 존재하나 보다. 어쩌면 할머니에겐 엄마와 오빠가 이음동의어인지도 모른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의 표지를 이윽히 바라보자니 수건을 머리에 두른 내 할머니가 먼저 떠오른다. 조실부모한 할머니의 유년 시절과 내가 겹쳐져서인지 유독 나에게만 더 애틋했던 사람. 내 든든한 백이 되어주던 사람.

어쩌면 할머니는 자기가 미처 받지 못한 모정을 자신의 엄마를 대신해 내게 줌으로써 나를 자기와 동일시시켰는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엄마를 대할 때 안온한 아이 같았다. 먼 훗날 나는 엄마와 할머니를 이음동의어로 만들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물결이더니 어느새 여울을 만들어 맑은 물소리를 들려주는 신경숙.

신경숙을 고등학생 때 만났다.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에 실린 단편을 읽으며 막연히 신경숙을 동경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물결이 되어 강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강이 쩍쩍 갈라진 강바닥 표면을 드러내기도, 아침햇살에 일제히 반짝이기도, 가끔은 범람할 때의 위태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의 딸과 아빠의 여자가 아닌가 싶다. 어느 날 문득 엄마의 빈 자리를 틈입한 아빠의 여자. 시골 아낙의 투박함에 익숙했던 딸은 여자에게서 여자를 읽는다. 깔끔하게 치장한 눈부심과 국수 위의 고명 같은 아기자기함을 갖춘 여자. 엄마를 잊기엔 너무도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급기야 장래희망 칸에 그 여자를 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밤마다 여자의 손에 로션을 발라주던 아빠. 네 개의 손이 허공을 휘저으며 만들어내는 실루엣.

왜 나의 엄마는 이런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땀내 풍기는 수건을 노상 두르는, 음식에 ‘맛’이 아닌 ‘멋’을 부리지 못하는, 로션보다 장갑을 끼워주고 싶어지는 우직한 소 같은 엄마. 딸은 엄마를 아빠의 여자처럼 동경할 수 없었다.

큰오빠는 그 여자가 싸준 도시락을 자기는 물론 동생들까지 먹지 못하게 강요했다. 그래야 엄마가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란다. 큰오빠의 뜻대로 엄마는 다시 돌아왔고, 그 여자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딸에게는 그 여자가 엄마를 넘어선 여자였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일진데 당체 여자를 감지할 수가 없던 딸에게 여자의 모델이 되어준 여자. 엄마에게서 여자를 찾고 싶어 하는 딸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그간 출간된 신경숙 작품의 원천을 만난 듯했다. 딸의 기억에 저장된 엄마. 난 도대체 엄마를 얼마나 알고 있었단 말인가. ‘모녀 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P.25)’라고 생각했으나 후자일지는 몰랐다. 눈을 가리고 사는 것처럼 답답한 일상을 보내는 문맹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했다. 엄마는 세상이 해독할 수 없는 점자책 같았으나 딸은 엄마의 세상이 해독할 수 없는 점자책과 같았다. 남편에게, 심지어 자식에게 무시당하면 어쩌나 저어되었으나 그보다는 바가지가 살 독 바닥에 닿을 때가 더 두려웠던 엄마. 자기가 만든 음식이 자식들 입속으로 들어갈 땐 참으로 행복했으나 한편으론 쟤네들을 굶길 것 같아 무서웠던 엄마…….

시집와서 유일하게 잘해주던 어린 삼촌을 중학교도 못 보내준 게 한으로 남아버려 삼촌 기일마다 산 냄새와 함께 소주 냄새를 풍기는 엄마. ‘학교를 가지 않아도 좋으니 엄마가 성질을 좀 가라앉혔으면 좋겠다고 생각(P.50)'하는 딸 앞에서 ‘자식새끼 학교도 보낼 수 없는 살림 살면 뭐 하느냐(P.50)’고 살림을 부수는 엄마. 자신의 유일한 패물인 금반지로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고서야 환하게 웃는 엄마…….

<풍금이 있던 자리>의 그 여자를 내쫓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큰오빠가 바라본 엄마는 어떠한가. 실종된 엄마를 보았다는 행인의 제보에 첫 직장이었던 용산동사무소 근처를 배회하다 맞닥뜨린 기억. 아들에게 졸업증명서를 가져다주기 위해 난생 처음 서울행을 감행한 엄마. 서울에 처음 와본 소감을 묻는 아들에게‘너는 내가 낳은 첫애 아니냐. 니가 나한티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세상(P.93)’이라고 말하는 엄마.

