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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 그리움을 안고 떠난 손미나의 페루 이야기
손미나 지음 / 예담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삶과 죽음이, 인간과 자연이, 과거의 현재가 하나 되는 곳.”
그리움을 안고 떠난 손미나의
페루 여행. 하지만 그녀의 그리움은 페루에서의 또 다른 그리움을 만들었다. 여행의 일정을 연장하여 또 다시 간
쿠스코에서 그레고리와의 만남과 절친인 이야와 그녀의 가족들과의 만남. 드넓게 펼쳐진 연초록색 잔디와 잉카인들의
지혜와 삶을 엿 볼 수 있었던 마추픽추. 변덕스러운 날씨와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서 산소가 부족해 코카 잎을 비벼 들이마시고 잘게 다진 기니피그를
먹은 기억. 하지만 변덕스러운 날씨는 큰 무지개를 만들어 냈고 고산병으로 고생하던 그녀들에게 호텔 직원은 상상이상의 산소통과 마스크를 부둥켜안고
초인종을 누른 추억담까지.
내가 얼마 전에 쓴 글이 하나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과의 갈등에서 떠올린 생각이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흐릿해지는 의식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꽉 잡고 있었다. 요동치고, 떨리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혹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잔뜩 움츠린 팔.
좋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 싫은 것 몇 개를 내어주어야 할 만큼 그것이 좋으냐고 물었더니
뿌연 담배 연기가 허공에 스며들어 하늘로 동화되는 것처럼 잊힌다면 좋다고 말했다.”
페루에서의 힘들었던 일들을 다시
겪어야 할지라도 다시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라고 물어본다면
그녀는 말 대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방을 쌀 것이다.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그녀는 아버지가 가보고 싶었던 페루의 여행을 결심한다. 특히 그 일정 중 콘도르 보기가 그녀의 계획 중 가장 의미가 있었다.
오랫동안 그곳을 보았던 가이드마저 그토록 큰 콘도르는 보기도 힘들 정도라고 했으니까. 그 글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고 그녀가 콘도르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콘도르가 하늘을 선회하는 그 모습은 “나는 잘 있단다.” 라고 보내는 아버지의 우주
메시지였을까.
그녀가 결정적으로 이 책의
제목을 내 영혼에 바람이 불었다라고 표현한 이유를 책 중간쯤에 달했을 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크아이와만에 있었던 그녀가
연초록 잔디밭에 누워 바람을 맞으며 들었던 생각들. 바람, 무수히 많은 페루의 영혼들이 한 줌 바람이 되어 그녀의 온 몸을 스칠 때 그녀 역시
페루의 바람이 되었다.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이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하나 되는 곳.
“아무리 뜨거운 인생도 결국은
역사 속으로 묻혀버리게 된다는 진리가 온몸을 파고드는 것 같고……. 그러한 인간 삶의 유한함을 약간은 더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p153-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다.
오늘을 사는 이유는 어쩌면 바람 한 줌에 있을지도 모른다.
소박하지만 행복했던 우리의
만찬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갈 시간. 아주머니는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서둘러 훔쳐내고 다정하게 포옹하며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진정한 기쁨으로 가득했지만, 분명 삶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도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아주머니,
행복하세요?”
“젊은 아가씨, 우리의 땀이 곧
우리의 삶이에요. 인생은 그런 거지요. 어디에서 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아요. 중요한 건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있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당신도 부디 행복하세요.” -p92-
“저게 대체 뭐죠? 동성애를
상징하는 깃발 아닌가요? 혹시 여기도 부에노스아이레스처럼 동성애자들의 천국……?”
내 질문에 곱슬머리 인디오
남자가 폭소를 터뜨리며 답했다.
“아, 저건 쿠스코 깃발이에요.
쿠스코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건 알고 계시죠? 잉카인들은 비, 천둥, 땅, 바다 등과 같은 자연을 신으로 섬겼는데, 그중 최고는
태양신이었어요. 무지개는 번식의 힘을 대변하는 신이었는데, 무지개 양 끝을 뱀 두 마리가 받치고 서 있는 문양이 잉카인들의 상징이었죠. 쿠스코의
깃발은 그로부터 유래한 것 같아요.” -p100-
페루 여행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어 더욱 감사한 시간이었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한없이 낮아지던
경험. 때로는 그저 겸허하게 받아들이거나 포기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깨달음. 인간 능력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교만함을 버릴수록 영혼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 이것이 바로 페루여행에서 얻은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p115-
비록 단 하루뿐이었지만 참 많은
생각과 흐뭇함을 내 가슴속에 심어준 만남이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오만과 질투, 불만과 짜증으로 얼룩져 불평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토록 완벽하게 행복한 미소를 지어본 때가 언제였던가. 하얀 물거품을 만들어내며 세차게 달리는 뱃머리에 앉아 아주머니에게 산 봉제 인형을 손에
쥐고 멀어지는 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일상으로 돌아가고, 다시금 스트레스를 받아 휴가 타령을 하고, 친구와 나의 삶을 비교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일들을 뒤로 하는 동안에도 저 섬에는 어제와 같은 평화와 단순하기에 명확한 행복, 자연과 인생에 대한 겸허함이 가득할
테지. -p182-
“재미있네요, 그러니까 저게
오늘 하루만 벌이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늘 행해지는 축제의 형식이란 거죠?”
“물론이죠. 그냥 이 사람들의
일상이에요. 여기선 배고프지 않을 만큼의 양식만 있으면 싸울 일도, 욕심을 부릴 일도,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도둑질을 할 일도 없어요. 그저
산신들에게 감사하면서 인간의 숙명대로 주어진 현실을 살아낼 뿐이죠. 태양이 뜨고 비가 내리는 것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요.”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