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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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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처음 도착했을 때, 얇고 가벼운 책의 무게를 느끼며, 짧은 페이지로 묶여있는 장들을 대충 훑으며, '금방 읽겠거니'하며 읽는 날을 미뤘다.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잡고 지하철에서나 강의실에서 이 책을 펼쳤지만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가볍기만 했던 책은 책장 하나를 넘기기기에도 버거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장 한장 읽어내기를 포기하고 일단은 책장을 끝까지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남은 것이 있을까 생각했다. 의미를 얻지 못한 문장들만 머릿 속에 둥둥 떠다녔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책을 읽은 것이 아닌, 책 읽기를 실패한 자의 변명이나 한숨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알랭, 칼리방, 샤를, 라몽' 이 네 사람의 이름에 익숙해지는 것 조차도 힘겨웠다.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해보려하는 순간 문단은 끝나 금방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고 나는 당황해하며 자꾸만 뒤를 돌려봤지만 성질만 부리며 덮어버렸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이 책에 대하여 '쿤데라가 독자들을 위해 열어 준 지혜의 축제. 보다 높이 날아오르기 위한 가벼움'이라고 말했다. 축제는 기존의 엄숙하고 권위적인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에 따라 모든 질서가 전복되고 일탈이 허용되는 순간이다. 축제를 진정으로 줄기기 위해선 '권위적인 주류 문화'의 존재를 의식하며 주류 문화가 가지는 부조리에 대한 의식 또한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쿤데라가 열어준 '무의미의 축제'에 몸을 던지기 위해 알아내야 할 거대한 '무의미' 혹은 '의미'의 대상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소설을 한번도 읽지 못했다는 이유가 제일 클 것이다. <무의미의 축제>를 말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전작 <농담>을 언급한다. 두 소설 모두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않는 순간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의미 없는 말을 의미 있는 말로 해석하여 농담을 던진 사람의 삶 전체를 그 '유의미의 말'로 점철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이 가지는 '의미'를 흐릿하게나마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농담>을 읽지 못했기에 남들이 쓴 의미만을 좇는 것일 뿐이다.


 그나마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의미있게 남은 장면은 알랭의 엄마가 자살을 하려다 누군가를 살해한 대목이다. 내가 죽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버린 아이러니, 그리고 죽기 위해 누군가를 죽인 순간 삶에 대한 갈망이 숨차게 밀려온 그 아이러니. 뒷통수를 강타하는 강렬한 모순에서 이어지는 알랭의 '사과쟁이'에 대한 부정적인 단상들이 묘하게 얽혀 어떤 '의미'를 일렁이게 만든다.


"나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래. 나는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

"사과를 하는 건 자기 잘못이라고 밝히는 거라고. 그리고 자기 잘못이라고 밝힌다는 건 상대방이 너한테 계속 욕을 퍼붓고 네가 죽을 때까지 만천하에 너를 고발하라고 부추기는 거야. 이게 바로 먼저 사과하는 것의 치명적인 결과야."(57,58 p)

 알랭은 '사과'는 미안함을 전달하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며 곧 지금 벌어진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라며 의미를 덧붙인다. 결국 알랭 역시 길거리에 어깨가 부딪힌 여자에게 사과를 던지고 자책하고 마는 '사과쟁이'인 셈이다. 그가 사과쟁이가 되어버린 이유는 물에 빠진 남자의 생명을 죽이고 자신의 삶이 태어났다는 자신의 존재성부터가 '죄'의 시작이었다고 의미지어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생은 그저 생일 뿐이다. 잉태했기 때문에 태어났으며,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다. 자식을 낳느냐 마느냐 선택하는 부모에게는 어떠한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마냥 태어나는 아이는 그저 태어나는 일만 하는 것이다. 의미를 붙여 사과쟁이가 될 필요가 없다.


 이런식으로 슬그머니 내가 읽어낸 장면에 의미를 덧대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완벽히 읽어내며, 작가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드는 모든 생각과 문장들은 결국 내 마음대로 의미를 붙여 내게 의미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역시 그처럼 마음대로 의미를 만들어 기억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재미가 아닌 억지처럼 느껴질 때는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의미를 둘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 하지 말고, 무의미 그 자체를 사랑하라. 어쩌면 이 책에 대한 의미 찾기를 포기하는 일이 작가가 바라는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담 없이 책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무의미의 축제' 그리고 그 속의 철학이 무엇인지 사랑할 수 있도록. 무의미를 찾기 위해 의미를 되짚는다. 무의미를 찾기 위해 의미를 죽인다. 그 순간 의미가 살아난다. 모순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또한 이 책을 사랑하는 법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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