자궁에 잉태되어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 주었던 탯줄이 잘리는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식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간다. 내 몸 같았던, 내 맘 같았던 아이가 이젠 젖을 빨며 다른 대상에 눈을 돌린다. 몸이 무거워지더니 엄마의 영역에서 자꾸 벗어나려 하고, 어느 순간에 자기의 키를 훌쩍 넘길 때는 타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서어서 자라라, 했음서도 막상 니가 나보다 더 커버리니까는 니가 자식인데도 두렵(P.94)’다고 말하는 엄마.

엄마처럼 살게 할 수 없어 열다섯 여동생을 첫째에게 맡기면서부터 엄마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아들 대하는 게 점점 어렵다. 하염없이 주면서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게 엄마의 심정인데, 엄마가 변변치 못해 동생 앞가림까지 떠맡겨 아들의 다짐이자 꿈은 한 발작 멀어져 갔다며 미안해한다. 장편 <외딴방>이 불쑥 튀어나오는 부분이다.

아내로서 엄마는 어떠했는가. 전쟁통에 일찍 결혼한 여자. 그런 까닭에 일찍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던 여자. 누구 딸보다 누구 엄마가 귀에 먼저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여자이기보다 엄마이길 선택했던 여자. 나의 삶을 접고 누구의 엄마의 삶에 평온을 찾으며 희생을 감수했던 여자.

심지어 남편의 동생이었던 균에게도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던 여자. 엄마의 사랑을 맘껏 받지 못했던 어린 균은 형수가 엄마로 다가왔을 것이다. 나무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형이나 누나보다는 텃밭이라도 팔아 새로운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힘써 주려했던 형수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을 것이다. 자살하기 직전까지 균에게 있어 형수는 엄마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안을 수 없는 짐까지 아내에게 떠넘긴 남편. 균에게처럼 아내에게도 일정한 간격을 두는 남편. 함께 걸을 때조차 숨 가쁘게 쫓아오는 아내를 배려할 줄 모르는 무심한 남편. 이는 습관이 되어 생활이 되었다.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결국 아내를 잃게 했다. 뒤늦게 밀려오는 회환에 아내의 삶을 되짚어 보다 딸에게 속내를 내비친다. ‘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 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 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겄거니 하며 살었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P.198).’

엄마가 여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사람도 존재했다. 모두가 힘들 때 더 힘들게 만든 사람이지만 사정이 딱해 돌봐준다는 게 마음을 연 것이다. 심적으로 의지했던 한 사람, 이은규. 그의 딸처럼 거리낌 없이 굴고 싶어서였을까. 그의 엄마가 되어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어서였을까. 부녀지간으로도, 모자지간으로도 보이는 그들의 관계.

개가 고양이의 엄마가 되어주기도 한다.

 

<엄마를 부탁해>는 어이없이 실종된 엄마를 찾으려 애쓰는 가족의 모습에서 엄마의 그림자를 찾아내려다 아득한 그리움과 조우하는 아픈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엄마가 되면서부터 자신의 엄마를 더욱 그러워하게 되어버린 세상의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작은딸은 찾을 수 없는 엄마가 더 애잔하다. 자식을 세 명 낳고 정신없이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엄마의 일생을 곱씹게 된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아픔의 크기는 비례적으로 증가한다. 우리 엄마를, 내 엄마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혹시 실종된 게 아니라 떠나버린 건 아닐까. 다가오는 이별을 미리 준비한 건 아닐까. 남편과 오남매와도, 마음의 안식처인 그와도, 자신에게 가장 모질었지만 남편을 낭군처럼 자식처럼 여기며 살았던 삶이 안타까운 아이들의 고모와도 이별 인사를 해야 한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기 마련인 ‘엄마’라는 말. 생의 끝에도 ‘엄마’라고 숨죽여 외쳐보며 세상과 작별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 나의 세계이자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였던 엄마를 시간은 무지한 엄마로, 끝내는 측은한 대상으로 만든다. 허나 오랜 시간 후 특별한 대상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알레르기가 심해 무명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인쇄업자의 어머니는 죽기 전에 그를 위해 평생 입고도 남을 무명옷을 만들었다. 과연 인쇄업자의 어머니는 기쁘게 자식의 옷을 만들었을까. 엄마의 부엌일처럼 힘들고 지겨워 수십 차례 장독 뚜껑을 깨부술 시간이었을지라도 자식은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 어머니는 요즘 여자들과는 다른 분이에요(P.77).’

 

누군가의 할머니이기 전에, 엄마이기 전에 손녀였던, 딸이었던 내 할머니. 할머니에게도 간절히 엄마가 필요했겠지? 세상의 모든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끌어안은 채 예수를 지그시 바라보는 마리아같은.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P.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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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7일 전쟁 카르페디엠 27
소다 오사무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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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껏 가출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다른 짓은 뒤늦게나마 시도할 수 있지만 가출은 십대에 해야 제격인데 말이다. 물론 성인도 가출할 수 있지만, 자칫 훌쩍 홀로 떠난 여행으로 비쳐 상황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곤란하다. 또한 적당한 구실을 마련하기도 버겁다. 십대라면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라던가, 학습 중심의 교육제도 불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도 아니면 물결치는 자유에 대한 무조건적인 갈망! 무엇을 갖다 붙여도 그럴싸한 구실이 되어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십대 가출은 부모 속을 제대로 썩이긴 하지만 더러 서로의 가치 추구에 대해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보다 커다란 세상으로 내딛는 힘찬 발걸음을 선물하므로 결코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문제다.




  여기, 떼거리로 가출한 소년들이 있다. 아니, 대놓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소년들의 이야기가 있다. 사반세기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소다 오사무 소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자의식이 형성되어가는 열네 살의 통쾌한 질주를 그리고 있다.




  해방구. 스물두 명의 자의식이 똘똘 뭉친 빈 공장은 십수 년 전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공투 세대가 공권력과 대치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역의 이름으로 거듭난다. 한때 똑같은 품질과 규격의 제품을 수없이 생산하다 중단된 공간은 저마다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소년들을 잉태한, 거대한 자궁으로 변모한다. 각자의 색감을 들고 태어났으나 사회에서 유용하면서도 순응하는 인간으로 제조하는 교육 시스템의 컨베이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아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해방구는 그들을 품는 아늑한 자궁이 되어준다. 다시금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각자의 색감을 되찾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의 때가 켜켜이 쌓인 어른들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 부모, 선생님 말 잘 들으며 공부나 하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뭐? 해방구? 당장 내려와! 허나 속마음과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한다. 사회생활의 이력만큼이나 놀라운 카멜레온 색깔 바꾸기 재주. 돌덩이를 숨겨놓은 카스텔라를 내밀지만 내동댕이친다. 어쭈! 한번 해보겠다고? 폭력성이 꿈틀, 고개 들었지만 가까스로 인자한 교사상을 연출한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고교 진학에 문제가 될까 저어한 엄마들의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 과보호로 아들을 나약하게 만든 엄마도 아들을 더 이상 길들일 수 없다. 버려진 공장은 약간의 작업으로 요새로써 모자람이 없었고, 자기네들의 의지를 지키는 소년들은 요새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손색없기 때문.




“잘 안 되는 이유는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보통 동물을 어떻게 길들이지? 개나 말을 조련하듯이 채찍으로 길들이면 반드시 잘돼가게 되어 있어. 이게 비법이야. 자네들도 머릿속에 잘 넣어두게.” (P.  222)




  존중받지 말아야 할 마땅한 인간이 있을까.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가진다. 성숙하지 않은 만큼 덜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은 같은 크기다. 허나 안타깝게도 태반의 교육자들은 피교육자들의 그것과 자기의 그것을 같은 무게로 쟤지 않는다. 성장과 배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한 학급 남아들의 집단행동은 사상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존재감을 느끼기 위한 시도였다.




“부패한 사람이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거 아냐. 부패하지 않는 사람치고 바보 아닌 놈 없고, 그런 놈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P. 273)




  개인의 안위보다 나라의 충성이 먼저인 군국주의 잔재가 개인의 인간다운 생활보다 체제 유지가 급선무인 사회를 지탱하고 있나? 군군국주의 교육의 희생자이기도 한 교장이 군가를 부르며 해방구에 재차 방문하는 광경을 보면 측은하면서도 무섭다. 시간이 흘러도 쉽게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려는 체제의 속성, 그 속성을 유지케 하는 부패, 부패에서 실속을 챙기려는 교장 같은 사람. 과연 아이들은 해방구를 지킬 수 있을까.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한데 대체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이지?




“어떤 게 좋은 어른인데요?”

“잘난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지.” (P. 73)




  부모나 선생의 리모컨 조작대로 움직이는 아이라면 잘난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겠지. 그렇게 어른이 된 아이는 다음 세대 아이를 품질 검사 완료한 상품처럼 포장하려 들겠지. 몰개성을 재빨리 습득하면 안전하다고 판단내리겠지. 인간의 다양성을 속박하는 사회 장치에 저항하는 것은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겠지. 흐르지 않는 물은 악취를 풍긴다는 것을 망각한 체하며.




“져도 좋잖아. 하고 싶은 걸 할 수만 있다면.” (P. 29)




  합리화라는 그럴싸한 허울을 뒤집어 쓴 사회와 그 사회를 떠받고 있는 기성세대에 경종을 울린 애송이들의 반란은, 실은 결연한 의지보다는 캠프의 흥겨움에 가깝다. 그렇지만 늘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님을, 중학교 1학년도 충분히 세상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음을 7일 동안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규격화된 틀로 붕어빵 굽듯 아이들을 대했던, 적당히 눈 감으며 안온을 추구하던 어른들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속수무책이다. 알고 보면 세상에는 승부가 필요치 않은 경우도 꽤 있다. 진다고 해도 속상하지 않는 이들과의 맞붙음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다음에 우리가 모두 없어져도 별은 저렇게 빛날 거야.” (P. 51)




   아이들이 빠져나간 해방구를 침입한 어른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둥대는 것도 잠시, 온갖 망상을 끄집어내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이를 때, 어쩌면 그들은 하멜른의 어른처럼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을 터. 섣부른 반항에 지나지 않다고 여긴 사건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 빛이 수백 광년 떨어진 곳까지 전달되어 그곳에서도 여전히 빛나길.




  프랑스 68혁명을 짐작케 하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의 잔상에 이어, 프랑스의 68혁명 열기가 일본 열도를 달굴 무렵 고등학생이었던 무라카미 류가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며 쓴 소설 <69>를 원작으로 제작한 동명의 영화의 잔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각기 다른 인간이 지닌 색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세력에 대항하는 길은 오직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69> P. 242)’임을 해방구 아이들은 몸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멋들어지게 해방구 문구를 쓴 아키모토는 다 부족하지만 미술 과목만은 우수하다. 체육엔 별다른 자질이 보이지 없으나 전자 기계에 남다른 눈이 있는 사토루, 레슬링에 빠져 살다보니 레슬링 중계에 탁월한 재치가 돋보이는 아마노 등 아이들마다 각기 다른 다양한 색감을 지니고 있다. 자기 색을 적확히 찾으면 아이들은 질리언 린처럼 비상할 수 있다. 어렸을 땐 주의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학습장애아 취급을 받았으나 춤에 남다른 관심이 있음을 발견해 준 한 사람 덕분에 뮤지컬 <캣츠>, <오페라의 유령>의 안무가로 활동한 발레리나 질리언의 푸에테(한 다리 발끝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다리로 휘젓듯 32회전하는 여성 무용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테크닉)를 그려본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자의식을 형성해가는 사춘기 소년들의 각각의 고유색을 지키기 위한 유쾌한 몸부림이다. 어른 또한 ‘다름’을 인정받고 싶은 성장기를 다 거쳤을 텐데, 그런 적 전혀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는 꼴이 역겨워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분명한 주제의식이 자연스레 서사에 녹아들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깔깔대며 마지막 장을 덮으면 먹장구름처럼 밀려오는 우리의 현실은 독자로 하여금 씁쓸함을 감출 수 없게 만드는데, 이는 이 소설이 지닌 가벼움 속의 감춰진 묵직함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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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구한 아이들의 눈빛에 감춰진 잔인성이 고개들 때면 소름이 돋는다. 잠자리를 잡아 실컷 갖고 놀다 심심해지면 양 날개를 잡아당겨 몸을 찢거나 머리를 한 바퀴 돌리고서 날려 보내는 아이를 목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방금 자기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잊어버리고 카메라의 피사체가 된 듯 해맑게 웃을 줄 알기 때문이 아니다. 감추고 싶은 내 어린 날을 들추어내는 작은 손을 바라보면 나는 양 손으로 반대쪽 팔뚝을 쓸어내려야 한다. 

  학습이란 참 무섭다. 지금은 땅강아지를 손바닥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지만 ‘앞으로 나란히’ 구령에 맞춰 줄 서는 것을 배울 때는 땅속으로 도망가는 땅강아지도 한번에 집어냈었다. 어렵지 않게 장난감을 마련해서인지 잠깐 갖고 놀다 집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나와 사이가 좋지 않던 한 아이, 어느 날 이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집으로 냅다 뛰어가는 땅강아지를 밟아 죽였다. 아직은 내 건데! 잔뜩 화가 났지만 그애가 벌레를 잡을 때까지 무심한 척하며 기다렸다. 머잖아 나도 덩달아 밟을 수 있었다. 톡, 하고 작은 생명체가 터지는 소리. 일순 한기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운동화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다리를 떠는 생명체를 짐작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도리 없었다. 이렇게 섬뜩함으로 시작된 놀이는 학습되었고, 학습은 다양성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군국주의가 팽배하던 일본 근대사를 배경으로 서술하며, 한 인간의 성장을 통해 교육철학을 말하는 시모무라 고진 소설 <지로 이야기>. 여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메뚜기 머리 따기’ 놀이를 곧잘 한다. 메뚜기를 잡아 옷을 물게 한 다음 방심한 틈을 노려 몸통을 잡아당기면 머리만 옷에 남게 된다. 누가 먼저 머리 열 개를 모으나 시합하는 식의 잔인한 장난이다. 생명을 장난으로 빼앗는 것이 옳지 않음을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각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인데, 삶의 보편적 가치를 터득한 인격체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자칫 잔인함 속에서 쾌감을 찾는 인간의 본성에 머물 수도 있다.

  미야베 미유키 소설 <모방범>을 읽으며 메뚜기 머리 따기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해사한 얼굴을 떠올렸다. 마치 사과라도 따듯 흡족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과 아미가와 고이치의 ‘피스’를 연상시키는 둥근 웃음이 겹쳐졌다.

 

범죄란 ‘사회가 갈구하는’ 형태로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1권 P. 111)

 

  법이란 게 만들어지고 난 후 범죄가 생겼다. 물론 그 전에도, 후에 범죄라고 명명할 수 있는 사건은 있었겠지만 법을 저촉한 것은 아니다. 판단할 기준이 없었으니까. 개인의 생명과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려는 사회의 움직임에 따라 법이 보다 구체화되면서 범죄 또한 다양해졌다. 원한이나 탐욕을 넘어 자기 욕구에 충실하려는 목적으로 범죄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는 사회 안에서 존재감을 갖으려는 의도가 짙다. 웬만한 일로는 주목받기 어려운 까닭에 자꾸만 삐딱해진다. 삐뚤어질수록 귀 기울이는 사회. 그렇다. 범죄는 사회가 갈구하는 형태로 일어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3권 P. 303)

 

  자존감을 드높이기 위해 거대한 굿판을 벌이는 고이치. 소품은 넉넉히 준비했으니, 사람 잡을 선무당 목이 꽤나 간지러우니, 징이며 꽹과리는 언론매체에서 알아서 쳐줄 터다. 몸 사리고 있다가 절정의 순간에 칼 위에서 날뛰면 여기저기서 플래시를 터트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 사회가 요구하는 건 진실이나 진심 같은 싸구려가 아냐. 아름다운 줄거리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 (2권 P. 337~338)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고픈 고이치는 한 사회를 무대로 각본을 치밀하게 짰다. 관객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 뒤의 이야기를, 동선을 미리 구상했다. 사람속의 온갖 감정을 표출하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미리 마련했다. 돌발 상황도 바로 극의 일부분으로 전환하는 연출가의 작품, 드디어 굿판은 시작되었다. 한적한 공원에서 여성의 오른팔이 등장한 것이다.

  경악하던 관객들은 이내 분노한다. 이렇게 변한 세상을 한탄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극의 흐름이 자못 궁금해 흥미를 주체 못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소수의 관객만이 배우로 거듭나는 희한한 무대.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환상이라는 왕국 속에서 작은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은 왕이다.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 자체는 결코 사악하지도 않고 죄도 아니다. 오히려 알력으로 가득한 현실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도 하다. (2권 P. 451)

 

  선무당 역의 구리하시 히로미는 왕좌에 앉은 왕이라도 된 기분이다. 비록 고이치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내가 주역이나 마찬가지다. 소품에 지나지 않는 시체가, 아니 대사 하나 없는 엑스트라가 등장할 때마다 공포에 휩싸이는 관객을 지켜보는 유쾌함을 무엇에 비할까. 생사여탈권을 쥔 왕 노릇, 해볼 만하다.

  허나 자기 세계를 굳건히 다진 다음 그 안에서 왕이 되지 못한 히로미는 서둘러 퇴장한다. 그의 유일한 벗 다카이 가즈아키와 함께. 각본대로 연기하지 않은 배우가 괘씸하지만 어차피 퇴장할 거 잘 되었다며 연출가 겸 배우가 된 고이치는 무대에 올라 멋들어지게 칼춤을 선보인다. 퇴장한 두 인물로 수사가 좁혀지게 조작해놓고 가즈아키는 절대 살인범이 아니라고 노래 부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장단을 쳐주는 매스컴에 한창 신명난 배우, 자신의 위대한 작품을 일개 모방작이라 폄하하는 말에 그만 칼 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만다.

 

만일 찢어지게 가난했더라면.

못생겼었다면.

키가 작았다면.

교양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거야.”(2권 P. 241)

 

  우성인자에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으니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셈이지만 결정적으로 한 가지를 갖지 못한 고이치. 친구들 사이에서 이름보다 ‘피스’로 통할 만큼 늘 웃는 얼굴을 연출하지만 실은 온기 있는 웃음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해 본 적 없으므로. 복잡한 가정사를 차지하더라도 누군가 한 사람 절대적인 사랑을 내어준 적 없었으므로. 앞의 전제를 다 무시하고 ‘온몸의 세포가 열리도록 사랑받아 본 적 있었다면’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을 그가 알아채지 못하고 굿판은 끝났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어둠을 지니고 있어. 범죄자만 사악한 게 아냐. 너나 나나. 다 똑같이 시커먼 부분을 갖고 살아가고 있어.” (3권 P. 391)

 

  어둠이 없는 자는 없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인간에겐 맹목적인 선의와 동시에 맹목적인 악의가 내재되어 있는지도. 다만 어느 쪽을 더 발현시키는가의 문제일 뿐. 사회가, 환경이 어느 쪽을 더 유도하느냐의 차이일 뿐.

 

  1,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이지만 가독성이 뛰어나 뒤로 갈수록 책장 넘기는 손맛이 살아난다. 피해자의 시선으로 시작해 가해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다시 보는 방식을 택하여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는 독자를 작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피해자 시선과 가해자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지막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박차를 가하는 서술에는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감지된다.

  가독성과 더불어 더러 눈에 들어오는 적절한 비유가 소설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분노의 발작을 ‘그것은 마치 자동차 핸들을 잡고 있다가 갑자기 컨트롤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2권 P. 325)’으로 비유한 부분과 비유를 넘어 미문이 된 ‘밤하늘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그만 구멍이 뚫려, 거기에서 빛이 샤워처럼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2권 P. 236)’, ‘맑은 겨울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도 잘게 갈아서 뿌려놓은 얼음 가루 같아 보였다. (3권 P. 432)’라는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감흥이 짙은 것 또한 이 소설의 미덕이다.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안고 여생을 보낼 아리마 요시오의 고통과 한평생 누나의 대체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히로미의 번뇌가 길항할 때, 가족을 비극으로 몰았다는 쓰카다 신이치의 죄의식과 타인의 아물지 않은 생채기에 과산화수소를 쏟아 붓는 히구치 메구미의 자의식이 마찰할 때, 끊임없이 어둠을 내보내는 고이치의 비겁함과 인간의 어둠에 대해 글을 쓰는 마에하타 시게코의 최초이자 최후의 일격이 충돌할 때는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가즈아키만큼은 아니다. 일순 숨이 멈춰지고 뒤미처 먹먹해졌다. 히로미의 삶을 온전하게 되돌려놓으려는 간절함이 눈물겹다. 우정은 오래전에 주종관계로 변질되었어도, 심지어 살해한 다음 자살로 위장하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도록 세운 계략에 휘말렸어도, 따뜻한 기억을 주었던 유년 시절의 친구를 잊을 수 없는 가즈아키. 이 세상 누구보다 친구의 고통을 이해하고 손 내밀었기에 맞잡을 수 있었다. 비록 죽음이 코앞으로 닥쳐오고 있지만 둘에게는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살아서 무대를 지킬 고이치가 더없이 측은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온몸의 세포가 열리도록 히로미를 사랑한 가즈아키의 손은 작가가 <모방범>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전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내가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말을 거는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처음부터 듬직한 인간은 없다. 처음부터 힘 있는 인간은 없다. 누구든 상대를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순간에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권 P.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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